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 9-16(주일 예배 설교문)
담임목사 김종웅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한복음 3장 9-16절
2016년 4월 3일 주일 낮 예배
No. 257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그러한 일은 어떤 일인가? (10-11절)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빚진 자와 같이 사는 사람. 혈연과 연고를 넘어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며 사는 삶. 소비의 즐거움과 군림의 쾌락보다 섬김의 행복한 삶.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나의 삶은 전혀 다른 존재 가치 판단이 달라진다.
우리 지난 주에 거듭나지 아니하면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또 거듭나지 아니하면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잠깐 면화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위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아이 태아가 태어나서 사람이 되고, 자연인이 되었는데, 그 아이를 다시 엄마의 뱃속과 똑 같은 상황 속에 잡어 넣으면 죽거든요. 태어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겁니다. 아주 신비한 겁니다. 또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의 나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나는 똑 같은 사람이지만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다른 존재라고 할 때에 우리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고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은 가치 판단이 달라집니다.
1. 내가 베풀고 난 뒤에 나에게 받은 그 사람에게 오히려 내가 채무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 내 혈연과 연고만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세계적인 석학 신학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으면 모든 인류가 자기의 가족과 같이 여겨 진다고 했다.
우리가 찬송가에 있는 대로 이전에 좋든 것이 이제는 값없이 되는 그런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겁니다. 이런 거듭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야 천국이 되는 겁니다. 우리 지금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지금과 같이 판단하고, 지금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환경인 천국에 가도, 지옥이 되는 거지요. 오늘도 우리가 요한복음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이런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세상이 주는 평화 말고, 하나님이 주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에서 자유 함을 누리고, 또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천국을 맛이라도 보면서 신앙 생활하는 그런 신앙 생활이 되야 됩니다.
제가 지난주 거듭남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 때에는 첫째는 거듭난 사람은 은혜의 삶을 산다 했는데, 은혜의 삶을 사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베풀고 내가 행한 일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겁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겁니다. 내가 베풀고 난 뒤에 나에게 받은 그 사람에게 오히려 내가 채무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아주 신기하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목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것 보셔야 됩니다, 우리 교회는 파티가 많은데 삼겹살을 내는 사람이 먹어 주는 사람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세상은 여러분 조금 주어 놔 놓고 그것 해 주고 주인 행세 하니까 얼마나 우리가 자존심 상합니까?
천국은 꺼꾸로 거든요, 두 번째로 거듭난 자의 삶은 거듭나게 되면은 내 혈연과 내 연고만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다고요, 내 자녀가 그렇게 귀하게 보이면은 다른 사람의 자녀도 귀하게 본다고요, 내 고향이 그렇게 좋으면은 다른 것도 귀하게 보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에는 이런 변화가 없는 종교인들만 훌륭한 종교인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지난 주일도 어떤 신학교에서 세계적인 석학을 불러서 신학 Forum 을 했는데, 그 여러분 국민일보 한번 보세요, 그 세계적인 석학 신학자가 뭐라 했는가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으면은 모든 사람이 모든 인류가 자기의 가족과 같이 여겨 지는 것이다. 제 말이 아니에요 그것이 위로 남이에요.
지금 우리가 전부 내 고향 내 혈연 나하고 관계 있는 사람들만 귀하게 여기다 보니까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많은 낭비가 일어나잖아요. 세 번째로 우리가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지면은요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소비의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서 마음껏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또한 남들 위에 굴림의 쾌감으로 사는 삶도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의 육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거듭나게 되면은 내가 수고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 주는 내가 행복해 지는 겁니다 섬김의 삶이 사라지는 겁니다. 이런 거듭남을 여러분들에게 말을 할 때에 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할 때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뭐라는 가 하면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나이까 이랬다고요.
