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죽은 자가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고린도전서 15: 35-38절
2019년 4월 21일 주일 낮 예배
No. 415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아멘
○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소망이어야 된다. 우리의 몸은 장미 씨앗과 번데기 같은데, 부활은 장미꽃과 번데기라는 것. 씨앗이 머물러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망은 시공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에 참여하는 것이 소망이 되어야 된다.
우리 부활절에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겼네, 라고 찬양을 했는데 찬양을 드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은 그냥 찬송가를 부르는 종교인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부활에 대한 찬양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면은 부활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모르게 되면은 그냥 부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 됩니다. 이래 되면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볼 때에는 참 안타깝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에 교인들의 신앙의 삶이나 그 다음에 또 일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 참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안타까움이냐? 우리 아이가 어릴 때에 막내 대열이가 용돈을 줄 때 누군가가 지폐를 주면은요 울어요, 그것 안 한데, 동전 달래요, ㅎ ㅎ 그러면 옆에 있다가 큰 게 대열아 지폐 받아 그게 훨씬 더 좋아하면 자기는 그것 안 한데, 동전 한데, 가치를 모르는 거지요.
1.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소망이 되어져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가난과 병, 미움, 이런 것에서 자유 함을 얻지 못함은 믿음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장미 씨앗과 같은데, 부활은 장미 꽃이다 이 말이다. 번데기가 소망이 뭐냐 하면은 나비가 되는 것이 소망이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귀한 것을 알지 못하고, 별로 가치 없는 것 그것 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설교의 영원한 가치의 복음을 선포하면은 목사님 그것 말고, 그냥 부자 되고, 잘살고, 오래 사는 것 그것 주세요 이런다고요. 그러니까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 된다고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의 소원은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사는 게 아니에요, 자녀가 잘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부자 되는 것이 내 삶의 소망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나면은 그런 소망이 더 큰 소망이 하나 생겨야 되요. 그 더 큰 소망이 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려고 해요.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소망이 되면은요 가난한 것이나 병든 것이나 이런 것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안 해요.
그런 것에서 자유 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 목사님들은 장례식에 가서 유족들이 울면은 더 좋은 곳에 갔는데 왜 울어 하고 혼을 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천국 갔는데, 그것도 약간의 문제가 있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이 부활에 대한 소망이 뭐냐 이런 거에요, 여러분들의 자녀가 저 미국에 유학을 떠나요, 그러면 인천 공항에서 잠시 헤어지는 슬픔이 있잖아요, 안타까움이 있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울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옆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얘 떠나는데 뭐 울고 있어, 공부 잘해서 더 크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올 것인데, 라고 말을 하는 거에요.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그래야 된다고요.
우리가 죽음이 잠시 헤어지지만은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만날 것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 죽음에 슬픔을 이겨 나가는 것이 신앙 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믿음이 참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믿는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은 복 받고, 예수 믿으면 건강해 진다고 믿는 사람이 있어요, 사실이 아니지요. 믿음하고 사실은 달라요,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 때에 어떻게 하는가 하면은, 예수님의 부활, 그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것을 믿으며 사는 사람이 있어요. 왜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소망이 되어져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가난이라든지 병고라든지, 미움이라든지, 이런 것에서 자유 함을 얻지 못하는가,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에요.
설교를 잘못하기 때문이에요, 성경이 잘못된 게 아니고요, 말씀을 잘못 듣기 때문에 잘못된 믿음을 가지기 때문이에요.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지 잘났다고 자꾸 싸우고요, 자기 잘난 것 과시하고 그래서 교회의 위화감이 조성이 될 때, 지금 바울사도가 깨닫고 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서 말씀 해주는 거에요. 오늘 질문이 뭐냐 하면은 이런 질문이에요. 누가 묻기를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여러분들이 먼저 부활에 대한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가난이라든지 상대적인 빈곤이라든지, 여러분 병고라든지, 이런 것에서 자유 함을 얻고 그런 슬픔을 이겨 나가려면은 우리가 죽은 몸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요.
