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창세기 1장 1절
2020년 2월 23일 주일 낮 예배
No. 457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멘
●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떻게? 창세기 1장-11장에 있는 6일 창조에 대한 말씀. 하나님께서는 태양계를 만드시고 은하계를 만드시고, 우주 만물을 만드셨고, 나를 창조했음을 알아서 내가 존귀한 자로 여기게 되고, 타인도 존귀하게 여겨야 된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성경을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신앙을 가지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에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하나님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으셔야 되고,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어야 되요.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1. 계몽주의[啓蒙主義]는 인본주의의 근본이 되는데, 인본주의는 철학에서 말하는 인본주의나 인문학에서 말하는 인본주의가 아니고, 신학에서 말하는 인본주의를 말한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은 내가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복 받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나를 창조하시고, 온 우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나와 모든 사람과 우주 만물이 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의 역사에서 분명히 증거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과 연구가 없기 때문에 문제인데요, 서구의 세계는 성경에 의한 정신 세계로 발전 되어져 왔습니다. 우리 서구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사실은 17세기 이전 계몽주의가 이 땅에 나타나기 전에는 신본주의 사회였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이든 인간이 만든 우상이든 그랬다가 이제 근세에 오면서 사람들의 이성이 작동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이성이 작동하는 그 시대를 계몽주의[啓蒙主義]라 합니다. 그래서 이 계몽주의는 인본주의의 근본이 되는데요, 이것은 제가 말하는 인본주의는 철학에서 말하는 인본주의나 인문학에서 말하는 인본주의가 아니고, 신학에서 말하는 인본주의를 말합니다. 이 차이도 큽니다. 인간 중심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중의 이성 계몽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흘러가게 됩니다. 올바른 신학이 없으면은, 가령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은 우리 주일 학생들도 너무나 중요한 내용인데요, 예전에는 사과가 떨어질 때에 신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왜 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본주의 입니다.
인본주의 계몽주의가 사람들 속에 이성이 작동을 하면서 왜 사과가 올라가지 않고 떨어져,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현상을 보면서 인간의 이성으로 연구를 해보니까 아 만류 인력이라는 것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만류의 인력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사용하는 것이 과학이고 산업혁명이지요. 그래서 물레방아를 만들고 예전에는 뭐 그냥 만들었지만 그런 이용을 통해서 전기 기관차를 만들고 자연의 여러 가지 법칙을 인간이 에너지를 만들어서 사용함으로 편리하게 되는 것이 산업혁명입니다. 그래서 산업혁명은 계몽주의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 여기면서부터 나온 산물인데, 그때의 인간의 정신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은 굉장한 낙관주의에 빠집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과학을 발전 시키면은 우리는 영생하는 존재가 되겠구나, 아프지 않는 존재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아마 현대과학으로 잘 해결되지 않는 불치의 병에 있는 사람들은 줄기 세포가 빨리 잘 발견이 되어져서 이제는 자기도 새로운 장기로서 치유해 나가기를 바라는 거와 같은 지금은 가능하겠나, 내가 죽기 전에 있겠나 이렇지만은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의 시작이 그때 될 때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또 뿐만 아니라 인문학에서도 인간에게 한없이 교육을 시키면은 선한 존재, 윤리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든 겁니다. 그래서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이런 계몽주의 사상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낙관주의를 가지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은 신에 대해서 부정하기를 시작했고,
