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고린도전서 11: 13-16
2020년 2월 16일 주일 낮 예배
No. 456
13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아멘
● 유대교는 구약 말라기와 예수님의 오신 사이가 약400년. 그때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고 중간기 암흑기라 했다.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 구제, 기도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회 칠한 무덤이다. 바리새인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11조를 드리면서도 의와 인과 신을 잃어버렸다.
본질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형적인 것 제도 관습 이런 대에 관심이 있으면은 종교인입니다. 종교인들이 복음을 알게 되어지면은 그 종교의 생명력이 부가되어 집니다. 우리 한국의 제가 여러분들 설교를 듣는 분들 잘 이해 하겠지만 유대교화되는 기독교를 제일 경계합니다. 많은 우리 한국의 교회 교인들은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목사님을 또 종교화된 목사님들에 의해서 구약은 유대교이고 신약은 기독교인 줄 알아요. 그렇게 말하면 앞으로 무식한 사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구약은 유대교가 아니고요, 유대교는 구약인 말라기와 예수님의 오신 사이가 약400년 됩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어요. 그래서 중간 기라 그러고 암흑기라고 그럽니다.
1. 유대인들이 완전한 안식일을 지키면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주어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와 같이 이제는 외세에 지배 받지 않는 번영된 이스라엘이 올 것이다 생각해서 경건의 운동을 펼쳤든 사람들이다.
세계적으로는 알렉산드 라고 하는 위대한 대왕이 나오고, 로마가 출현하고, 이런 때이지만은 그때에 그렇게 세계가 흥황 했지만 제국이 판을 쳤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은 암흑기에요. 왜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세상이 아무리 잘살고 번영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없으면은 암흑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뭐냐 이런 것을 모르니까 구약은 유대교 이런 이야기한다고요, 유대교는 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가 말씀 드릴 수 있지만은 한가지 가하면은 바리새인에 의해서 만들어 진 종교입니다. 똑같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보면서 이상한 종교를 만들었어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생명 없는 목사에 의해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같이 죽은 종교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무엇으로 아는가, 교회가 세상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가, 아니면은 교회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가, 이런 것 가지고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은 이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유대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성전과 그 안에 드려 지는 제사거든요, 여러분들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지면은 주일이 가장 귀하고, 또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져야 되요.
그런데 그 우선순위 중에 예배가 무엇인지 주일이 뭔지 모르고 형식으로만 드리면은 죽은 종교가 되겠지요.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당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무엇이 없었는가, 제사 제도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있었지만 그 속에 제사장들이나 레위지파들이 일반 백성들에 의해서 되어졌다고요. 그래서 올바른 제사가 드려 지지를 안 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안 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그런데 거기에 일단의 무리들 예수님 당시에 약 4천명 되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연구하다 보니까 정말 레위지파가 중요한 것을 알고, 구별된 자들 자기들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기네들은 삶을 구별하고, 선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면서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일 들을 구분을 했고, 또 안식일 제도를 굉장히 중요시 여기고 절기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은 모든 유대인들이 완전한 안식일을 지키면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주어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와 같이 이제는 외세에 지배 받지 않는 번영된 이스라엘이 올 것이다 생각해서 경건의 운동을 펼쳤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험 잡을 때가 없었든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은 반듯이 금식을 했고요, 그리고 매일 착한 일 구제를 했고, 하루에 세 번은 반듯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지만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회 칠한 무덤이다. 겉은 하얀데 속은 시체와 같이 썩어 문더러 진 자다. 독사의 자식이다. 정말 쌍욕 이라는 욕은 다 했다고요.
2. 제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 제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올바른 자세를 가지게 되면은 희락 기쁨이 넘친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뭐라는가 하면은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너희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자 않는구나,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들에게 말은 들을지라도 행위는 본받지 말라. 이런 이야기도 했다고요. 그러면서 이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이 사람들은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있어 가지고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한다. 오늘도 어떻게 보면은 여러분들이 참 종교성을 가지고 열심히 한국 교회가 예수를 믿는데 복음을 알지 못하는 종교인들이 천국 문을 가로막아서 자기도 못 들어가고, 교인도 못 들어가게 하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런 말입니다.
