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엄청난 착각
창세기 4장 1-7절
2015년 11월 1일 주일 낮 예배
No. 234
이제 신명기 끝났습니다. 창세기 4장입니다 연말까지는 주제를 필요한 대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우리 7절까지인데 여러분들이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가,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리면서 말씀을 여러분들의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아멘
● 설교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제공하는 시간입니다. 주신 말씀을 가지고, Share 하며 나누는 것이 소화의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롬 10:10)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구원. 마음에 담긴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참 여러분 음식을 먹고 소화가 안되면은 더부룩하고, 건강하지도 못하고, 기분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도 같은 것 같아요. 여러분 설교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제공하는 시간입니다. 마치 엄마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가족을 위하여 밥을 하듯이 그런 부담이 설교자에게 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오늘도 새벽 3시 반에 또 일어나서 설교를 수정하고 수정을 하고 해서 오늘 또 섰는데 원래의 주보에 나간 제목은 위대한 착각이었지만 엄청난 착각으로 바꾼 겁니다. 그러면 설교를 소화하는 것이 뭔가? 여러분 이 설교를 다시 내가 묵상하고 Share하는 겁니다. 제 설교는 우리 차주희 권사님이 매주일 녹취를 해서 저에게 보냅니다.
가장 잘 소화하시는 거지요. 그래서 인사말 몇 마디에도 보면은 정말 설교를 잘 소화하셨구나, 또 얼굴의 모습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인 전체에게는 구역 예배 때, 여러분들이 주신말씀을 가지고, 쉐어하며 나누는 것이 소화의 시간입니다. 반듯이 여러분 이 말씀이 그냥 소화불량으로 남아서는 되지 않지 않습니까?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말씀이 잘 소화 되어져서 여러분들이 정말 건강하고, 복된 생애를 사는 그런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배에 관한 건데요, 예배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뭐 불교는 예불이라고 그러고, 다 천주교는 미사라고 그러고, 다 나름대로의 예배는 있습니다.
1. 진정한 예배: 헛된 예배라 함은 무가치하다는 것. 신앙 생활하면서 면목상 Sun day Christian 이 제일 불쌍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이라 했다. 신앙의 원형은 모세 오경 창, 출, 레, 민, 신 에서 출발한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말하는 바와 같이 헛된 예배 아무런 무가치한 헛되다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말이거든요, 그런 예배가 이방의 예배입니다. 우상 숭배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독교 안에서도, 헛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이 참 많은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기쁨이 넘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부유함을 경험을 해서 하나님 생각만 해도, 좋은 행복한 삶을 살려면은 진정한 예배자가 되야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배가 뭔지를 알아야 되거든요. 진정한 예배 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되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기쁨, 구원의 기쁨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냥 있다는 소리만 들은 것, 예수 믿으면 부유해 진다고 하는데 그 부유함이 뭔지도 몰라서, 하나님 하면은 행복하다고 하는데, 진짜 그런 게 있나? 참 불행한 거지요.
남들이 하지 않는 신앙 생활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절제하면서 면목상에 Sun day Christian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잘 몰랐다든지, 또 내가 그 동안에 몰라서 어린 신앙이었든지 어쨌든 간에 저는 진정한 예배 자가 되어서 예수 믿는 기쁨을 누리다가 정말 땅에서도 하나님의 부유함을 누리다가 그렇게도 맛보고 좋았든 천국에 입성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이라고 했는데, 환호성을 지르면서 입성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당연히 우리가 참된 예배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모든 신앙의 원형은 모세 오경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모세 오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또 신명기 이고요, 그 다음에 있는 성경들은 그것에 대한 주로 해설들이라 보면 됩니다.
오늘 예배의 시작이 창세기 4장에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입니다. 신학적 입장을 달리 한다는 것은 이 창세기에 있는 이 예배를 이 원형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잘 아시는 대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을 너무 교리적으로 보다 보니까,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피 흘림이 없는 제사는 사함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기 때문에 받지 아니하고,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제사였기 때문에 받았다.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지만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은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이라고 하는 이 제물의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민하[Minhah]라는 단어인데, 이 민하라는 제물은 레위기나 다른 성경에 보면은 감사제의 제물을 일컬어 민하라 합니다. 속죄 제물을 민하라 하지 안 해요. 그러면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감사의 제물은 피가 없는 제물을 드렸거든요, 거기에 끼어 맞추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렇게 너무 끼어 맞추다 보니까, 뭐라 하는가 하면은,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에 십자가만 말해야지 왜 정치 세상 이야기 하느냐 이런다고요. 또 우리가 구원은 보혈의 능력으로만 구원을 받지 다른 길은 없다. 맞는 이야기지마는 그 의미를 잘 알아야 되요. 입으로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을 정말 믿고 그렇게 사는 삶이 되야 되요. 또한 여러분 목사님이 여기에서 십자가만 이야기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구원의 기쁨과 행복이 있는가? 잘 생각해 보세요.