2. 인간이 경험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이 과학의 원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2차 세계대전과 우리 대한민국이 16개국 UN국이 왔었다. 그래서 6.25 동란에 3년, 월남전을 겪으면서 더 이상 인간에는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또 성경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으로 보니까 그 동안에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나, 사람이 900살 사는 것을 조금도 의심 안 했는데, 과학적인 사고 이성으로 보니까 이상하구나 어떻게 사람이 900세를 살 수 있다는 말이야, 또 과학이 제가 말하는 과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학을 말을 하고, 또 제가 말하는 과학의 본질은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해서 과학이 아니에요. 인간이 경험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이 과학의 원칙입니다. 그런 과학의 원칙도 과학이 발달하면은 또 잘못 되었다는 것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인데도 우리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과학이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신학이고, 설화라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불행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주는 하나님만 쫓아다니는 것이 한국 교회에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진짜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졸업하는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을 잘 교육시키면은 선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으로 성경을 재단한 것이 자유주의 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길가메시[Gilgamesh]에 나오는 것과 같은 창조설화야 이것은 역사가 아니야, 사실이 아니야, 여기에서는 좋은 교훈을 얻어야 돼.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도 성경에서는 다 빼 버리고, 예수님이 하신 좋은 말씀을 들어서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하게 사용하면 돼, 하는 생명을 잃어버린 기독교 윤리를 만들어 버리고, 사회 정의에 구현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도 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빨간 펜을 가지고 자기에게 마음에 드는 경구에 줄을 긋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모습하고 비슷한 겁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할 때에 내 마음에 드는 말을 듣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 말도 바로 그런 데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이렇게 자유주의 신학이 되어져서 교회가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 엄청난 일을 서양은 경험하게 됩니다. 그 엄청난 일이 뭐냐 하면은 1차 세계대전입니다. 옛날에 창과 방패로 싸울 때에는 싸움이 일어나도 몇 명 안 죽었는데 총이 나오면서 화약이 발명되면서 엄청난 살상이 일어나는 거에요.
거기에다가 사람을 교육을 시키면은 선한 일을 하는 윤리적인 인간이 될 줄 알았는데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들어갔을 때에 그 교육은 아무런 작동을 하지 못하고 가장 비열하고 자기가 살려고 하는 그런 극한의 모습을 보면서 서양의 정신 세계는 패닉[Panic]에 빠진 겁니다. 그랬다가 2차 세계대전에 핵을 한번 경험하고부터는요 완전히 Panic에 빠진 거에요. 이제는 과학이 인간에게 희망과 낙관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 인간은 어쩌면은 파멸과 멸망의 단초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고, 또 2차 세계대전과 우리 대한민국에 16개국 UN국이 왔잖아요. 그래서 6.25 동란에 3년, 월남전을 겪으면서 더 이상 인간에는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든 거에요.
3. 히피문화에 대해서: 히피들이 교회 안으로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서 일으킨 것이 복음 성가다. 자유주의 신학을 빼어 버리는 진정한 복음 운동이 뭔가?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은 우리가 교육이라든지 과학이나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정한 휴머니즘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돼, 그래서 히피 문화가 나온 겁니다. 우리 히피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저 뭐 우리 장발하고 이정도 생각하는데 히피의 정신은 무소유 입니다. 철저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무소유 이면서 나누는 겁니다. 그래서 히피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되고, 또 나누지 않으면 히피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가장 행복한 상태로 들아 가기 위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아니하고, 마약이나 대마초를 가지고 서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에도 대마초를 하나 피워도 혼자 피우면 히피가 아닙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그 대마초를 함께 나누어 피우면서 환각 상태에서 함께 즐기면서 노래를 부르는 이런 것이 히피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월남전 이후에서부터 80년대 제가 대학을 다니는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한창 유행을 했든 겁니다. 