그 아는 것을 목사님의 말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을 들어서 믿어야 되는 거에요. 여러분 이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요. 뭐라는 가 하면은 씨앗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장미를 유추하겠느냐 이러는 거에요. 이 말을 여러분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은, 장미 꽃씨에서 장미를 보지 못하는 거와 같이 지금 우리의 몸은 장미 씨앗과 같은데, 부활은 장미 꽃이다 이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은 지금 우리는 번데기라면은 우리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변화되는 몸은 나비라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번데기가 소망이 뭐냐 하면은 나비가 되는 것이 소망이지요, 번데기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2. 하나님께서 왜 죽음의 관문을 통해서 우리가 그래 가야 되는가, 우리 인간은 타락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그 관문은 통과해야 된다. 죽음을 삶의 소멸이라든지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씨앗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씨앗은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우는 것이에요. 우리 신앙이 그런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나가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죽음의 관문을 통해서 우리가 그래 가야 되는가, 죽음 없이 그러면 얼마나 좋은가, 우리 인간은 타락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그 관문은 통과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죽음을 삶의 소멸이라든지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 정도로 생각하는 거에요. 자녀가 더 훌륭하게 되기 위해서 부모의 품을 잠시 떠나서 유학 가는 것하고 같은 것이 죽음이다. 예전에는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죽는 것을 그렇게 겁 안 냈어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부럽지 안 했어요. 높은 벼슬 가지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안 했어요. 오늘도 이번 부활절에 여러분들이 사실하고 믿음은 달라요. 여러분들이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하고 오래 산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믿음의 문제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는 아무도 몰라요. 단지 예수님의 부활체를 통해서 우리는 한번쯤 여기서 경험한 것이라고. 여러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은 사람이 살면서 누가 가난하게 될지, 병 안 들릴지, 어디 장담할 사람 어디 있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은 가난 해져도 좀 불편하지만은 불행 해지지 않거든요. 자유하게 되거든요.
목사라고 암 안 걸립니까, 그런데 이 믿음이 있으면은 그런 것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거든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부활을 우리는 자꾸만 눈에 보이는 이것으로서 생각해요. 번데기가 더 건강 해진데, 번데기가 더 커 진데, 그것 무슨 의미가 있어요.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야지요. 씨앗이 머물러 있는 것이 뭐 의미가 있어요.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워야지요, 5월을 맞이하는 거지요. 우리는 너무 많은 착각 속에 살아가요. 왜 우리가 진리를 믿고, 진리 안에 거해야 되는가 하면은 우리가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거든요 예수를 믿으면은.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 알아. 목사님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 많아요.
예수 믿는 사람 중에 부지기수에요.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고, 자기가 보는 것이 다인 줄 알고, 요즘 철길에 가면 벌금 내지만은 옛날에 어릴 때 철길에 딱 서 가지고 있으면 눈에 보이면 틀림없이 만나요, 가보면 안 만나요. 내가 보는 것이 달라요. 어항 속의 물고기는 작은 것 같은데 꺼내 놓으면 커요, 굴절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것이 우리 인간의 착시 현상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뭐라는 가 하면은 성공만 하면은 행복할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대통령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어요. 온통 모두다 대통령 탓하잖아요, 그 욕 어떻게 다 먹고 살아요. 부목사 때는 담임 목사 되는 것이 제일 참 소망이었고 좋았는데 담임 목사 되어 보니까 부목사 때가 훨씬 편하더라고요, ㅎ ㅎ
3.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그 하나님의 나라에는, 죽음 이후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게 된다. 혈과 육이라는 것이 지금의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 장미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직장 다녀 보세요, 사장님은 편할 것 같지 만은요, 월급 받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고 싶거든요. 열을 가지면 열 가지 걱정이고, 만을 가지면 만가지 걱정인 것을 모른다고요. 그저 눈에 보이는 하나 좋은 것만 보고 모든 것을 착시 현상 속에 판단해 버린다고요. 진리 안에 거하면은요 보여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우리가 왜 죽음을 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우리가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그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게 된다. 그곳에는 애통하는 것이나 슬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데요. 왜 없는 줄 아세요, 이것 아셔야 된다고.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 이것 믿으셔야 되요.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 혈과 육이라는 것이 지금의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 장미꽃이 될 수 없다는 거에요. 번데기가 번데기의 몸을 가지고는 절대로 나비가 못 된다는 거에요. 허물을 벗어야 되는 거에요. 씨앗을 가지고는 절대로 장미가 못 된다는 거에요.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 썩고, 번데기가 허물을 벗는 것이 죽음의 과정이에요. 그 과정은 아픔이 있어요, 여러분 이것은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몰라요, 이것 믿어야 된다고,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에요.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거에요.
