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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웅목사~아빠 아버지 하나님- 요 20:17 <I>

차주희 2013. 3. 26. 01:03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담임목사 김종웅

 

아빠 아버지 하나님 (1)

본문 : 요 - 20:17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아멘

 

1. 하나님의 존재성

이 세상에는 우리의 오감으로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감으로는 인지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세상에 신이라 칭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십니다.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바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이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유일한 신으로 고백합니다.

 

2. 아빠 아버지 - 전능자 - 창조주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할 때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한국어로는 4, 헬라어로는 3번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사람의 호칭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목사라는 호칭을 통하여 저를 아는 것이고, 내 아들은 내게 아버지라고 호칭함으로써 나와 자신과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호칭입니다. ‘전능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호칭이며, ‘창조주’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호칭입니다. 이런 호칭을 잘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되며,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3. 우리의 아빠 아버지, 성부 하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20:17a)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20:17b)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호칭하십니다. 즉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령님도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8:15)를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 6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있지요.

 

4. 아버지의 역사적 의미

아버지라는 호칭에 대하여 현대에 들어와 이의를 제기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페미니스트들이지요. 페미니스트들은 하나님을 어머니라 하면 안 되는지, 하나님을 왜 꼭 아버지라고만 해야 되는지, 남성 우월주의가 성경에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의 이의를 제기하며, 하나님의 호칭을 꼭 남성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라든지 ‘하나님 어버이’라는 식의 종합적인 호칭으로 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은 아버지에 대한 당시의 개념을 차용해서 하나님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시 사람들의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이해해야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을 남성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아버지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아버지의 사회적인 위치나 관계 등이 어떠했는지를 우리가 잘 알 때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프로이드가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때문에 신에 대해 많은 곡해를 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아버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성령님께서는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아빠라는 말은 엄마와 마찬가지로 세계 공통어입니다. 그래서 아빠는 헬라어로 번역을 하지 않고 ‘아바’라는 아람어를 그대로 쓴 것입니다. 아람어의 아바 아버지는 우리말의 아빠와 똑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아빠라는 호칭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거의 없지요. ‘아버지’ 하면 권위적인 이미지가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고 또 그런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받은 자녀들도 많지만, 아빠라는 호칭 속에는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없으며,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언제라도 따뜻하게 안아줄 것 같은 친근한 느낌만 있습니다.

 

5. 아빠 아버지의 신약적 의미

이렇듯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신 호칭을 성령님께서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함으로써 당시에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제거하신 것입니다.

또한 복음서를 보면 누가복음 6 36절에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마태복음 5 44절에는 ‘선하신 아버지,’ 마가복음 11 25절에는 ‘용서하시는 아버지,’ 마태복음 6 6절과 8절에는 ‘미리 아시고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도 이런 서술들을 통하여 아버지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빼버리신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러면 아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어떤 의미일까요?

 

6.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첫째 ‘우리를 낳아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아버지보다는 ‘나의 목자,’ ‘나의 방패,’ ‘구원의 산성’ 이렇게 서술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데 신약을 통틀어 그 호칭이 많게는 백 번 이상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멀리 천상에서 인간을 지켜보고 계시다가 잘못하면 벌을 내리시는 분이지요. 사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오해가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것이 ‘아빠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님이 창조주일 뿐 아니라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임을 알려 줍니다.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을 그와 동일한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벌을 주는 하나님이라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나는 너를 낳았다,’ ‘어미는 너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고 내 손바닥에 새겼다’(49:15-16)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함께하신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언제나 내 편을 들어 주는 분으로 오해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하나님은 내 편을 들어 주는 분이 아닙니다.

 

함께하신다는 것의 의미는 요한복음 17 21절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21)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내 편만 들어 주는 나만의 하나님, 혹은 우리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고, 그런 하나님을 통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지체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빠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호칭에는 우리의 중심을 잡아 주시는 아버지로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존재가 있기에 모든 믿는 이들은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셔서 보호하시는 분이지요.

 

7.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

아빠 아버지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빠라는 표현은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만이 부를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렇기에 그분의 상속자라는 의미이지요.

갈라디아서 4 6절에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연이어 7절에는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러면 상속자란 무엇이며 그 특성은 무엇인가요?

유대인들에게 상속자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자로 책봉이 되면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왕권을 갖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지요.

즉 천국의 상속자는 나중에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유업으로 받을 천국이 이미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실상이란 말은 비유하자면 ‘부동산 권리 증서’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것을 믿음으로 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천국이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믿는 자들의 것입니다. 또한 죽어서 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이 세상도 이미 우리의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 상속자라는 의미는 등기는 되어 있지만, 다시 말해 그들의 소유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것이고 우리가 그의 자녀라고 해서 남의 밭에 열린 소산을 우리 마음대로 취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예전에 있었던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예전 분들은 요즘 분들하고 비교해서 많이 순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 그대로를 믿었거든요.

새벽예배에서 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한 권사님이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남의 밭에 들어가 호박을 따려다가 이를 본 주인과 시비가 붙었다고 합니다. 주인이 왜 남의 밭에 들어와서 허락도 없이 호박을 따느냐고 호통을 치니, 그 권사님이 내 아버지 것을 자녀인 내가 가져가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는 거예요.

 

상속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에게 아들이 있다면 사장은 회사를 자기 아들에게 상속시키겠지요. 아들은 그 회사가 이미 자기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월급이나 승진 등을 신경쓰기보다는 말단이라도 일을 잘 배우려 할 겁니다. 앞으로 더 나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경영 일선에 머무는 동안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회사가 곧 자신의 것임을 압니다.

 

이런 예와 우리의 믿음을 동일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우리도 이러한 상속자와 같은 모습이지요. 우리가 천국의 소유자임을 아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천국에 대해서 아직은 주인 행세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온 우주만물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있는 우리는 아직 주인 행세를 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재림을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지요. 재림과 더불어 우리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아파트를 미리 사두고 입주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준공검사만 마치고 입주를 하면 비로소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지요.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다 지어졌는데 예수님의 재림은 준공검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래야 될까요? 우리는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온 세상에 대하여 권리 행사를 해버리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이지요. 가진 게 없어도 기죽지 않고, 가진 게 많아도 없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삶,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 상속자라는 신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탕자와 같이 사는 것이 문제이지요.

 

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나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는 해요. 우리 교회를 지을 당시에 건물이 다 지어졌는데도 준공검사가 나기 전에는 쓸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참을 수가 없어서 준공검사가 나기 전에 2층에 먼저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렇게 2층에서 몇 주 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몇 주 뒤에 준공검사가 난 후 본당으로 내려왔는데 그 기쁨 또한 대단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이에요. 예수님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고, 우리의 처소는 이미 다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늘에는 이미 여러분의 나라가 완성되어 있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으나 믿지 않으나 분명히 이루어진 사실이지요.

 

믿음과 사실은 다릅니다. 믿지 않는다고 사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믿지 않으면 사실을 누릴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만이 믿는 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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