우리는 이런 것도 모르고 그저 장발을 기르고 뭐 이러면은 우리는 자연으로 히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과학의 그 다음에 인문학의 학문의 눈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미래가 희망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가서 보니까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가, 우리의 미래가 보장이 되는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든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성경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래서 80년대 말부터 서양에서나 한국 교회에나 성경 공부가 만연하기를 시작했고, 그 성경 공부의 한계를 제대로 된 성경 공부가 일어나지 아니한 틈을 신천지가 파고 들었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히피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히피의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서 일으킨 것이 뭐냐 하면은 복음 성가에요. 그래서 80년대에는 미국이나 우리 한국의 복음 성가가 굉장히 유행을 했고, 초창기에 그 복음성가는 보면은 내게 강 같은 평화라든지, 나 자유 얻었네 라든지, 자유와 평화를 갈구[渴求]하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했는데 성경을 통해서 들어가기를 원했다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불렀든 그 통기타 문화가 교회에 들어왔고, 또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가운데 여러분 이런 것 있잖아요.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듯이 이런 것은 과거에 자기네들이 대마초의 작은 불 하나를 가지고 나눌 때에 큰불이 일어나서 더 많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성령에 빗대어서 성령 불로서 우리가 큰불을 일으켜서 우리 모두가 행복한 그런 신앙 생활을 하자고 교회로 밀려 들어왔든 겁니다. 이것이 여러분 이제까지의 인간의 모든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런 거에요. 그러면은 우리가 이렇게 성경으로 들어올 때에 정말 여러분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빼어 버리는 진정한 복음 운동이 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에 있는 6일 창조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가인의 족보와 셈의 족보와 아담의 족보를 죽 연대를 따져 보니까 6천년 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성경에 어떻게 6천 년이 우주의 시작이란 말인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에는 140억년이고, 호킹의 빅뱅이라든지 여러 가지로 볼 때, 또 지구의 역사는 46억년인데 우리가 배울 때에, 이렇게 생각 해 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창조를 믿지 아니하고 학교에 가면 진화론을 시험을 치고, 교회에 오면 그저 생각으로만 신앙의 고백으로만 창조가 존재했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 성경을 증명하기 위해서 창조과학회가 생겨 가지고 젊은 우주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성경이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랜드캐년이나 여러가지 여러분 아마 비디오를 통해서 이 우주는 6천 년이 되었다고, 또 과학과의 싸움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4. 진정한 창조를 믿어야 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또 지구의 역사는 6천년 밖에 안 되는가?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이런 것은 무엇이 문제냐 하면은 신학자들은 문리학을 모르는 것이 문제였고, 문리학자들은 신학을 모르는 것이 문제였어요. 단순한 믿음만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여러분들이 잘 보시면은 이 문제가 해결이 되어져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6일 동안 창조되고 난 뒤에 지구의 역사와 우주의 기온이 어떤가 하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리고, 또 다음 시간에는 성경에 보면은 인간이 900세까지 살았다는데 이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거에요. 이것이 사실로 받아 드리지 아니하면은 신앙을 가지고 사회 정의운동 하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疏外]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돼,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위해서 와 이런다고요.
그것도 자유주의에 휴머니즘 운동이라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복을 받도록 열심히 신앙 생활 해 가지고 복 받으려고 생각한다고요. 진정한 창조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아셔야 되요. 그래서 900세 까지는 제가 진짜 인간이 900세를 살았는가, 또 왜 우리가 그런 것을 믿어야 되는가, 하는 것을 다음에 말씀 드리고, 오늘은 정말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또 지구의 역사는 6천년 밖에 안 되는가, 이런 것들을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그런데 제가하는 것은 그저 제가 기도 해 가지고 깨달은 게 아니고요, 제가 참 감사한 것은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총신신대원입니다. 우리 한국에서 제일 큰 교단이고, 저 양지에서 제가 양지로 옮기고 난 뒤에 두 번째로 제가 졸업을 했는데, 그때에 총신에는 주영흠 이라고 하는 위대한 물리학자 이면서 신학을 하신 분이었어요.
