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주적은 누구인가가? 요 3:22-26절 (주일 예배 설교문)
담임목사 김종웅
우리 교회의 주적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3장 22-36절
2016년 4월 17일 주일 낮 예배
No. 259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교회를 떠나는 자와 찾아오는 자의 문제점 /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가? 놔 두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 이것이 기준이 되야 된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날마다 성화 되어져 가야 된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이 삶의 영원한 소망과 희망이 되는 신앙 생활이 되야 된다.
제가 한번씩 이런 말 듣습니다. 목사님 왜 목사님은 우리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을 잘 붙잡지 않습니까? 항의 반 진담 반 이런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도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다니다가 교회를 떠나면은 여러분들이 슬퍼하는 것은 그저 슬픔 이지만은요 목사에게는 자기 살점이 떨어지는 거와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그래요. 왜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부인되고 부정된다는 느낌이 인간적으로 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느낌은 들지 않잖아요. 그런데 왜 안 잡는가? 자존심 때문인가? 아니에요 정말 붙잡는 것이 그분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가? 그냥 놔두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 이것이 기준이 되야 되요.
우리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 이게 기준이 아니고요, 그러지 아니하니까 교인들이 성화가 일어나지 안 해요.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들은 날마다 성화 되어져 가야 되거든요. 예전에는 교회를 이래 옮길 때에는 반듯이 담임목사의 이명서를 가져와야 됩니다. 그 이명서는 그분이 거기에서 어떤 신앙 생활을 했고, 또 만약에 벌을 받았으면 어떤 벌을 받았고, 이런 것이 다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이사 외에는 장로교도요 교회를 못 옮겼어요, 내가 이명서를 가지지 아니하고, 교회에 가면은 그 교회는 이 사람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구나 해서 안 받아 주었어요. 그래서 좀 기분이 나쁘고 안 좋더라도 다니는 교회에서 믿음으로 이겨 나가야 되었다고요.
1. 자본주의 실용주의적 사관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많은 교인들을 많이 모으면 그래서 교회가 큰일을 하면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기 때문에 교인들의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도 세례를 주셨다. 세례요한은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고, 그가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자다.
또 당회에서 어떤 시버를 주면은 해교회에서 그것을 시버를 취소하지 아니하면은 어떤 교회에서도 받아 주지를 안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자본주의 실용주의적 사관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많은 교인들을 그냥 많이 모으면은 그래서 교회가 큰일을 하면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기 때문에 교인들의 성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 저는 참 다른 교회에 이래 가는 분들은 제가 붙잡으면은 그러한 성화가 잘 안 일어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또 나에게는 참 아픔이지만은 그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이 아닌가? 정말 이런 생각 때문 입니다. 그가 우리 교회 안 다니고 예수를 안 믿는다면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설득해야 되겠지요.
또 우리 교회 다니다가 가서 보니까 사람은 과거는 아름답거든요, 그래서 우리 교회 다닐 때가 좋아서 좀 오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데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 것은 뭐 극복되더라도 더 아픈 것은 참 한국 교회에 이런 말이 많은 것 같아요. 목사님에게 마음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떠나면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 때문에 옮기지 못하고 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참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인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요, 오늘 본문은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의 음성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시오 그의 이름을 덧입어서 생명을 얻는 다하는 것을 죽 말씀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간 중간에 삽입구로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례요한의 이야기는 진짜로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에 대한 증인의 역할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목사는 예수님의 어떠한 증인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오늘 여러분 여기에 보면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설교나 이런 것들에 너무 여러분들이 신뢰하지 마세요, 저도 세례를 치면서 몇 개 읽어 보니까 예수님은 세례를 준 적이 없다 이런 글들이 참 많더라고요, 뭐 그것 그래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오늘 3장에 보면은 예수님도 세례를 주었어요.