지금도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아픈 것이 큰 문제가 되고, 가난한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혈과 육의 삶을 자꾸 집착하기 때문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는가, 이것 알아야 되요. 그래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씨앗이 썩지 아니하면은 절대로 장미꽃이 될 수 없다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들이 육신이 죽어 지지 아니하면은 절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가 없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암 병 걸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가난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썩지 아니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육신의 삶이 죽어져야지 자유가 일어나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가 여러분들의 삶의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목사님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교인들이 육신의 삶을 죽지 못하고 혈과 육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만약에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 때문이에요. 그 변화가 많은 사람일수록 교회가 어떤 상황에서도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는 교회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참 낯부끄러워서 말 못 하지만은요 우리 교회에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나 그런 변화가 너무나 많아요, 다른 교회하고 다른 모습 속에서, 육의 몸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이래요.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몸,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영의 몸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성경에 갈릴리에도, 예루살렘에도 계셨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부활체시다. 왜 우리에게 아픔이 있고, 이런가, 우리 몸이 시공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육의 몸이라는 것은 혈과 육 우리 몸을 말해요. 신령한 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몸,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영의 몸도 있느니라. 왜 이러는가 하면은 이것은 영원의 세계인 성령님은 아시거든요, 있느니라 해서 우리를 보고 그것 믿어라 이런 말이에요. 육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이 있는 거에요. 그것을 역사에서 보여 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고요, 그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그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소망 중에 바라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것도 참 머리 아파요, 예수님의 부활체와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예수님의 부활절에 무덤에서 많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그래요,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 의하면은 죽은 나사로도 부활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나 무덤 속에서 부활한 사람과 나사로의 부활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야 된다고, 이것 모르니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저는 평생 예수 믿었지만 신학교에서나 목사님들이 이것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더라고, 무덤 속에서 부활한 것까지도 숨겨 버려요. 그래서 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무덤 속에 잠자든 사람이 부활한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왜 그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나사로의 부활이나 예수님의 부활 때, 무덤에서 부활한 사람들은 부활이 아니고, 소생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은 또 죽었어요.
예수님은 죽지 아니하고 승천하셔서 영원의 세계로 가셨다고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요. 또 나사로나 무덤에서 부활한 사람들은 시공의 제한 속에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번데기 몸으로 부활한 것이라 말입니다. 썩은 씨앗이 다시 씨앗이 된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몸은 이 시공의 제한 속에 있잖아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죽는다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사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예수님은 성경 보세요, 갈릴리도 계셨고, 예루살렘에도 계셨어요, 문을 다 닫고 있는데 문 안 열고 공간으로 들어 오셨어요 성경에 그것을 목격한 자들이 기록해 놨어요. 예수님의 부활체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부활체에요.
여러분들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다시는 사망이 없는 거에요. 또 그리고 여러분들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는 거에요. 그렇게 부활하게 될 때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계가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왜 우리가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나는 가난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는 병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아니에요 여러분 아셔야 되요. 왜 우리에게 아픔이 있고, 이런가, 우리 몸이 시공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착각은 뭐냐 하면은 나는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아는 거에요. 병에 걸려서 그런 줄 아는 거에요.
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 성경에 의하면 120년이다, 믿으며 라는 말은 사랑은 어떤 사건 속에서도 근본적인 관계를 흔들리지 않는 것 이런 것이 성경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왜 늙어서 그런가, 늙으면 힘들잖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 몸이 번데기와 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 성경에 의하면 120년이에요, 모든 인간은, 모든 동물의 수명이 얼마인 줄 아세요, 성장기 곱하기 5에요, 그러니까 5년을 성장하는 동물은 25년 살아요. 사람은 120세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사람의 성장기는 25세 까지거든요 Maximum은 그래서 인간의 수명은 120년이에요. 우리가 수명을 120년 살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내 몸을 잘 관리하지도 못했고, 인간이 잘못 살아서 환경이 변화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사는 거에요.