아버지가 유대인이라서 주씨가 아니고 쮸라고 그랬든 분이에요. 그분의 강의를 제가 들으면서 물리학으로 창조를 이해하게 되었고요, 또 제가 신학을 다닐 때에 김세윤 이라고 하는 훌륭한 한국의 아마 한국의 학자들 중에는 신학 학회에서 그 논문을 인정받는 그런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이 두 분의 영향으로 이 창조 신학을 제가 정리를 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말씀 성경을 새롭게 봄으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을 정확하게 믿어서 여러분들이 복된 사람이 되어지고, 우리 인류[人類]가 미래가 소망이 있는 그런 신앙이 교회로부터 출발되는 은혜가 있어야 되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은 진화론으로 답을 써야 되고, 교회에 오면은 창조를 믿어야 되는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이 신앙 속에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한 사람, 또 사회에 유익이 되는 그런 사람으로 나아가는 귀한 졸업식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에게 6일 창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은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첫
째 날에 빛과 어두움을 만드시고, 둘째 날에는 궁창과 궁창을 나뉘게 하시고, 셋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로 나뉘었어요. 그리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는 그것들에 대해서 채우는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넷째 날에는 빛과 어두움을 위해서 태양과 별과 달을 만드셨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럴 때에 14절이 넷째 날 창조인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은 그 14절에 보면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이렇게 해 놨습니다.
5. 넷째 날에 와서 비로서 우리가 쓰는 크로노스 지구의 시간이 창조되었다. 지구는 우주의 여러 은하계 속에 그 중의 태양계 중에 네 번째의 위성에 지나지 않는 지구이지만은 성경은 지구가 첫째 날 창조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뭐냐 하면은 넷째 날에 와서 비로서 우리가 쓰는 크로노스[Kronos] 지구의 시간이 창조되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인간이 20세기에 와서 인간의 가장 최고의 석학인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거에요. 그전까지만 해도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라 봤는데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공간은 변한다. 나중에 호킹에 의해서 우주는 평창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발견 해냈잖아요. 그리고 시간도 변한다. 중력에 따라서 시간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그래서 인터스텔라[Interstellar] 라는 영화를 보면은 우주에서 하루를 지내면은 지구에서는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르는 그런 영화도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한가지 아셔야 되는 것이 넷째 날에 우리가 창조 되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하루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은 우리가 쓰는 24시간이 아니구나 하는 거에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시간 창조주는 이미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 우리가 쓰는 24시간 이전에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무슨 시간이냐, 이런 문제를 과거에 신학자들은 갭설이나 용설로서 해결을 하려 했는데, 그런 것에는 물리학이 뒷받침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한 자기의 주장이었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는 못했어요. 그러면 물리학에서 말할 때에 호킹이 이야기한 대로 온 우주는 이제는 모자이크로 되어져 있다 하잖아요.
그래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긴 시간에 대해서 교차한다고 그래요. 그러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은 우주의 하루라 말입니다. 이 우주의 하루라면은 우주가 140억년이 되었다 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안 해요. 그런데 문제는 또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예전에는 창세기 1장 1절을 창조의 개론으로 보았는데 지금 물리학과 신학이 만나면서는 창세기 1장 1절이 첫째 날 창조라고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내용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구는 우주의 여러 은하계 속에 그 중의 태양계 중의 네 번째의 위성[衛星]에 지나지 않는 지구이지만은 성경은 지구가 첫째 날 창조 되었다는 거에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에는 우주는 140억년이고 지구는 46억년이면은 어떻게 첫째 날 창조되었습니까 라는 거에요. 이런 것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은 지구에서의 우리의 시간의 책정과 우주에서의 책정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46억년이나 지구가, 우주가 140억년이라는 것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 동일한 변화 가운데에서 측정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은 여러분들이 지금도 어떤 과학자들은 우주 어느 곳에 생명체가 있을 것이다, 인간과 같은 유인원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한다고요.