오늘도 이 설교 이제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4장까지는 예배에 관한 말씀이라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4장까지는 예배에 관한 말씀이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것은 헬라적 교육의 방법의 소산이에요. 여러분들이 이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4장까지 강해 해 나갈 때 예배 자가 되어야 되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도 종교적인 짐을 지고 살아가는 그런 무거운 종교인이 아니고,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땅에서도 맛보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는데 의를 가지고 자꾸 의로운 행위라 이러면 안 되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될 때, 제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 제사입니다.
예배는 그래서 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예배의 행위에요. 의자에 앉아 있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의 무릎을 꿇어야 되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은 논쟁하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는 자들 이러는데, 하나님의 말씀 설교 말씀은 논쟁하려고 하면 안 되요. 우리 교회에 다니면서 논쟁하려면은 다른 교회 가는 것이 나아요. 여러분들이 순종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요. 혹시 의심이 들면은 목사님에게 와서 물어야지요. 다른 사람에게 비판하는 이런 말을 할 때에 여러분들이 체면 봐 가지고 그 사람 받아 주면 안 되요. 그러면 안 되지 성경에도 논쟁하는 자가 아닌데 라고 이야기를 해 주어야 우리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가요. 여러분들이 예배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올바른 자세를 가지게 되면은 희락 기쁨이 넘쳐요.
교회에 와서 거룩한 인상 쓰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요, 정말 기쁨이 넘쳐요. 그런데 이 기쁨은 세속의 기쁨하고 틀려요. 세속은 뭔가를 소유하거나 높아지거나 이랬을 때에 우리가 가지는 기쁨 그것은 아무나 가지는 거에요. 우리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은 세속적 기쁨을 교회에서 누리라는 거에요. 여러분 미스터트롯을 보면서 유행가 부르면서 좋아하는 것이나 교회 와서 찬송가 부르고 성가대 보고 좋아하는 것이나 그래서 감정이 동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희한한 것은 그런 기쁨은 사라지는 기쁨인데요, 여러분들 안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예배 자가 되면은 정말 그런 타락한 감정이 아니고요 타락되기 전에 인간이 가졌든 그 희락이 경험 되어져요.
3. 머리에 수건을 써야 되느냐 아니냐는 것은 제도와 관습이다. 이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자녀를 힘들게 길러도 부모에게 만족하거나 감사하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들어내는 것은 뭐냐?
때로는 힘이 들고, 어렵기도 한데, 그 기쁨은 힘든 것하고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에요. 여러분들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면 제가 그러잖아요,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은 참 힘이 드는 겁니다. 내 쓸 것 안 쓰고 다 주어도 부모에게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못해요. 그런데 자녀가 가지는 그 기쁨이 아닌 부모의 기쁨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거든요. 영적으로도 이런 게 있어요. 목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크게 되어져서 어떤 분들은 교회 자꾸 크게 되려고 하는데, 교회 커 봐야 목사님만 좋아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힘들어, 그래 가지고 여러분들이 기뻐 지는 것은 그것은 세상의 기쁨이에요. 목회가 진짜 목사가 되면 교인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녀가 늘어나는 거와 같은 부담이 생겨요, 거룩한 부담이요.