세상에 속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하면은,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는 질문이 나타나야 되요. 여러분 요즘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여러분들의 가족이나 형제나 친구들이 어떻게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은 지금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 행하지는 못하지만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을 가지고 천국에 그저 들어간다면은 그 천국이 천국이 될 것인가 지옥이 될 것인가? 한번쯤 점검해 보세요. 구원은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만은 굉장한 문제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왜 이 모양이야 할 때, 나는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되요.
2. 옛날 농경 시대는 유산을 받지 못하면은 절대로 지주 Group 이 될 수 없고, 소작인으로 평생 살아야 했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옛날에는 여러분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이런 간증이 너무나 많았어요. 지금과 같이 예수 믿어 가지고 복 받고 자식 잘 되고, 이런 간증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간증이 있었는가 하면은 여러분 잘 알다시피 지금은 좋은 Idea 가 있으면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농경 시대에는 부모에게서 땅을 유산으로 받은 만큼 부자가 되는 겁니다. 유산을 받지 못하면은 절대로 지주 Group 이 될 수 없고, 부자가 될 수 없고, 소작인으로 평생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유산을 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부모는 자기에게 제사를 지내 줄 자식에게 특히 장자와 장손에게 유산을 물려주잖아요. 그런데 기독교가 전례되고 난 뒤에 장손으로서 장자로서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는 그 권리를 예수 믿으면 안 준다고 할 때, 그것 포기할 때, 다른 형제들이 우리 형이 바보가 아닌가? 미친 것이 아닌가?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할 때에는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장사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들었다고요. 오늘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부분에 대한 올바른 점검이 있어야 됩니다. 목요일마다 노회의 목사님들 모여서 제가 성경 공부하고, 조그만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에 목사님 목사님 같이 말해도 목회가 됩니까? 이런 이야기 해요. 여러분 정말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 갈수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남에게 주고도 받은 사람에게 고맙게 여기고, 내 자식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식도 소중히 여기고, 대한민국 사람이 중요한 만큼 일본 사람도 중요하게 여기고, 남한에 있는 우리가 중요한 만큼 북한의 주민도 중요하게 여기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소비의 즐거움을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많이 벌어서 자신을 위해서 사용할 줄도 알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용할 줄도 아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과연 자본주의 사회 이 땅에서 올바른 삶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인가?
목사님의 설교대로 살아간다면은 우리나라는 세계의 열광에서 뒤쳐져 버리지 아니할까? 이런 생각을 하셔야 되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런 질문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면서 성경 박사라고 하면서 이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말하면은 믿겠느냐? 라고 말을 하시면서 14절에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 여러분 아시는 사건이지요 민수기에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에 왔을 때에 모압 여인과 음행을 하고 이래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했습니다. 불 뱀이 와서 물었어요. 그 광야의 불 뱀이,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떤 방법을 제시했는가 하면은 장대 끝에 놋으로 뱀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높이 쳐들어라,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리라 이렇게 한 겁니다, 여러분 누가 놋 뱀을 쳐다보았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통념이 만들어 낸 방법과 생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놋 뱀을 보고 다 살아났다고요. 그걸 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한 거에요. 여러분 여기에서 예수님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라고 말을 하는 것은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항상 물리적인 현상의 단어 속에 하늘의 일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3.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말한다. 높이 들린다는 말씀 속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있다.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골고루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드릴 때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매어 달려서 지상에서 달릴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지상에서 높이 들린다는 이 말씀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땅에서 들린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들어내는 영광스러운 자리다. 무슨 말이냐 여러분 우리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남에게 베풀면서도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내 자식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식도 중요하게 여기고, 내 고향을 사랑하는 만큼 모든 지역을 사랑하고, 내가 수고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면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는 이런 삶을 살아가려면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 체계 그것 포기해야 됩니다.