또 세례요한도 세례를 주었어요, 예수님의 세례와 세례요한의 세례가 다르다 하는 것은 제가 나중에 여러분들에게 한번 설교할 기회가 있을 때 드리겠지마는 그렇게 될 때에 세례요한의 제자 한 사람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승 되는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세례요한에게 줄 서서 정말 뭐 사람들이 몰려와서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주기를 시작하자 모두들 그쪽으로 몰려갔어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러니까 한 사람과 지금 변론이 벌어진 거에요. 그 변론이 벌어진 것을 어역 하자면은 예수님의 세례가 더 능력이 있고 났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났다, 세례요한의 제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겠지요.
둘이 싸우다가 세례요한의 제자가 세례요한에게 와서 지금 그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생님이 강 저편에서 증언하시든 그이에게 그이가 세례를 주는데, 모두다 그리로 갑니다. 이러니까 세례요한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은 지금 오늘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무슨 말 하는 거냐?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고, 나는 그가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역할을 받은 자다, 너희들도 나의 제자가 되고 나를 따르려면은 나를 증거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말하든 그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야 돼, 뭔 소리하고 있어. 여러분들에게 말하면은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목사님을 추종하고 목사님을 따르는 이럴 때에 왜 나를 따르냐? 예수님보고 교회 다녀, 우리 교회보고 교회 다니지 말고.
2. 예수님이 신부 된 그리스도 인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는데 나는 그 신랑의 옆에서 신랑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거듭 난자고, 바른 증인의 자세이다. 예수님 때문에 충만해 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참 이런 것들이 여러분 앞에서 이끌어 가는 자에게는 참 쉽지 않는 일입니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고 나도 좋고 예수님도 좋고, 이게 사람들의 마음이지요. 세례요한은 그러지 안 했다고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은 없어요. 언제나 재물과 하나님 중에 선택하라, 성경은 선택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 그가 하는 이야기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 참 기쁘지요, 그 신랑이 기뻐하는 음성을 들으면서 신랑의 친구된 나도 기뻐하는 것인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선지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런 것이야.
사람들이 나를 추종하고 나를 따르는 것 때문이 아니고, 사람들이 진짜 신랑 된 예수님을 따르고, 그 예수님이 신부 된 그리스도 인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는데 나는 그 신랑의 옆에서 신랑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고, 이런 기쁨으로 나에게 충만 한 거야. 여러분 이것이 거듭 난자고, 바른 증인의 자세에요. 우리 교회의 교인들이 교회에 많이 몰려오는 사람들 이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거듭나게 되면은요 우리 교회가 아니라, 정말 이 사람이 믿음 안에 바로 서가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
우리 이런 것들이 좀 없잖아요 지금, 그저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나에게 반대를 하면은 나쁜x 그러다 보니까 목사님이 메시아가 되고, 교회 안에 있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 말입니다. 유명한 선언합니다 세례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여러분 그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님은 더욱 더 위대 해져야 되고, 나는 더욱 더 작아 지고 없어져야 돼. 여러분들에게 제가 목회를 10년하고 20년 해 나갈수록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나는 점점 없어지고, 예수만이 뚜렷하게 새겨 지는 그 목회가 그게 쉬운 거냐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여러분들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충실하게 되어지고, 그런데 나는 점점 그분에게 없어져 가는 것.
지난 주 여러분들에게 설교 드린 대로 죽음과 그 이후가 지배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면은 그 기쁨 모르는 거에요. 우리 그것 잃어버린 거에요.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모든 사람이 그에게로 몰려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거다. 우리 교회 텅텅 비더라도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충만해 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거다 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온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이지만은 나는 땅에 속한 자로서 땅에 일만 말한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이니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지금 자기를 따르는 제자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3. 동백에서 개척 이후의 여러 가지 과정들. 예배 때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은 거룩한 공회를 그냥 하면 안 된다. 홀리 카토릭 이라는 말인데 카토릭 이라는 말은 모든 교회는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 예수님의 교회라는 말이다. 이것이 세상에 어떤 모임하고도 다른 교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나는 예수님 때문에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인가? 나는 교회가 좋아서 신앙 생활하는가? 나는 목사님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가? 나는 누구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가? 이제 바꾸셔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이 감당치 못할 능력을 가지게 되는 거에요. 오늘도 여러분 이 설교를 하면서 참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요, 저도 뭐 30년 가까이 목회를 했는데, 얼마나 많은 일들 경험 했겠어요. 서울 대학 교회에서 몇몇 분들 하고 동백에 와서 개척을 하는데, 참 그분은요 절대로 인간적인 면에이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나를 떠나면 안 되는 한 분이 있었어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에요, 정말 너무 아프더라고, 그분이 간 교회가 서울에 저는 대학 교회에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봤어요. 가는 것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왜 그러느냐?