그런대도 힘이 들지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원천에서 나오는 기쁨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내가 키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분량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 나가는 그런 목회에요. 이런 예배가 여러분들 속에 되어지려면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상황으로 이야기하자면은 고린도교회가 예배 때에 오늘 본문이 11장 1장부터 이제 16절이 한 단락인데요, 예배 때에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느냐 안 써느냐 이런 문제가 되어졌다고. 그럴 때 바울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된다고 이야기 하면서 쭉 이야기 했는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잖아요, 머리에 수건을 써야 되느냐 아니냐는 것은 제도와 관습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속에 변하지 않는 그것을 보아야만이 예배 자가 되어져요. 여자들이 수건을 써야 된다 라고 이야기 했든 것은 고린도교회가 여자들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이 자유를 남용해 가지고 교회 와서 옛날에는 예배에 참여도 못했다고요, 여인의 뜰이 있었다고요, 세속화된 종교 속에 있을 때에는. 그런데 와서 예배에 참여해서 이제 예언의 은사나 여러 가지 자유가 주어졌어요. 그래서 설교도 할 수 있었고, 기도도 할 수 있었고 이랬는데 여자들이 뭐했는가 하면은 자랑을 했다고 남편 자랑, 그러면은 수건을 쓰라는 거에요. 여자들은 남자의 영광이라는 말이 그런 말이에요. 남자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가,
자기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듯이 얼굴을 가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이런 말이에요. 이런 말 속에는 많은 사회적인 관습과 타락한 죄 성이 만든 인간의 문화가 내재 해 있어요. 여러분들이 복음으로 그런 것들을 변화시켜야 되어져요. 어떤 내재가 되어졌는가 여자들은 예뻐야 된다고, 그래서 여기에도 지금 뭐라는가 하면은 긴 머리가 있으면 남자는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고, 여자에게는 긴 머리가 없으면은 여자들은 수치가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타락한 문화 속에서 지금 남녀를 바라보는 거에요. 그래서 동서고금의 문화에서 보면은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깎아서 자기의 얼굴을 들어내려고 그러고, 여자들은 머리를 길러서 아름다움을 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래 여자와 남자를 창조한 창조의 목적이 인간의 죄 성에 의해서 타락된 모습 속에 나타나는 거에요.
그래서 여자를 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락된 문화에요. 교회에도 무슨 행사 하려면은 여자들은 그런 어떤 꽃 같은 행사를 하는 것은 타락된 문화에요. 그런 문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가져야 되는가, 이런 것 알고, 예수를 믿어야 되겠지요. 오늘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들어내는 것은 뭐냐, 오늘도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 여성 성도들도 내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들어내는 예배가 되어져야 되요 하나님 만나서. 그러지 아니하면서 교회가 전쟁터가 된다고. 죄인 된 세상은 생존경쟁이라는 사망의 증상이 나타나면서 인간의 문화는 생존경쟁의 역사잖아요 전쟁의 역사잖아요. 그래서 그런 타락한 세상 속에 힘있는 자 능력이 있는 자가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문화가 되었다라는 것을 아셔야 되요.
4.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된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홀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성 육신 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자신을 들어 내신 분이다.
그 문화가 새로워 져야 된다, 예수 믿고 교회는, 어떻게 새로워 저는가, 우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되요.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참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가 되어 가지고도 자기가 교회가 크게 하고 사업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은 홀로 영광스러운 분이에요. 내가 뭐 좀 착한 일 했다고 하나님이 더 영광 받는 것, 그것은 상대적인 영광을 만들어 버리는 거에요. 그런 것도 알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하니까 그런 종교 생활을 하게 한다고, 내 자녀가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홀로 영광스러운 분이에요.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빛이 내 삶에 반사되어서 나타나야 되는 거에요. 반사되어 나타나는 것이 뭐냐, 빌립보서를 제가 강해할 때 이야기 했지요. 빌립보서는 어떤 문제가 있었어요, 거기도 여성의 해방 운동이 일어나고 나니까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교회의 주도권 싸움을 했다고요. 그런 그들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도 교회가 타락된 세상 속에서 얼마나 주도권이나 자기의 존재감을 들어내려고 하는 죽은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아요.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그런 분 많지요. 사회에서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데, 교회 와서 존재감이 없는 만큼 신앙 생활은 열심히 할 수 있어, 그것은 교회 와서 외형적인 종교적인 제도와 관습에 열심히 하면 교인들은 박수 쳐주거든요.
장로 뽑아 주거든요, 그럼 교회 와서 자기가 자기의 존재감을 들어내려고 한다고요. 죽은 종교에요. 그런 교회에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곧 그는 하나님과 본채시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본질이 드러나신 분이다 이 말입니다. 성 육신 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자신을 들어 내신 분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 하나님은 눈감고 기도해서 만나니까 전부 이상한 큰믿음 교회나 이상한 그런 인터콥이나 희한한 것들이 만들어 진다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셔야 되어요. 성육신 교리는 그것이에요. 그래서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같은 분인데 스스로 낮추었다 이 말은 겸손에 대한 오해에요.
