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자료

[사해사본과그리스도교의기원展]사해사본 발견 이야기

차주희 2013. 3. 28. 22:51

 

[사해사본과그리스도교의기원展]사해사본 발견 이야기 '사해사본'해부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고의 유물, 최고의 발견,최고의 가치

신비스러운 유물... 사.해.사.본

 

12월 5일,  그 사해사본 진본이 국내에 첫 공개된다고 한다!!!!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展>을 통해 사해사본을 제대로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전시회를 보러가기 앞서, 사해사본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해사본 발견이야기.....

 

사해사본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베두인 목동들은 잃어버린 염소를

찾기위해 사해의 북서쪽 해안 주변의 절벽을 헤매고 있었따. 절벽 입구에 나 있는 구멍으로 돌을 던져

염소의 울음소리를 확인하려는 그 때!

그들은 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릇이 깨진 소리는 항아리가 깨진 소리였고, 항아리 속에는

                                                            바로, 사.해.사.본이 들어있었다.

 

 

이 발견을 도화선으로 사해사막 주변에서 새로운 보물을 찾으려는 노력이 유행처럼 번졌고

베두인, 골동품 상인들, 고고학자들, 심지어는 평범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수색에 참가하였다.

대체적으로 누구보다도 베두인목동들이 가장 많은 수확을 거뒀는데 오늘날까지 발견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그들 손을 거친 것이다.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발견된 처음 3개의 두루마리 문서는 칸도(Kando,Khalil Iskamder Shahin)

라는 베들레헴 상인의 손에 들어갔다. 만일 칸도씨가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사람이였다면

아마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고 웃으면서 낡은 가죽더미를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칸도씨는 내용을 확인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눈치채고 사해 주변에서 문서추가 발견을 위한 수색에 들어선다.

 

 

당시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중이어서 철수중인 영국군과 요르단 군부대, 이스라엘 군대,

팔레스타인 군대등이 혼란스럽게 섞여있었고 단지 유대사막을 삶의 보금자리로 하는

베두인들만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칸도씨는 자기 친구와 베두인들을

처음 두루마리 성경이 발견된 동굴로 보냈고 이후 동굴속의 보물을 고스란히 손에 넣게 되었으며

세상에서 성공한 골동품 상인이 되었다. 

그 동굴에서 발견되 7개의 완전한 두루마리 성경은 오늘날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

성서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다.

 

처음 3개는 1947년 히브리어 대학교에 엘리에저 수케니 교수에 의해 구입되었고

추가로 발견된 4개는 교수의 아들인 이갈 야딘 교수에 의해 몇 년후 구입되었다. 야딘교수는 시리아 정교 주교로부터 미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끝나면서 동굴지역은 요르단왕국의 통치아래 놓여졌으며 요르단 당국은 두루마리 사본을 아주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이는 사해사본 연구에 있어서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해문서 연구에 쌍벽을 이루던 학자들은 당시 요르단 정부 박물관 관장이었던 영국군 장교 출신 하딩씨와 불란서 도미니꼬 수도회 신부, 예루살렘 성경연구소 에꼴 비블리끄원장이었던 드보신부였다.

주변의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요르단 군은 처음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 주위로 탐사대를 파견하였다.

이때 72개의 두루마리 사본의 파편들을 발견하였는데 아주 중요한 것들이다.

하딩씨와 드보신부는 동굴에서 1km 떨어진 곳에 페허를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그 장소는 키르벳 쿰란으로 불리우며 아랍어로 돌무더기 폐허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딩씨와 드보신부는 그 동굴과 관련된 유일한 고고학 장소로 이 곳을 지목했으며 사해 문서와 이 장소가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쿰란 발굴로 한창 바쁜 와중에 그들은 이 곳이 수도원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두루마리 사본을 만들던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고 흥분하게 되었다.

 

같은 시간에 베드윈들은 몹시 바쁘게 움직였다. 쿰란 남쪽으로 몇 km떨어진 므라밧 와디 계곡에서 가파른 절벽위 몇 개 동굴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2세기경 활동했던 바르코크바 시대의 파피루소 서한들을 발견하였다. 새로운 문서들이 발견되자 이들은 곧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하딩씨와 드보신부는 새로운 문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쿰란 발굴을 즉시 중지하고 새로운 동굴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지치지 않는 베두인들은 쿰란 주위에서 제2동굴을 찾아냈고 이 소식을 들은 유럽 고고학자들은 다시 쿰란으로 돌아와 주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사해문서를 담고 있는 동굴 3번을 찾아냈다.  이 동굴에서는 구리 두루마리 성경의 일부로 밝혀진 두 개의 금속조각을 발견했다. 구리 두루마리 성경이 공개되자 목록이 나타났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금은 보화와 제사에 쓰이던 그릇들과 기구들이 감추어진 72개 장소의 목록인 것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본을 해독하고 보물을 찾으려는 노력은 종교인들과 고고학자들간의 새로운 유행병을 불러일으켰으나 현재까지 단 하난도 발견된 것은 없다.

 

고고학자들이 쿰란을 떠나자 베두인들은 다시 쿰란으로 돌아와 쿰란 주위의 절벽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쿰란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곳에서 무너진 동굴의 흔적을 발견하고 베두인3명이 그 장소를 파고 들어갔다. 동굴 4호로 알려진 이 고은 바로 쿰란의 도서관이었다.  동굴 4번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하였는데 지금은 이 곳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록펠러 박물관이다. 이때부터 약 4년 동안 베두인들은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나들며 유대사막과 나할헤버계곡에서 추가로 서간문들과 두루마리 사본을 발견하였다.

 

 

1956년 마지막 동굴 11번이 베두인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이 동굴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완벽한 두루마리 사본이다.  역사상 발견된 가장 아름다운 유적으로 7m 길이의 사해사본이 두루마리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사본은 메시아가 오기 전 어떻게 성전이 세워져야 하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성전사본이라 불리운다.

 

이렇게 사해사본은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에 걸쳐 발견된 최고의 유물이다.

 

2000년 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사.해.사.본

 

앞으로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렇게 발견된 사해사본이 이젠,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12월 5일 개최되는 <사해사본과그리스도교의기원展> 이 매우 기대가 된다.... ^^

 

출처:  <사해사본과그리스도교의기원 展 >공식 홈페이지 http://www.scrolls.co.kr

                                                         싸이월드클럽 http://club.cyworld.com/scrol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