대학 교회를 가라 했는데 한 3천명 모이는 큰 교회로 갔습니다. 그럴 때 내가 사업에 도움이 되어서 가는 것인데 축하해야지, 그런데 그 3천명 모이는 교회에 목사님은 제가 너무나 잘 아는 목사님이에요, 또 자주 만납니다 또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 줄 알아요. 그런데 그 다니다가 한번은 한 2년 있다가 우리 교회에 저 자리에 앉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었구나, 참 너무나 반가웠어요, 그래 인사 왔는데 그 다음주에 안 나오더라고요 제가 전화를 안 했거든요, 왜냐하면은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알거든요, 그 교회에는 사모님이 모든 목회를 다 합니다. 교역자 실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장악해요.
그리고 그 인근에 한국에 제일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도 한 3천명 모이는 교회가 되니까 얼마나 용쓰고 했겠어요, 그 사모님은 교인 하나가 다니다가 안 나오면은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사모님이 금식 기도 들어간다고, 사모님이 금식 기도 들어가면은 우리 교회를 떠난 사람은 반듯이 저주를 받는다, 여러분 많습니다 그런 교회가, 한국 교회 곳곳에 그런 전설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다니다가 그 다음주 안 나왔을 때 내가 들은 이야기가 이런 겁니다, 그 사모님이 금식 기도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 집사님을 더 이상 붙잡는 것은 그 집사님을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그기에는 더 우리 교회보다는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가지 우리가 좀 생각하셔야 되요. 만약에 여러분 이 교회 다니다가 저 교회 다니면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은 둘 중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겁니다. 아니면은 이 교회가 믿는 예수님과 저 교회가 믿는 예수님이 다른 예수님이든지, 우리가 예배 때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은 거룩한 공회를 그냥 하면 안 됩니다. 홀리 카토릭이라는 말인데 카토릭 이라는 말은 모든 교회는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 예수님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어떤 모임하고도 다른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믿는 예수님과 인근에 있는 교회가 믿는 예수님은 같은 예수님입니다. 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4. 이사야 57장에 보면은 의인은 화액전에 취하여 간다, 그런데 그는 평안에 들어갔느니라, 하나님께서 젊은 사람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데려 가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정말 의인으로서 세상에 놔두면은 상처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가 여기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지 몰라도 저는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사람입니다. 왜 영원한 주인 예수님만이 주인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에는 우리 교회에서 참 중보 기도의 빚이 많은 분이 나갔습니다, 그분은 굉장히 병약한 분입니다, 저도 그분이 우리 교회의 초창기에 오신 분 몇 명 되지 않을 때 이기 때문에 기도를 참 많이 했어요. 그때는 교인 몇 명 되지도 안하고, 아프니까 기도 하려면 뭐 몇 명 안되잖아요 그런데 나갔습니다. 몇 년 있다가 우리 교회 집사님을 통해서 목사님과 식사하고 싶다는 전갈이 와서 몇몇 집사님과 같이 식사를 했어요, 참 제가 또 그런 유머가 있잖아요, 분위기 있고 재미있게 끌어 갔어요, 제가 끝끝내 우리 교회 오라 소리 안 했습니다.