본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거에요.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우리 인간과 달리 자기를 비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케노시스 완전히 내어 준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에게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요.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에요. 유한한 존재의 인간의 삶의 양태는 무엇을 가지려고 해야 되요. 높아지려고 해야 되요. 왜 유한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높은 자리에 가면은 가치 있다 생각해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만 명 교회에는 영광이 있고, 열명 교회에는 영광이 없다, 전부 상대적인 거에요.
5.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은 인간과 달리 Take 하지 않고 Give 한다. 자기를 비우신다. 예배 자는 하님께 굴복함으로 자신 속에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은 나타나는 현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찾는데, 복음은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수학적으로도 무한대[無限大]마이너스 무한대는 무한대에요. 백만 마이너스 백만은 제로지만, 무한대 더하기 무한대는 무한대에요. 무한대 더하기 일조도 무한대에요. 더해도 더해 지지 않고 빼도 빼 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의 양식은 인간과 달리 Take 하지 않고 Give 한다는 거에요, 자기를 비우는 거에요. 우리 한국 교회가 얼마나 종교화 되었으면 채우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CEO의 영광이 보이는 거에요. CEO는 뭡니까, 남은 죽어도 자기의 회사 크게 하는 능력이 있는 자, 종교인 목사와 장로들만 모이는 거지요. 하나님은요 자기를 비워요. 다 내주어도 조금도 감해 지지 않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요.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면은 남편 자랑 안 하게 된다는 거에요. 세상 자랑 안 하게 된다는 거에요.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 받으려고 안 하게 된다는 거에요. 예배에 여러분들 속에 이런 것이 있을 때에 희락이라는 거에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여러분들 속에 있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교회가 평강이 넘치는 교회가 되는 거에요. 설교 아무리 하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예배 드려도 이 말씀에 굴복하지 아니하면은, 논쟁하려고 하면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스스로 판단해 보세요. 오늘도 여자들 수건 쓰느냐 안 쓰느냐 이런 제도와 관습이 아니고, 예배 자는 하님께 굴복함으로 자신 속에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을 말씀하는 거에요.
수건을 쓰느냐 안 쓰느냐는 것은 시대를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은 내 속에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은 영원히 변화되지 아니할 거에요. 우리나라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 여권 운동도 봐야 되요. 요즘은 우리가 직업이 없어서 직업 구하기 힘들어 졌다고 그러지요. 얼마 전 뉴스에는 서울대학 나온 아이들이 9급 공무원에 응시한다는 말이 나왔어요. 이런 현상이 왜 있는가 하는 것을 아셔야 되요. 변하지 아니해야 할 복음의 의해서 여권 운동을 하지 않고 죄성으로 현상에 대한 그 현상을 해결하려고 하는 세상의 것은 나타나는 현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찾는데, 복음은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여권 운동 하니까 이렇게 일자리가 적어 진 거에요. 어떻게 적어 졌어요, 옛날에는 여자들이 사회 진출 안 했어요. 그래서 능력이 좀 부족해도 남자들이 사회에서 일자리를 찾기 좋았는데 요즘은 전부 여성들이 다 사회에 진출해 버리니까, 자연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든 거에요. 그러면 목사님 이럴 때에 여자들이 일을 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은 또 어떻게 되는가 하면은 원리주의자가 되는 거에요. 변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적응해 가면서도 잃어버리지 아니할 본질이 있어야 되는 거에요. 잃어버리지 않은 본질이 뭔가, 이것을 한 주간 고민을 했는데 일부 예배 드리면서 겨우 찾았기 때문에 일부 예배만 하고 안 하려다가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ㅎ ㅎ
6. 부부간의 만남에 대한 현실의 이야기. 하나님은 여성의 고유의 그 가치를 전쟁 문화 타락한 문화 속에 남성 우월주의 문화 속에 있는 그 가치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 이택영 장로님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잖아요. 보통 의사가 되면은 텔레비 나오는데 보니까 부인도 의사고 이렇더라고 교수고,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서 해 버리니까 능력 없는 남자는 능력이라는 말은 죄성이 만들어 낸 문화와 관습 속에서 말하는 거에요, 복음에서 말하는 게 아니고, 더 일자리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그 의사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그 많은 죄가 자녀에게 또 다른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되어서 부의 대물림이 되어지고 이럴 때에 올바른 것은 뭐냐 하면은 올바른 여성 운동은 우리 이은희 집사님이 가정 주부로서 전업 주부잖아요. 전업 주부로서의 그 가치와 위치를 남편과 동등하게 여겨 주는 거에요.