6. 지구가 소중한 것은 생명이 있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이 창조 사상이다. 타락 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보다 신학적인 타락의 정의가 정확하게 붙잡고 있어야 될 문제이다. 사람을 기능과 효용[效用]으로 가치 평가 하는 것, 그게 타락이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이 태양계의 한 위성[衛星]인 지구는 하나님이 이 지구를 위해서 온 우주만물을 만들었어요. 또 이 지구가 소중한 것은 생명이 있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 사상이 창조 사상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볼 때, 학교에서 배우는 것하고는 틀림없이 태양계의 한 위성이지만은 신학적으로 볼 때에 지구보다 귀한 것이 없고요, 지구가 귀한 것은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 요즘은 반려 견이나 이런 것들을 사람 취급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태양계를 만드시고 은하계를 만드시고,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증명하거나 경험 될 수 없기 때문에 론이에요. 학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착각이 뭐냐 하면은 학교에서 창조를 가르치니까 창조는 진화 학인 줄 알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창조는 론이라는데 아니에요, 진화론이에요. 왜 증명할 길도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 창조를 믿는 사람입니다. 이럴 때에도 여러분들 이 헬라적 학문의 방법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헬라적 학문의 방법은 어느 것이 사실이냐 하는 논정이에요. 지금 창조과학회나 모든 것이 뭐냐 하면은 논정[論定]을 하는 거에요. 그 論定은 의미가 없습니다. 창조 되었으면 어떻고 진화 되었으면 어때요.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는가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이 히브리적 사고에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우리 주일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은 전부 헬라적 교육의 방법으로 지식의 전부를 가지게 되어져요. 그 지식이 자신의 삶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은 제가 몇 주간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했잖아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타락한 인간의 문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낸 가치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릴 때에 이런 말 하잖아요, 사회적인 통념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가치판단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마음 성경을 가지고 가치판단 하세요. 이래도 교회에서 고집 부리고 전부 하는 것 보면 전부 사회적인 통념을 가지고 그것이 진리라고, 판단하는 것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어요.
중요한 내용 말씀 드릴게요.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 낸 이 세상은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가 어디 있어요, 먹고 살기 위해서 입니까, 그러면 지금 다 먹고 살만 하잖아요, 왜 그런가,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 받으려고, 타락한 인간이라는 것은요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 받으려고 하는 것이 신학적 인본주의라 말입니다. 내가 돈이 있어야지, 사람 대접받아, 교회마저도 그러잖아요. 교회도 돈이 있어야 인정받아, 전부 타락한 가치 문화 때문이에요. 왜 부자 되려고 해요, 부자도 세끼 먹는데, 부자 되어야 사회에서 인정 받는다는 겁니다.
타락 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보다 신학적인 타락의 정의가 정확하게 여러분들을 붙잡고 있어야 될 문제에요. 사람을 기능과 효용[效用]으로 가치 평가 하는 것, 그게 타락이에요 교회마저도, 얼마나 우리 교회에 유익한가, 우리 교회에 기여를 하는가를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타락한 세상의 문화가 교회에 들어온 거에요. 여러분들 정말 이 세상에서 진짜 인간의 고귀한 가치, 태양계의 한 위성에 지나지 않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고, 그 지구 속에 생명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생명 중에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고 하는 이런 신학적 인본주의 속에서 이것이 되려면은 뭐해야 되는가, 먼저 내가 부자 되고, 열심히 하고, 어떤 데에 가서 기여해 가지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가치를 평가 받으려고 하는 생각부터 제해 내어야 되요.
7. 성령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사람이다. 교회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 귀한 줄 알고, 이것이 생명이다.