왜 제가 우리 교회 오라 마라 할 권리는 저에게 없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 교회 오는데 제 허락 맡아서 와서는 안 되는 교회잖아요, 또 한편에는 그분이 그곳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어떤 설교에서 목사님에게 마음의 상처 준 것 있으면 풀어라 그러지 않으면은 벌받는다는 설교를 듣고 용기 내어서 저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든 거에요. 그래서 정말 그 분이 왔을 때에 나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좋은 절호의 기회들이 많이 있는 것이지만은 전부 배제하고 놔두었습니다. 여러분 왜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어야지 목사를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에 다녀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연속 강해에 맥이 같은데, 오늘도 우리 참석하신 것 같은데 우리 서지원 집사님이 여러분 참 저는 수요일 날 우리 교인들이 그렇게 많이 와서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어요. 그 새벽에 일찍 5시 발인 예배니까 최소 한도로 3시반 4시에 일어나서 가득 찬 모습을 보면서 야 참 고맙다, 내가 헛되게 목회 안 했구나 이런 생각했는데 그 집사님이 여러분 소영이 자영이 제가 보니까 마흔 다섯에 딸 놓고 한참 있다가 놓은 아들이 준모입니다, B형 독감인데 신근염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에요 기가 막힐 일이지요. 그 소식을 듣자 내가 무슨 말씀을 전해야 될까?
제가 어떤 장례의 예배에 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설교를 똑 같이 한 것이 이번에 한번입니다. 수요일 날 그 소식을 듣고 주일날 저녁에 중보 기도할 때에 교인들이 그런 이야기한 겁니다. 그 아픔을 동정해 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집사님 손잡고 울어 주는 것은 집사님을 위해서 울기보다는 나는 의로운 선행이야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마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연민입니다. 우리 그러지 말자고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고 새로운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말씀인데 집사님 귀에는 지금 아무것도 안 들릴거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를 그 슬픔의 자리에서 일으키는 능력의 말씀이다, 말씀이 들려 지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런 설교 평소에 들어 놓으세요, 이사야 57장에 보면은 의인은 화액전에 취하여 간다, 그런데 그는 평안에 들어갔느니라, 왜 이런 말씀을 이사야 가 하는가 하면은요 사람들은 야 저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께서 데려가 젊은 나이에? 저 사람은 참 괜찮은데 하나님 복 받아야 되는데 왜 사업이 부도나? 이런 말이 비일비재 하다고요,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젊은 사람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데려 가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정말 의인으로서 세상에 놔두면은 상처받기 때문이에요. 평안으로 간다. 제가 이 말씀 전했거든요. 여러분 지난 주일도 제가 설교를 할 때에 그랬잖아요. 인생이라는 것은 출생이 삶을 지배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어느 집에서 태어나느냐가 내 일생을 좌우하는 나라는 굉장히 나쁜 나라입니다.
5. 자녀가 먼저간 가정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그 가정이 어느 누구도 경험해서는 안 되는 그 슬픔과 아픔의 사건이 그 가정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힘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삶을 지배해야 되요. 오늘 죽는다면은 여러분들이 하는 염려 하겠어요? 오늘 죽는데 내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든 것이 귀하냐 말입니다. 오늘 죽는데 오늘 지구가 멸망 당하는데 재벌들이 사내 보유금 쌓아 놓겠습니까? 아니에요. 오늘 지구가 무너지는데 서울대학이 중요하겠어요?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입니다. 여러분 제가 계속해서 설교 그래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목사님들은 그런 자리에 가서도 천국 가고 좋은데 갔는데 울기는 왜 울어 혼내는 사람도 있는데요, 그 사람은 육은 가지고 있지 않는 목사인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자녀가 전액 장학금을 받아서 하버드에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자녀를 보내는데 인천공항에서 눈물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눈물 납니다. 잠깐의 헤어짐이,
그런데 그 자녀를 보내 놓고 난 뒤에 집에 와서 몸져누워 있으면은 그것 이상한 거에요 그 설교한 겁니다. 내 아들이 하버드에 가서 유명한 국제 변호사가 되고 이런 사람이 되어져서 훌륭한 모습으로 나타날 터인데 나도 내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자고 제대로 사는 삶을 사는 거지요. 눈물은 인천공항에서만 필요한 겁니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집사님에게 그런 말 드린 겁니다. 장례식에는 인천공항과같이 울어야 됩니다. 예배에도 일어나지 못할 슬픔과 좌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가 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그 가정이 어느 누구도 경험해서는 안 되는 그 슬픔과 아픔의 사건이 그 가정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지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몇 차례의 장례의 이런 사건들을 목격하신 분들이 있을 거에요. 