자연사하려면은 홍수 이후에 홍수 이전하고는 또 달라요. 120년은 우리가 살아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120년 살도록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는데, 우리는 그것 자꾸 갉아 먹거든요, 그래 쓰는 거에요 에너지를, 그래서 자꾸 쓰다 보니까 이제는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검버섯도 생기도 힘도 기력도 약해 져 가는 거에요 점점, 왜 끊임없이 공급받지 못하고 우리는 번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거에요.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살면서 참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미운 감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사람 여러분 행복이 뭡니까, 사람이 안 미워 지는 것이 행복하잖아요, 어떤 짓을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인간이 만나 가지고 있을 때는 서로의 사람에 대한 에너지가 충분하거든요 사랑의 감정의 에너지가,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하고는 원수 되는 법이 없어요 웬만해서는.
그런데 함께 지내다 보면은 점점 원수가 되거든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처음에 그 사람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쓸 사랑의 에너지가 내 속에 저장 되어져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나다가 말 한마디 들으면서 기분이 나빠서 그러면 그 사람의 사랑의 에너지를 내가 쓰거든요, 그러면 줄어드는 거에요 그 사람에 대해서, 또 그 사람하고 어떤 사건이 생겨요, 그러면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 사람의 그 행동을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내 속에 충만해서 용서해 주어요. 그런데 이 사람하고 만나서 말 행동이 이런 것이 자꾸 반복이 되면은 그 사람에게 내가 쓰는 사랑의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거든요, 그래서 나중에는 바닥이 나면은 이 인간하고 더 이상 난 상종 안 해 이런다고. 이런 것이 뭐냐 하면은 다 시공의 제한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이런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니까 지난 고난 주간에 제가 믿으며 라는 말은 사랑은 어떤 사건 속에서도 근본적인 관계를 흔들리지 않는 것 이런 것이 성경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남이 미워 지면은 이제는 뭘 생각해야 되는가 하면은 저 사람을 향한 사랑의 에너지가 내한테 점점 줄어 더는구나 이래야 된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런 말이에요. 시공의 제한된 존재는 절대로 그 에너지가 영원하지 않거든요. 그게 여러분 과학에도 증명이 되잖아요, Entropy 법칙이라고, 질서가 무질서로 가는 에너지는 무질서의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절대로 이 지상의 에너지는 없어지지는 않는데, 처음에는 질서의 에너지가 무질서로 써 버린다고,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Entropy 바닥이 되어 버리면은 해체가 일어나는 거에요. 그게 과학적으로도 되어져 있는 이야기에요.
6. 복음은 뭔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거에요. 상대방을 용서해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여러분 윤리학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는 너희가 아니냐.
그러면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에너지를 자꾸 충족하는 것, 상대방의 좋은 감정을 가지고 그러면 인문학이에요. 돈을 좀 더 많이 가져서 내 생명의 안전을 도모해, 이러면 경제학이에요. 그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에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는 것은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경제학이거든요. 상대방을 용서해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여러분 윤리학이에요. 복음은 뭔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은요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하면은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다 유한한 가치를 가지는 거에요. 여러분 부자 되고, 건강 해지고, 병 낫고, 우리가 유한한 가치로 기쁨이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엔트로피 점점 그 기쁨이 상실 되어져 가서 나중에는 바닥이 된다고요.
여러분들 자녀 서울대학 들어가면 너무 좋지요, 언제까지 좋아요, 개학하고 MT 가기 전까지 좋아요. 신입생 MT 하고는 이제 그때부터는 머리가 지끈지끈 해져요. 입학의 기쁨의 에너지가 다 날아가 버린 거에요. 그럼 또 새로운 것을 봐요, 얼마나 헛된 삶이에요. 예수 믿고 여러분들이 영원한 생명의 가치는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의 것은 언젠가는 지는 가치에요. 그걸 깨달은 것이 바울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보는 게 달랐고, 가치가 달랐어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 이렇게 말해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는 너희가 아니냐.
바울의 자랑이나 기쁨이나 바울의 소망은요 교인들이에요. 여기에 여러분들이 중요한 게 있어요. 바울은 교회 크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선교 많이 하는 것이, 교회 몇 개 세우는 이런 것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래요. 그러면 바울에게 교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굉장히 힘든 사람이었어요. 복음을 가르쳐서 교인되게 했는데 세속의 가치 때문에 바울에게 이런 이야기 해요. 저 사람은 목사 자격 없다고, 왜 사도는 옛날에 사도의 자격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과, 생전에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어야 되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생전에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의 자격이 결격이었어요.