왜? 제가 여러분들 설교하면서 그러잖아요, 이제는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의 부모의 눈으로 보라고, 성령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인간의 가치는요 어디에 봐야지 비로서 원래의 가치로 나타나는가 하면은 부모 앞에 설 때에요, 모든 사람이 쓸모 없다고 하고, 저것 없애야 된다고 사라져야 된다고 해도 부모 앞에 가면은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존재가 되요.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목사님조차도 교회에 얼마나 헌금을 했느냐 얼마나 봉사를 했느냐를 가지고 사람의 교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타락한 겁니다.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생각이 들어요. 기도와 말씀이 지배를 하면은 사람 자체가 귀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할 이유가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이곳에 있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복을 주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가장 존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타인도 그렇게 여겨 지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간의 복이에요. 교회가 이런 역할의 소금이 되고 있느냐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창조한 것을 믿으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의 창조를 믿어야 하는 것은 너하고 어느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문학에서 비교하지마 이런다고, 그래 되면 자유주의 신학이 되어 버려요.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은 비교하지 않게 되어져요. 제가 어릴 때에만 해도 우리 한국이 유교 가치가 너무 강했어요. 그래서 장손은 반듯이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아들이 없으면은 대가 끊긴다 해 가지고 둘째 아들 가운데에서 양자를 보냈어요. 여러분 둘째가 아들이 열인데 형님에게 양자를 보내야 되는데, 첫째 아들은 이래서 못 주겠고, 둘째는 이래서 못 주겠고, 셋째는 이래서 못 주겠고, 비교하지 안 해요. 타락한 육신의 부모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일까보냐, 이 아이들이 정말 얼마나 교회에서 조차도 세습적 인문학에 의한 교육과 가치 체계 때문에 자신의 그 존귀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잖아요.
여러분 교회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거에요. 그래야지 사람 귀한 줄 안다고, 이게 생명이에요. 두 번째로 여러분 인본주의적인 자연 운동하는 것이 환경 보호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잖아요, 온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에요,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고요. 자 회사를 하는데 아버지가 회사의 주인이야, 그러면은 월급 많이 받는 것을 가지고 좋아 안 해요. 좋지요 아버지가 회장이면은 월급 많이 받는 것, 내가 월급 많이 받으면은 아버지의 회사가 어려워 지지 아니할까, 이 마음이 있어야지요, 직원은 고용인은 회사는 잘못 되어도 회사 잘 되고 월급 많이 받으면 좋고, 회사는 좀 못되어도 내 월급 올라가면 좋은 것이 직원이에요.
8. 창조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만이 자기 자신을 존귀하고 사랑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이 존귀하게 여기는 그런 삶,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이다. 나도 존귀한 것이고, 타인도 존귀하다. 영적인 싸움이 날마다 있어야 된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 복 받는 게 뭐냐 하면은 복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소비의 즐거움으로 사는 것이거든요,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해서, 에너지를 많이 쓰는 거에요. 우주 만물은 망가지든 말든 내 아버지 것이 아니고 나는 이곳에 사는 종업원이니까, 나만 편하면 돼, 나만 에너지 많이 쓰면 되고, 나만 소비의 즐거움으로 살면 돼, 전부 하나님이 아버지 아닌 사탄의 자녀들이요, 그렇다고 해서 자연 운동 환경 운동 아니에요. 제가 여러분들 말씀 드리잖아요. 주신 은혜의 분량 안에서 만족하고, 주신 것을 여러분들이 소비하면서 살라고, 분량에 지나친 것 분수에 지나친 것 바라지도 말고, 그게 진정한 자연 운동이에요.
왜 이 세상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언젠가는 종말이 와요. 과학에서 말하는 대로 엔트로피[Entropy]법칙 유용한 에너지를 한번 사용했을 때에는 그 에너지는 절대로 유용한 에너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에요. 그것이 타락한 세상의 자연의 법칙이에요. 다음 주일도 제가 이 부분 좀 말씀 드릴 거에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자연 보호 한다고 해도 이 세상은 종말이 와요.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붙들려고 하는 것이 주인의 아들의 자세에요. 금욕주의 허무주의도 아니에요. 금욕주의 허무주의는 자연 운동하는 사람과 같은 거에요. 여러분들의 형편에 맞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에 만족해서 오늘 누릴 것 누리고 그러면서도 우리 아버지 집이 종말을 향해 갈지라도 내가 존재할 때에 이 지구와 우주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내가 소비할 것 조금 적게 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믿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만이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되어져요.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이 존귀하게 여기는 그런 삶,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온 우주 만물이 우리 아버지 거에요.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더 많은 소비의 쾌락으로 사는 것은 악하고 악한 죄인의 삶이에요. 사탄의 자녀에요 그게. 교회가 뭐라고 그래요, 열심히 신앙 생활해서 더 많이 가져서 더 많은 소비의 즐거움으로 쾌락으로 살아라, 사탄의 자녀로 만드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좇아 다니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천지 만물 만드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만드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너를 만드셨어요.