준모는 천국에 가서 하나님 품에 안겨 있는 겁니다. 다시 만날 때에 이제는 준모에게 부끄럽지 않는 엄마 아빠 준모에게 부끄럽지 않는 자영이 소영이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거에요. 그럼 하나님의 말씀만이 힘을 일으킬 수 있는 거지요. 그 사건 때문에 엄마가 몸져누워서 그 가정이 일년 365 일 동안 슬픔으로 있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더 보다 나은 축복된 삶,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자영이나 소영이가 늦게 낳은 아들에게 엄마 아버지가 마음이 갈 때 마음이 불편하고 질투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든 아이들이 이제는 준모의 몫까지 엄마 아빠에게 더 잘 해야 되겠어, 내가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어, 이게 필요한 거에요. 그래서 다윗의 이야기를 한 겁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병들어 있을 때 다윗은요 엎드려서 꼼짝 안 했어요, 모든 신하들이 감히 왕에게 한마디를 고하지 못했을 때 이래 만에 그 아이가 죽자 수건 거리기만 했어요. 다윗이 물었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고, 예 죽었습니다 신하들은요 완전히 난리 날 줄 알았습니다. 툴툴 털고 일어나서 옷을 바르게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상을 차려라 밥 먹는 거에요. 하도 이상해서 신하들이 왕이여 애가 아플 때 그렇게 슬퍼하고 울더니만 죽고 난 뒤에 왜 이러십니까 이런다고, 주변에서 볼 때 약간 정신이 간 사람같이 보이겠지요.
뭐라 그래요? 내 아들은 더 좋은 곳에 갔다고, 그가 아플 때에 내가 이렇게 슬퍼하면 하나님이 좀 살려 줄까 봐 했는데 이제 더 좋은 곳에 갔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 갈일 만 있지, 그가 내한테 올 일은 없다, 왜 이런 말 속지 마세요, 저승이 암만 좋다 해도 이승만 하랴,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이승이 암만 좋다 해도 저승만 못한 것이 이승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천국을 맛보는 것이지, 그 맛본 천국이 너무나 좋아서 그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입니다. 그 다음에 들리는 소식이 참 저를 슬프게 했어요, 한국의 좀 대형 교회들이 저도 이제 큰 교회 목사님들하고 이제 좀 교제를 하면은요 아 승부욕이 너무나 강해요, 그만하면 되었다는 것이 없더라고요,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는 것이 보통 있는 분들이라고요. 저는 뭐 적당하게 되면 자족하거든요.
6. 예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이 우리의 삶의 영원한 소망과 희망이 되는 신앙 생활이 되야 된다. 敵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사탄이다. 우리의 적은 불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려는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적이어야 된다.
우리 교회 인근에 큰 교회 다니다가 집사님이 오셨지요, 그 교회에서 우리 교회에 교패 달린 사람들마다 찾아 다니면서 심방하는 것 알아요 교인들이 보고를 하니까, 집사님의 소식을 듣고 그 교회에서 심방을 왔다는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우리 교회 다니면은 아이들이 아프면은 제일 먼저 우리 교회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상담을 받을 그런 교회인데 내가 그걸 보고를 받는 순간 그게 사람이 할말입니까? 정말 집사님이 안타까워서 했겠어요? 그 어렵고 힘든 순간 우리 교회 오라는 이야기지요. 여러분 정말 우리 한국 교회 변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변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속에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 다니면서 신앙 생활의 기쁨이 아니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 때문에 즐거워하는 신앙 되야 됩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의로운 일 선교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이 우리의 삶의 영원한 소망과 희망이 되는 신앙 생활이 되야 됩니다. 이번에 새누리가 참패를 당했는데 왜 참패 당했습니까? 적이 누구인지 몰란 거에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이 적은 이웃 교회가 아니에요. 우리 믿는 사람의 적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사탄입니다. 제가 이야기했든 그 어떤 교회도 우리의 적이 될 수 없어요. 우리의 적은 불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적이어야 됩니다. 불신도 아니에요. 싸움의 향방이 발라야 됩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성숙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죽보다는 밥도 제가 먹입니다, 보리밥도 먹이고요. 우리가 지난 달에 교구 모임을 가졌어요, 참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몇몇 분이 저에게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왜 교구장들이 우리 교구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여러분 우리 교회 교구가 참 귀중하지만은 우리 교회 이 힘이 다른 교구가 더 좋은 자리에 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교구장과 교구 원들이 되야 되요. 그래야 다른 모임하고 다르지요, 영적인 성숙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판단 하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수용합니다.