자본주의는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는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여러 사람 위에 굴림 하는 쾌감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생명의 방법입니다 이것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제시하신 것이 뭐냐 하면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에게 어떠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를 믿는다는 것은 이것을 받아 드린다는 사건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계시해 주신 우리 인간과는 조금도 같은 면이 없는 공유되지 못하는 거룩하신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바라보는 사람 그것을 받아 드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드리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말에 속지 마세요, 하나님에게 잘 보이면은 하나님이 복 주고, 못 보이면은 벌 준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그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골고루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능성이 있고 쓸모가 있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자에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그 사람 그게 이 지상에서 어머니이지요, 그 어머니의 사랑은 어머니는 그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잊지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드려서 그 사랑을 받아 드릴 때에 이 세상은 구원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신뢰하는 겁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우리의 어떤 성품이 아니고,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를 천국으로 보내어 주는 그 하나님의 능력!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우리에게 앞에 그렇게 거듭난 자들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 우리를 인도하실 능력이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을 받아 드리는 자, 우리는 타락한 피의 속성 때문에 내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지만은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는 잔인한 인간의 본성 그것을 파괴하고 성령으로 모든 사람이 한 가족 되게 하신 그 그리스도적 구원의 사건을 받아 드리는 것이 그를 믿는 겁니다. 이것이 하늘의 일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얼마나 아프셨는가? 땅의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받아 드릴 때에 우리 속에 영생, 죽지 않는 생물학적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요, 영원한 존재의 생애, 영원한 존재가 사는 삶의 양태, 하나님의 삶의 양태,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끊임없이 가져야 되고, 끊임없이 취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해 지려고 하는데, 무한대이시고 영원하신 그 하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의 양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그 하나님의 생명의 양태를 우리가 가지게 될 때, 우리 안에 구원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이런 말입니다.
4. 부활에 계시된 하나님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는 영원한 가족의 공동체를 만드신 성령의 능력,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 한국엔 SKY (서울.고려.연세)대학은 나와야 된다는 신념을 깨트려야 된다는 것.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들이 거듭난 자의 삶, 참 목사님 설교 들으면 부담스러워야지 베풀고 난 뒤에 받은 사람에게 내가 더 고마워 하는 마음, 내 혈연의 가족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내 가족과 같이 여기는 마음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소비의 즐거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수고의 분복을 내가 누리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때 주면서 행복해 하는 이런 삶, 어떻게 가능한가? 십자가에 계시된 그 하나님의 사랑, 부활에 계시된 하나님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는 영원한 가족의 공동체를 만드신 성령의 능력,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 하게한 그리스도적 사건을 받아 드림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에 우리 속에 일어나는 삶입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이 만들어 논 많은 가치 체계 [體系]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가치 체계, 인생의 그 Track 에서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아요. 옛날에 조선시대에는 과학을 하는 가치 체계가 만들어서 신분 상승을 위해서 어쨌든 장원급제 하려고 그 Track 에서 모든 사람이 좇아가는데, 과연 몇 명만 장원급제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거지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가치 체계에 사회의 적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한국에는 그래도 SKY (서울.고려.연세) 대학은 나와야 돼, 그래야 취직이라도 좀 할 수 있어, 이걸 깨트려야지 우리 속에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땅에서 누리는 천국이 있는데 이것 무엇으로 깨트리겠어요? 여러분.
여러분들 좀 더 쉬운 이야기로 할게요,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다 뭐냐 하면은 인간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대가 만들어 낸 가치 체계 속에서 그것에 합당한 사람을 만들려고 우리가 자녀들에게 요구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아이들에게 입만 열면 나오는 소리가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잖아요, 공부해서 남 주나 하잖아요. 남들보다 더 많이 벌려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쫓아다니면서 자기 통장에 늘어나는 숫자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의 가치 체계의 사회라고요, 거듭난 하나님의 나라는 앞에서 이야기할 때에 그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삶이잖아요. 누가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이지요.