그래서 나도 존귀한 것이고, 타인도 존귀한 거에요. 영적인 싸움이 날마다 있어야 되요. 영적인 싸움 기도하지 않고, 말씀 듣지 아니하면은 목사인 나도 교회의 유익이 되는 사람은 가치 있게 보이고, 그러지 아니하면은 가치 없게 보이는 거에요. 하물며 여러분들일까 보냐. 목사인 나도 더 많은 소유와 소비의 즐거움으로 살고 싶은데 하물며 여러분들이야, 세상은 왜 이렇게 되어졌는가, 창조 신학을 잃어버렸고, 창조 신학이 왜곡이 되면서 지구의 멸망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역사가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는 20세기 동안 인간의 무한한 낙관론에도 젖어 봤다가, 거기에 철저히 우리 속에는 절망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히피로 돌아갔다가 다시 성경으로 왔는데, 이 성경을 헬라적으로 성경의 지식을 주입하고, 성경의 좋은 말만 찾고, 교회는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기관이 되어야 되고, 인간을 윤리적인 인간이나 종교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복음이 상실된 교회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이 적어 지고, 인류의 미래가 암울[暗鬱] 해져 가는 겁니다.
비록 오늘 여러분 이 한번의 예배에 참석이 여러분들의 삶의 큰 전환점이 되어야 되요. 올바른 성경 운동, 복음을 제대로 알아서 창조주 하나님 내가 우연히 생긴 존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한 줄 알아서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존귀한 자로 여기게 되고요,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타인을 보는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고요, 여러분들 속에 끊임없이 많은 것을 소유해서 소비의 쾌락으로 살려고 하는 사탄의 속삭임을 우리 아버지 것인데, 이래서 그린피스[Greenpeace]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 맞게 올바른 소비의 삶을 살다가 우리 천국에서 다 만나는 그런 우리 신앙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더 이상 세속의 문화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 그런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에 주영이 찬이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모든 아이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 아이들 졸업하는데 학교에서는 진화라 그러고, 교회에서는 창조라 하고, 진화론 자들과 창조론 자들이 서로 자신이 옳다고 논정 하는 속에 교회 오면은 하나님 창조 믿고, 학교 가면은 진화를 믿는 희한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져 가는 이 땅을 바라보면서 오늘 졸업할 때에 하나님의 창조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있는 사람의 문화 속에 남들보다 더 가지고 사회의 기능의 효율을 따라서 자신을 가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죄인도 어떠한 약한 자도 그 부모 앞에서는 가장 존귀한 자가 되고, 부모는 공부 잘하는 자식이나 운동 잘하는 자식이나 서로 비교하지 않는 그런 부모보다도 더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 진짜 복 있는 사람이 되어져서 타인도 세속의 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좀 더 멸망이 늦어 지는 세상의 주인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함으로 사는 소비의 쾌락주의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 안에서 오늘 사용할 것 사용하면서 나누면서 복된 생애를 사는 귀한 자녀들 되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부모에게는 자랑스러움이요, 교회와 사회와 인류의 유익이 되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의 미래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예물을 주님이 열납해 주어서 복의 수단이 아니라, 주인 된 하나님 앞에 10의 1일을 돌려 드림으로 말미암아 죄악 된 세상 속에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으로 무너뜨려 가는 귀한 도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복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우리 주일학교 졸업생들 우리 교회 믿음의 권속들 장차 회복된 에덴 동산에서 그 삶을 땅에서도 맛보도록 선물로 주신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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