처음에 좋을 때는 아무 소리 안 하다가 관계가 나빠지니까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바울은 사도로서 자격이 없어 이런다고, 좋을 때는 목사님 목사님 하다가 좀 안 좋으니까 우리 목사님은 자격이 없어 이랬다고. 그러니까 바울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는 사도로서 팔삭동이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다, 자기 한탄이에요 겸손이 아니에요.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홍해를 건너게 할 때는 할렐루야 모세 찬양하고, 그 다음에 뭐 여러분 이랬다가, 삼일 길 가서 물 없으니까 모세 때려 죽이라 그래요. 모세 때문에 우리가 애굽에서 괜히 나왔다 이래요. 그런데 모세나 바울은 그 사람들이 자기의 자랑이고 소망이고 면류관이래요. 영원한 가치를 아는 사람이에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가치가 어디 있는 줄 아세요 여러분들 혈연적으로는, 자녀 교육에 있어요. 남은요 장학금 주고 밀어 주었다가 결과 안 나오면은 내가 헛고생했네 하지만은 자녀를 남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기 몸에서 난 자기 몸이라 생각하면은 어떠한 자녀에게도 사랑을 베푼 것은요 후회가 없어요. 그게 영원한 가치이기 때문이에요. 아이구 우리 자식 내가 훌륭하게 키웠는데 내가 지를 어떻게 했는데 저 모양 저 꼴이 되었어, 그것은 자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 부모가 가치가 세속의 가치 유한한 가치로 자식을 본 타락의 부모에요. 진짜 부모는요 내가 모든 것 쏟아 부어 주어도 전혀 변화 되지 않는 그 자식을 두고도요, 사랑한 것 자체 때문에 후회가 없다. 놀라운 거듭남이에요.
7.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 자랑은 면류관은 그가 강림하실 때 주 예수 앞의 너이니라. 영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름은 후회가 없느니라. 소망은 시공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그 다음에 씨앗이 장미꽃이 되는 그 썩는 과정을 그 이면의 삶을 이 지상에 가져와서 사는 거에요. 그것이 우리의 자랑은 우리의 면류관은 우리의 기쁨은 주 예수 앞의 너이니라. 교회에 다니면서 여러분들이 충성하고 헌신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난 뒤에 후회하면은 영원한 가치에서 사랑을 안 한 거에요. 제한된 속에서 사랑한 거에요. 분명히 고통스러워요. 인간에게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결과가 안 나오면은 고통스러워요. 시지푸스의 돌과 같이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과 같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반복된 일에는 인간은 실증을 내고 힘들어요. 그게 좁은 길이에요. 그런데 영원한 가치 속에 보면은 그게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 굉장한 일을 알게 되어져요. 그게 거듭남이에요.
시공의 제한된 육신의 몸의 가치가 죽어 지지 않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마저도 성과가 있는 것을 바라는 거에요.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거에요. 엄마가 맨날 성과 보면서 밥합니까, 성과가 없지만은 엄마로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 거든요. 그리고 난 뒤에 후회 안 해요. 그게 영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여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의 소망이 뭡니까, 부자 되는 겁니까, 건강하게 되는 겁니까, 죽어서 천국 가게 되는 겁니까, 세속으로 보는 거에요. 여러분들의 소망은 시공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에 참여하는 것이 소망이 되어야 되요.
그 소망이 오늘날 이 유한한 세상 속에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름은 후회가 없느니라 이런다고요. 자녀를 기르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은 그건 부모 아닙니다. 타락한 부모입니다. 내 기대대로 안 컸더라도 자녀를 낳아서 사랑한 것 그 자체가 나의 기쁨이고 보람이고 상급이 되어져요. 이 놀라운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고 그 부활을 우리가 소망 중에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고요, 이 부활절에 여러분들의 삶이 정말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밖에 없네, 이 찬양으로 인하여 여러분들이 이제는 바라보는 것이 좀 달라지기를 바래요. 여러분들이 복음을 100% 이해하면은요 다양한 부분에서 적용이 일어나요. 100% 이해를 못하니까 응용이 안 되는 거에요.