여러분들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다 뭡니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사회 틀에서 그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염려하는 거지요. 사실 뒤 처져도 괜찮은데, 그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가치 체계의 사회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그 선하신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믿는 사람,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그 믿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니고데모에게 성경을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아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너를 구원할 것이고, 너희 사회를 구원할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좀 돕기 위해서 개인적인 이야기하는 것 용서 구합니다. 여러분 이런 것 하고 같은 거에요.
5.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가치 체계를 파괴하려고 주님이 오셨고, 성령을 보내어 주셨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드리는 것이 믿음인 줄 알아야 된다.
우리 집에도 둘째 아이가 공부를 꽤 잘했어요 첫째보다 더 잘 했는데, 아버지가 국가 유공자이니까 옛날에 특차라는 것이 있었어요, 국가 유공자들끼리만 붙는 것, 그것은 수능 이전에 대학을 결정하는 겁니다. 그래 덜커덕 했는데 공부하기 싫어 가지고 여름 지나면서 경희 대학에 떡 합격을 했습니다. 합격을 했는데 3월 달이 되니까 학교 안 간다는 거에요, 왜? 시시하다는 거요, 여러분 그러더라고 대부분 아이들이 우리가 정해 놓은 대학의 Grade 에 따라서 높은데 갈수록 자기 만족이 있고, 낮으면 낮아요, 반수한다고 난리를 지기더니만 6개월이 지나니까 하는 소리가 아빠 다녀 보니까 sky 말고는 똑 같은 것 같아, 대학을 졸업할 때 되니까 뭐라는 가 하면은 sky 이고 뭐고 대학 뭐 별 것 없어 똑 같은 것 같아, 착각만 하고 사는 거에요.
내가 서울대학 안 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안 가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왜 그걸 못 벗어나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사회적 가치 체계에 나를 도와 주는 분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가치 체계를 파괴하려고 주님이 오셨고, 성령을 보내어 주신 거에요.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도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할 때에도, 제국주의적 선교관을 가지고, 성령 받으면은 하나님에게 초월적인 능력을 받아서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전도할 때에는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2장 보세요, 성령이 임하고 날 때에 당대에 인간이 만든 모든 가치 체계가 파괴가 일어난 겁니다. 이전에 좋든 것이 이제는 값없이 되는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옛날에는 남에게 섬김을 받아야 살맛이 났는데, 이제는 섬겨야 행복 해지는 겁니다. 이게 권능 헬라어로 두나미스 입니다, 거기에 파생된 말이 다이나마이트에요, 다이나마이트는 뭡니까 파괴하고 새로운 건설하는 거에요. 사회는 지금도 창조적 파괴를 부르짖고 있어요.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기존 것이 파괴 되어지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된다는데, 교회는 여전히 바벨탑 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보고 어떻게 저 목사는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저 목사님같이 목회해서 교회가 되겠나?
저 장로님같이 자녀 키워 가지고 애 제대고 만들어 내겠나? 이런 호기심을 못 주고 있는 거에요. 왜 못삽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드리는 것이 믿음인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내 가치의 고집을 세우는 것이 그래서 하나님 이대로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불신앙의 악마의 속삭임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유도 없고 평화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성령이 여러분들 속에 임하여서 그 하나님 한번 붙들어 보세요.
6. 하나님의 프리즘[prism]으로 자식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 놓으면 죽는 줄 알았는데 인생 지나 놓고 보니까 그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이 있어야. 그리스도적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 드려서 남들이 가는 길의 반대 좁고 협착한 길을 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
자식이 걱정이 되거든 그 자식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면서 하나님의 프리즘[prism]으로 그 자식의 인생을 바라보라고요, 여러분들의 앞날이 걱정이 되거든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치 체계 속에서 그걸 보지 말고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신 그 믿음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라고요. 죽음의 순간에도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엄청난 능력이 우리 속에 생겨나는 겁니다. 교회가 이 힘을 예배 때마다 받아야 되는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자본주의의 바벨탑의 한 모퉁이에 벽돌의 역할을 할 때, 하나님 여기 좀 더 높은 곳에 해 달라고 우리가 얼마나 허무한 것 부르짖고 있습니까?