그래야 여러분들이 예배 자가 되는 거에요. 혹시 여자가 능력이 있어 가지고 의사가 되고 사회 진출을 하거든 자기 남편은 가정 전업 남편 얻으라고 ㅎ ㅎ 그래야 세상이 공평해 지지 안 해요. 그런데 우리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집에도 얘를 딸딸 아들인데 딸 둘을 대학을 시켜 가지고 한 게 뭐냐 하면은 좋은 직장 가지라고 아빠가 그런 거에요. 그래서 남편에게 용돈 카드 받아 쓰면서 남편에게 눈치 보지 않고, 너도 네 능력을 가지고 살아 라고, 그래서 얘들이 생각대로 또 개척하면 힘든 때에 은행에 들어갔는데 첫째야 작가 된다고 은행 그만 두는 거야 내가 뭐 자기 행복 찾아서 가는 것 잘했다 이러지만,
둘째는 자기 시아버지가 은행장이라고 시집가자 그만 두는 거에요. 그 허무함이라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었어요. 내가 비로서 하는 이야기지만, 남편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이 죄인 된 세상에서 아빠가 그렇게 기도하고 만들어 놨는데 시집 가더니만 신랑이 주는 카드 의지 해 가지고 그것 가지고 사는데 이것 뭔가 싶어요, 사돈이 원망스럽더라고, 그만 두게 하려면은 키운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해야 되는데 양해 한마디 없이 그만두게 해 버리더라고, 혹시 여러분들 농담이 아니고요 결혼을 했을 때에 그런 부분들을 인정 해 주어야 되요. 그래서 우리 아들 장가 가면은 제가 철저히 사돈의 수고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고 인정해서 하려고 해요.
본질적인 이야기 들었지요. 여자가 남자가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 해방 운동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여성의 고유의 그 가치를 전쟁 문화 타락한 문화 속에 남성 우월주의 문화 속에 있는 그 가치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거에요. 여자와 남자와 똑같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니섹스 성 소수 자들을 인정하는 것하고 다를 게 뭐가 있어요.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우리는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 속에서도 여러분들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그 마음 그게 예배에요. 사람을 기능적인 가치로 보지 않는 거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 만난 사람이에요. 우리 교회가 여러분들이 14년 동안 이것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는 것도 아셔야 되요.
그런 여권 운동만이 아니에요. 예배당도 보세요, 우리 한국은 500년 동안 유교의 사회였어요. 그래서 남녀 칠세 부동 석이었어요, 그럴 때 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없다고 해서 함께 이렇게 처음부터 이렇게 안 했어요. 기억 자 형태의 예배였어요. 여자가 들어오는 출입구 남자가 들어오는 출입구는 달랐어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변해야 되요. 점점 사각형의 예배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중간의 커튼 쳤어요. 제 어릴 때만해도 커튼 친 기억이 있어요, 시골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왼편은 여 반 이고 오른편은 남 반 이랬다고, 교회 와서 부부지간에 앉으면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참 안 좋게 봤다고, 요즘은 같이 앉는 것을 아름답게 봐요. 이런 것은 변하는 거에요.
7. 중세에 유럽에 가면은 예배당이 본당이 굉장히 화려하다. 그냥 예배당이 아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의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이 앉아 있는 빛나는 보좌라고 봤다. 본질을 해 나가면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루신다.