수학 문제를 풀 때에 공식을 완전히 원리를 알면은 그 공식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데, 공식만 달달이 알면은 푼 문제밖에 몰라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더 하려고 그래요. 어제 저녁에 예전에 제가 목회할 때에 안수집사 이었는데 제가 나오고 분당에 이제 교회를 옮겨서 장로가 좋은 장로님이었어요 사업을 하다가, 그래서 이제 은퇴를 하고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갔어요 한달 전쯤, 선교사로 갔는데 문자가 왔더라고, 목사님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하는데 처음에는 20명이 왔는데 이제는 120명이 오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빵 얻어 먹으러 온다고, 기도 부탁한다고 이래 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문자를 어떻게 보냈는지 아세요, 그게 힘든 겁니다. 빵을 주면은 종교인은 만들어요, 예배에 참여 하게도 하고 기독교의 규정대로 살게도 해요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어요 빵의 힘으로,
제가 뭐라 했는가 하면은 목회 힘든 게 뭔지 아세요, 20명에게 빵 주어서 120명 만드는 게 힘 드는 게 아니고, 빵을 받으러 왔든 사람이 빵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거라고. 그것은 빵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만이 하는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빵을 주려고 할 때에 형편이 안 되면 어떻게 주겠어요, 그러면 목회는 뭔가, 빵을 받으려 하는 사람이 빵을 주려고는 못해도 형편이 안 되니까, 아프리카 사람들이 어떻게 빵을 주겠어요, 제가 그랬어요, 빵을 줄 서서 받아 가고 세 번씩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빵을 주려고 하는 사람은 못되어도 남 못 먹을까 봐 두 번 안 돌고, 나보다 먼저 빵을 먹도록 양보하는 사람 되게 하는 거라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안 된다고, 그래서 목회가 힘든 거라고, 저는 여러분 우리 교회에 그 제가 문자를 보내고 어떤 생각 했는지 아세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잖아요, 저는 우리 교회의 소망이 뭔가 하면은 점심 먹을 때 줄 안 서서 먹는 교회, 나보다 남이 먼저 먹도록 배려하는 교회, 13년째 되었는데 아직 그게 잘 안돼, ㅎ ㅎ ㅎ 작년 여름 수련회 때 다른 교회는 목사님 제일 앞에 서서 밥 받는데, 저는요 다 먹도록 기다려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되는 거에요. 여러분 엄마는 자식 다 먹고 나머지 찌꺼기 먹는 게 엄마지, 반찬 해 가지고 좋은 것 딱 숨겨 놔 놓고,ㅎ ㅎ ㅎ 나중에 자기 먹으려고 그건 엄마 아니에요. ㅎ ㅎ 거듭나야 되요.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더 많이 가지려고 하나님에게 바치는 예물은 우상에게 드리는 우상 제물임을 압니다, 더 많은 것을 나누려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도 언제나 부족한 마음이 있는 예물만이 주님이 받으시는 예물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거듭남 번데기가 나비를 상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인 되게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씨앗으로 있으며 아름다운 장미꽃을 상상할 수 있는 믿음과 비전을 허락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없다고 울지 않고, 아프다고 슬퍼하지 않고, 그 모든 것에서 자유 하게 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삶 속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교회의 아름다운 초석이 이 예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빵을 나누어 줄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빵 타는데 줄 서지 않는 변화, 남이 나보다 먼저 탈 수 있도록 변화되는 이런 변화가 복음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점심을 먹을 때에도 타인이 먼저 먹도록 기다릴 줄 아는 성숙된 교회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일 나중에 먹더라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교회가 되도록 먼저 먹는 내가 더 많은 것을 내 밥 그릇에 챙기는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타인을 위해서 뒤 사람을 위해서 배려함으로 말미암아 갈릴리 가나 잔치에, 아버지 하나님 오병이어의 다 먹고도 남았든 그 기적이 오늘의 현실에서 날마다 실현되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소망을 허락해 주시고 첫 열매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번데기인 우리들이 나비의 삶을 살도록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자신의 아들을 아무런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주시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서 타인이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도록 한 가족 되게 하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오늘도 점점 그 가치가 쇠하여 져 가는 제한된 가치에 매여서 울고 웃지 아니하고 영원한 가치의 삶을 통해서 제한에서 오는 모든 고통에서 자유 함을 누리고 교회를 통하여 천국의 평화를 맛보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죽음 이후에 예비된 그 천국을 맛보도록 선물로 준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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