수요일 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지마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 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길을 가다가 뒤에 호랑이가 쫓아오니까 걸음아 날 살리라 하고 도망가다가 낭떠러지에 툭 떨어졌다 말입니다, 떨어지다가 나무 뿌리를 탁 잡은 거에요,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지요, 그 나무 뿌리를 잡고 무슨 기도 드리겠어요, 하나님 제발 나를 좀 이 사지에서 끌어올려 주시고 구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고함을 치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네가 잡고 있는 줄을 놓아라, 그러니 이 나그네가 하나님 앞에 이줄 놓으면 죽습니다, 천길 만길 저 길에서 내가 떨어져 죽는 것 원치 않는 사랑의 하나님 제발 하늘에서 줄을 좀 내려 주어서 나를 끌어올려 주세요.
하니까 하나님이 그 줄만 놓으면 살아 줄 놔, 그것 말고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나를 좀 구해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제시하는 방법이 그 줄 놔, 밤새 이 씨름하다가 날이 휘영청 밝아 와서 내려다 보니까 발 바로 밑이 땅이더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우리 인생이잖아요.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것 놓으면 죽는 줄 알았는데 인생 지나 놓고 보니까 그게 별 것 아니었잖아요. 한치 앞을 못 보는 인생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든 생애를 살아갑니까? 교회 와서도 그 줄을 더 튼튼히 잡으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할 것이라고 이런 이야기 듣고 싶지요?
오늘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인생보다는 좀 더 낳은 세상을 물려주려고 하는 부모들이라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그리스도적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 드려서 남들이 다 걸어가는 그 길의 반대로 걸어가는 좁고 협착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예배 때마다 가져야 되지 않겠어요? 한번 여러분들의 살아온 삶을 한번 돌아보세요, 그 어리석은 나그네와 같이 이줄 놓으면 죽는 줄 알았기 때문에 밤 새도록 고통 속에 몸부림 치다가 우리가 마지막 인생을 벗어 버리는 죽음의 그 순간에 세상 뻔히 보니까 내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이렇게 안 살았을 건데, 이 인생 살지 않도록 우리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그 창조의 하나님과 모든 인생의 문제는 성령으로 영원한 가족의 공동체임을 아는 거잖아요.
오늘의 청년의 실업이 무엇으로 해결 되겠습니까? 법인세를 깎아 주어서 기업이 더 잘 되도록 하는 인간의 방법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 기업가가, 지금 대학을 졸업해서 100군데 이력서를 쓰고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어서 어깨 축 처져 가지고 골방에 눈물짓는 그 놈이 내 손자라고 생각을 할 때, 내일을 위해서 저금 해 놓는 게 아니라 투자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우리는 너무나 이론으로만 생각하는 거에요. 오늘도 이 예배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 믿음 가지고 승리하는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야 어쩌면 저 사람은 나하고 좀 다른 삶을 살아가는데 저래 살아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평가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어져서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땅에서도 맛보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자기가 수고한 것 누리고 자기가 얻은 것을 함께 나누며 다시 살아도 이렇게 살 수 없는 행복한 생애를 살다가 주님 부르시는 날 그날 빈손 들고 주님 앞에 가도록 몸 버려 세우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신 교회를 세우는데 이 예물이 아름답게 사용 되어지고, 교회는 제국주의들과 같이 교인들의 피와 땀으로 눈에 보이는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이 되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 생명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이 세상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그 틀이 만들어 낸 가치 체계를 가지고 고집 부리지 않고, 하나님이 제시한 십자가의 구원의 방법의 굴복하는 믿음을 이 예물의 응답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악인이나 선인이나 골고루 비를 주시고, 어미는 젖 먹는 아이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주신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친히 보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축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 위로 교통 충만하심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보고 어찌 저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평가를 듣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