그러나 그 중에 변하지 않는 예배당은 뭔가, 여러분 중세에 유럽에 가면은 예배당이 본당이 굉장히 화려하지요. 그냥 예배당이 아니에요. 이 자리는 하나님의 의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이 앉아 있는 빛나는 보좌라고 봤어요. 그래서 성당에 들어오면은 앞으로 쫙 걸어오면은 내가 하나님의 의자 앞으로 걸어가는 느낌으로 와서 그분의 영광에 내가 굴복하는 거에요. 이런 정신은 없이 어떻게 하면은 편리와 뭐 화려함 이런 것만 해 버리니까 문제라고, 우리 교회도 참 현대적으로 지으면서도요 이 마음을 여러분들이 아시고 동참해야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우리 교회 다닌다고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고요, 지으면서 제일 고민이 뭐냐 하면은 세상에서 한 주간 동안 살다가 교회 들어오는데 성도들이 목사 만나러 오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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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의자 앞에 가서 그분의 영광의 광채를 보게 할까, 그 한 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들어오다 보면 타일 하얀 타일이 이렇게 줄이 되어 있어요. 그게 뭐 형상인가, 에서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을 가는 야곱이 루스 땅에 왔을 때 돌 벼게 베고 잘 때에 얼마나 피곤합니까 힘 없어서 도망자가 되었는데,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의 천상과 사닥다리로 연결이 되어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이 경쟁 사회 속에서 부모 잘 만나고 부모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별로 사회적인 힘이 없는 동백에 있는 주민들이 경쟁에 치어서 힘든 사람들이 교회의 예배당에 올 때에 그 사닥다리를 보면서 하나님의 의자 앞에 나아가서 위로 받기를 원하는 것.
그래서 우리 교회 이름이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교회 와서 만큼은 쉼을 얻도록 그래서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일하라 소리 안 하고, 교회를 채우자고 크게 하자 안 하고, 본질을 해 나가면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루는 거에요. 오늘도 여러분 이 일단락을 마칠 때 교회 예배당에 들어올 때마다 한 주간 그 경쟁 사회 속에서 치이고 치인 여러분들이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러 오는 예배당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런 예배당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예배당 형태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변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교회가 쉼과 회복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만 명이 모이든 십만 명이 모이든 열명이 모이든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형태와 제도는 변해도.
열명이 모일 때 교회 행사와 만 명이 모일 때 교회 행사는 변해도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 것은 변할 수가 없는 거에요.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벗는 것은 변할지라도 참된 예배 자가 되어서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변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유대교적이었는가 하면은 저녁 예배에서 오후 예배로 옮기는데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는지 몰라요. 그런 것은 싸워서는 안 되는 문제에요. 진짜 예배 자가 되는 문제, 방배동에 있을 때는 제가 새벽 기도 드리라고 그랬어요, 왜 출근이 편하거든요, 밥 먹고 가면 되는 것이었어요.
8.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출발한다는 것은 영원히 변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런 형태는 언제나 제도와 관습은 변할 수 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7일에 쉬었다,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했다는 말씀.
동백에는 사람 잡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옛날 한번 그랬어요, 새벽 기도 한번도 빠지지 않는 원호정 장로보고 새벽 기도 오지 마라고 그랬어요. 얼굴이 까맣게 간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어요, 왜 몇 시에 퇴근해요 하니까 11시 12시 한데, 씻고 하면 1시 2시 된데, 5시 5시반 잠 몇 시간 자요, 새벽 기도 농경 시대에 자연스러운 삶의 싸이클 이었어요. 우리가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출발한다는 것은 영원히 변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런 형태는 언제나 제도와 관습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요. 주일 성수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주일 성수 예배 자가 되는 것은요 11조의 삶은 기본이에요.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그러잖아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11조까지 드리면서도 의와 인과 신을 잃어버렸다고, 근채의 11조가 뭐냐 하면은 텃밭에 자기 먹으려고 채소 거둔 것까지 11조를 드리는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을 잃어버렸다고, 하나님과의 올바를 관계 속에서 나오는 헌금의 마인드는 없다 이런 말입니다. 더 복 받으려고, 자기가 원하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성취하려고 하는 종교 행위만 있다 이런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온전한 안식일을 지키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종교인이 만들어 낸 반대급부로 상급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주일 성수가 뭔지 알아야 되요.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7일에 쉬었어요,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했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하연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그것이 안식인데 인간에 의해서 안식이 깨어져 버린 거에요.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가, 하나님의 안식이 인간의 죄 성으로 인하여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깨어져서 하나님의 그 안식을 제도와 관습화된 유대교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을 통해서 깨어진 안식을 회복한 거에요. 어떻게 진짜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와 그 누구도 비교하거나 바꾸지 않는 존귀한 자로 여기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서 자기의 존재감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타락한 문화가 만들어 낸 것.