여러분 그 판단조차도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말 잘 안 해요. 이 판단조차도 하나님이 하시는 거지만 여러분의 성숙을 위해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요 저는 우리 교회가 언제 성숙된 교회냐 하면은요 모든 교인들이 어떤 상황에도 주일 출석하고 십일조 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주일날 점심을 먹을 때에도 줄 쭉 서서 먹는 교회가 아니고, 앉아서 담소하다가 적당히 비게 되면은 한 네 다섯 사람 있을 때 가서 차례 차례 먹는 이런 교회 이게 성숙이지요. 저는 우리 교회에 여러분들이 월삭 때 뭐 맛있는 것, 우리 교회에 뭐 할 때에 한번도 모이는 사람의 숫자의 모자랄만큼 준비한 적 없습니다.
세상 말로 가끔 이금희 권사님이 꼬불쳐 놔서 나중에 교역자들 밥해 주려고 남겨 놨는데 그것까지도 다 가져와서 하다 보면은 언제나 남아요, 여러분들이 음식 뭐 부산어묵이나 뭐 할 때에 삼겹살 하고 이럴 때에도요 내가 먹을 만큼 다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적당하게 담고 다른 사람 혹시 모자랄까 봐 절대로 모자라지 않게 준비합니다. 이런 배려가 성숙된 교회가 아니겠어요. 우리가 뭐 어떤 교회 이런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보자는 거에요, 증인이라는 것이, 저는 언제나 제일 나중에 내가 구어 주고 제일 나중에 먹는데 제일 많이 먹어요, ㅎ ㅎ ㅎ 언제나 남아요. 물론 가져가는 분이 다른 분들 챙겨 주려고 가져가는 것 알아요.
7. 서로의 섬김이 있는 상대방의 행복이 내 행복으로 느껴 지는 삶,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그 즐거움의 음성을 들으면서 기뻐하였든 세례요한의 영성, 그분은 더욱 더 위대 해져야 되고, 나는 더욱 더 작아져야 되는 것은 내 안에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되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참 이런 서로의 섬김이 있는 상대방의 행복이 내 행복으로 느껴 지는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그 즐거움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기뻐하였든 세례요한의 영성, 그분은 더욱 더 위대 해져야 되고, 나는 더욱 더 작아져야 되는 것. 하나님을 만난 자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천국을 보지 아니한 자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육신의 부모도요 아무리 형제가 잘 되는 것 보다는 아들이 잘 되는 것 보다 화목 하는 게 좋아요. 저는 여러분들이 서로 경쟁하고 이러는 것들은 신앙이 어려서라고 기도해요. 성숙되면은 타인이 더 잘 되는, 성가대도 마찬가지에요, 3부 성가대는 2부 성가대가 더 잘 되기를 바라고 배려하는 마음, 2부 성가대는 3부 성가대가 더 잘되고 잘하기를 바라는 배려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잘하는 성가를 하는 것 받는 게 아니에요.
교구나 모든 면에서 그러려면은요 내 안에 십자가가 있어야 되요. 내 안에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되는 그 하나님을 알 때 그분은 흥해 지고 그분은 더욱 위대 해지고, 나는 더욱 작아 지고, 30년 40년 눈물로 목회했든 그 목양지에 목사님의 모습이 하나 하나 지워져 가는 목회야말로 주님 앞에 갔을 때 옳다 인정받는 거지요. 내 대에 이런 일 했노라 내 대에 몇 명 모았노라, 훅 부는 우리 코에 호흡이 훅 날아가는 순간 먼지로 사라지는 그래서 우리가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길 걸어가는 것이 녹녹치 않아요. 저는 이번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이 교구장 하기가 참 녹녹치 않는 교회이구나, 좋은 교회에요 그게.