월급이 얼마냐에 따라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외형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 속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자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그 주일을 만드신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깨어진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주님의 부활의 주님을 우리는 안식일로 지키는 거에요. 이런 것도 알지 못하고, 구약에는 안식일이었는데 왜 기독교는 구약성경 대로 안 하고 주일을 지켜, 성경 봐라 그 어디에도 주일 성수라는 말이 어디 있나, 안식일 준수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거에요. 오늘도 여러분 여기에 보면은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그랬어요.
9. 예수 안에서 그 짐을 벗어 놓고, 예수님 때문에 그 누구도 빼앗기지 못하는 그 희락을 가지고 살아 가고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그 예수님의 복음을 어떻게 표현해 낼까?
목사님이 말씀했기 때문이 아니고, 오늘 설교를 여러분들이 진리의 속성을 가지고 어느 것이 유익하고 보편적이고 어느 것이 통하는 것인가, 알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해서 이제는 여러분들 스스로가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시대와 장소를 따라서 변해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 지으면서 신앙 생활 해 나가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의 삶 속에 정말 천국의 희락, 이 천국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예수님은 어느 시대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 변하지 않는 예수님 사랑이 여러분들 속에 흘러 넘쳐 남으로 말미암아 종교적인 짐을 지고 살아가다가 지옥 가는 사람이 아니고, 종교적인 무거운 짐을 지옥 갈까 봐 무서워 지는 사람도 아니고, 종교적인 무거운 짐을 남들에게 지배하는 복 받으려고 지고 가는 자도 아니고, 예수 안에서 그 짐을 벗어 놓고, 예수님 때문에 그 누구도 빼앗기지 못하는 그 희락을 가지고 살아 가시고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그 예수님의 복음을 어떻게 표현해 낼까, 하는 것을 당회가 고민해서,
우리시대 우리 여건에 그 복음이 잘 드러나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 감으로 말미암아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다가 주님 만날 때, 주님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다니지 안 했으면은 이 천국을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고 살아갔을 텐데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고백을 하면서 신앙 생활하도록 14년 동안 그냥 걸어 가보는 거에요. 오늘 못 누린 행복은요 평생 없어요.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그런 예배가 멸망이 가정한 곳에 목사가 앉지 않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하나님의 의자에 장로가 앉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우리 교회는 예배 때마다 주님이 여러분들 눈에서 보여 짐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 성이 만들어 낸 그 문화를 혁명적으로 바꾸며 가는 것이 아니라, 개혁해 나가는 그런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고린도 교회가 문벌 좋은 사람이 별로 없고, 가문 좋은 사람이 별로 없는 그런 교회가 도토리 키 재기하듯 자랑하는 교회를 통해서 자랑하려거든 주만을 자랑하라고 하는 말씀을 다시 한번 우리 가슴에 담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교인들, 훌륭한 가문과 좋은 대학 능력 있는 자, 그리 많지 않습니다. 힘있는 자들이 가지고 가고, 나머지 부스러기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드린 헌금 가지고 자녀 학원 하나 더 보내면은 나의 가난 물려주지 않을 텐데 하는 사단의 속삭임도 떨쳐 버리고, 이 헌금을 가지고 내 사업에 투자를 하면은 더 큰 사업이 될 때, 하나님께 한번 멋있게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악마의 속삭임도 떨쳐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 주님 열납해 주어서 이들의 삶이 신명기의 말씀대로 꾸지 않고 꾸어 주는 삶이 되게 하시고 땅에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충만케 되어서 그 풍요로움이 진짜 행복이 되는 그런 우리 영적인 가족이 되게 하시고, 주님 몸 된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져서 솔로몬 시대에 모든 백성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안연히 거함과 같이 포도 나무 되는 주님 품 안에서 안연히 거하는 복된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뿌려 진 씨앗이 열매 맺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농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계시해 주심으로 사대 성인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계시된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과 위로와 교통과 충만하심이 하나님 앞에 논쟁하지 않고, 진정 예배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희락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거듭난 자들이 모여서 천국이 이루어져 있는 그 평안을 맛보게 되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위에 주님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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