여러분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다 자기가 영웅 되려고 하니까 분쟁이 있는 거에요. 제가 그러지요 잘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만 잘하면 되요. 인간이 잘 하려 하면은요 충돌이 일어나요 그러면 공멸이에요. 목회 저는 할 때 실수 투성이고 잘 못한 건데 오늘 왔더라고 그분만 잘 했기 때문에 내가 잘 하려 했다면 우리 교회 먼지로 날아 갔다고 저는 봅니다. 여러분들이 그 역사를 몰라서 그렇지, 오늘도 여러분 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우리 부둥켜 안으면서 내 네 마음 알지, 네가 육을 이기고 영을 좇아온 삶을 알지 이 환영을 바라보면서 세상과는 좀 다른 교회가 되고, 내가 성령 받기 전에 사람의 삶과 성령을 받은 이후에 나의 삶의 그 길이 좀 다르고 신앙의 연조가 더해 갈수록 내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내 안에 예수가 더 위대해저 가는 그런 복된 생애를 살다가 나중에 우리 다 천국 문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만났을 때 아이구 오셨네요, 내 주를 가까이. 아멘
◈봉헌 기도◈
힘이 없어서 드리지 못한 자도 부끄럽지 않고, 좀 여유가 있어서 더 많이 드린다고 해도 자만할 것 없는 교회 삼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돈이 아니오 하나님이 기뻐하신 대로 사용한 것 만이 내 물질임을 압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사용 되어져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노릇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가 되어져서 땅에서도 교회 때문에 천국을 맛보는 주님이 살 찢으시고 피 흘려 세운 그 주님의 교회에 본래의 모습이 하나 하나 세워져 가서 세상사는 사람들 자기 잘난 맛에 자기를 홍보하며 나가는 그 세상 속에 날마다 주님은 위대 해지고 나는 없어져 가는 그 십자가의 그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주님 그 은혜의 얼굴을 이곳을 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하나님 참 우리 많이 울었습니다, 어떤 인생은 짧은 인생이고 어떤 인생은 긴 인생인데 우리가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우리 이 인생만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니까 짧고 긴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90세의 인생 70세의 인생도 밤의 한 경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미국 유학 가는 아들과 인천 공항에서 눈물로서 전송하지만 다시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거와 같은 그 믿음을 가지고 예전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는 거와 같이 우리 집사님의 가정에 더 이상 이제는 슬픔이 드리우지 아니하고 정말 아버지 하나님 주님 품에서 엄마 아빠 누나들 나는 정말 좋은 곳에 와 있어, 그 세상에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에 행복하게 살다가 우리 다시 만나, 이 음성이 늘 마음속에 쟁쟁 그려서 남들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하지만 예수의 품에 묻어 주는 예배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이 슬픔을 함께했든 우리 모든 교인들과 같은 이런 아름다운 교제의 영을 주님께서 주시려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친히 지신 것을 믿습니다. 혈연과 연고를 넘어서서 영원한 가족의 공동체가 되어져서 남이 나보다 더 나은 것 내가 줌으로 말미암아 받는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더 행복한 모습을 갖는 이런 영적인 성숙이 점점 말씀 안에서 자라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교회가 되게 하시고, 이 믿음이 우리 서집사님의 가정위에 새로운 생명이 되고 이 말씀에 싹이 나타나서 이제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화관이 가득 찬 가정으로 삼아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서 출생이 삶을 좌우함으로 분노와 슬픔과 고통이 많은 세상 속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지배함으로 어떤 사람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천국을 만들어 가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세례요한의 영성과 같이 주님은 더욱더 위대해져 가고 나는 더욱 더 작아져야 하는 것을 알아 주님 만나는 그날 내가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아니하고, 주님 때문에 그길 걸어갔노라 양손 벌려 만날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권속들과 이들에게 하나님 노릇 해 주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실족해 하지 않는 거룩한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