2.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구원을 얻은 것은 가인이 아니고 의로운 자 아벨이다. 가인은 제사를 드렸지마는 구원받지 못했고, 가인의 제사는 예배가 인간 중심의 예배라는 겁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야 됩니다.
그럼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 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라 그랬지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 다시 말하면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구원을 얻은 것은 가인이 아니고 아벨이다. 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은 가인은 제사를 드렸지마는 구원받지 못했고, 아벨은 제사를 드려서 구원받았다. 가인은 예배를 드렸지마는 하나님의 부유함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했지만, 아벨은 하나님의 부유함을 누리는 신앙 생활을 했다 이런 말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 예물이 말할 때,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그에게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다. 아벨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것은 그의 예물 때문이라고 말한다고 하면서, 그 다음의 이야기가 뭔가 하면은, 아벨은 피가 있는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지금도 말하느니라 라고 말을 해요.
그러면 이 차이가 뭔가? 가인은요 여러분 다시 창세기로 오면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가인보다 훨씬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아벨의 제사입니다. 왜냐하면은 홍수 이전에는 인간이 농사가 주 산업이었고요, 목축업은 부수 산업입니다. 왜냐하면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 목축업을 한 게 아니고, 옷을 마련하게 한 것이고, 그때의 옷은 지금과 같이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나 멋있는 것이나, 보온의 효과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내구성 때문에 무화과 잎을 가렸다가, 가죽옷으로 입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목축업은 인간의 삶의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니었어요. 정말 농산물 가지고 드렸는데, 가인은 받지 안 한 거에요. 그러면 그 예물과 그 다음에 히브리서에 말씀을 보면은 어떤 말이냐 하면은 가인은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자 안색이 변하여 분노했다 이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안색이 변함이 어찜이뇨? 분노함이 어찜이뇨? 이런다고요. 그러면 가인의 제사는 예배가 인간 중심의 예배라는 겁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야 됩니다. 모든 우상숭배의 예배는 인간 중심의 예배입니다. 여러분 인간 중심의 예배가 뭡니까? 인간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예배가 인간 중심의 예배입니다. 여러분 절에 가서 부처님에게 비는 사람이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고 빌지,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지요. 요즘 제가 불교입문서를 쭉 읽는데, 좀 더 나중에 깊은 이야기도 여러분들에게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 부르고 하나님 앞에 이자리에 와서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릴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 하려고 하는 것이나, 내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안 했을 때 분노하는 것은 가인의 제사입니다. 우리 그런 것 참 많이 있지요. 하나님 앞에 내가 이래 믿었는데, 하나님 내가 이래 기도했는데, 하나님 왜 내 기도 안 들어 줍니까? 간증 들어 보니까 누구는 나보다 훨씬 못한데도 기도 응답이 있다는데, 가인의 제사입니다. 구원의 기쁨도 없고, 하나님의 부유함을 누릴 수도 없는 신앙 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3.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은 결과가 아벨의 순교였다. 순교를 당하면서 하나님께 섭섭함도 분노하지도 안 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을 믿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 자. 죽음의 순간에도 하늘의 평화를 맛본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해도, 모든 것을 가진 부유함의 삶이 아벨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은 결과가 뭐냐 하면은 순교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다. 순교를 당하면서 분노하지 안 했습니다. 하나님께 섭섭하지 안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을 믿은 예배입니다. 죽는 인간의 가장 최악을 경험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하늘의 평화를 맛본 겁니다. 모든 것을 상실하는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와 같은 부유함의 삶이 아벨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이런 것에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 때에도 사람들은 인간 중심의 예배를 좋아합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각성을 위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지마는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기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인사를 하고, 건강 식품을 갔다 줘도, 부모의 유산을 노리는 거나 호주머니를 노리는 행위는 자기 중심적인 거지 결코 효가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 효는 치매 걸린 엄마도 엄마 내 곁에 있어만 줘. 엄마 때문에 행복한 그 사람이 효자이고, 그런 사람이 진정한 행복한 자이고 부유한 자 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이 아침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하나님의 부유함을 상속받기 위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면은 부자 부모님의 호주머니를 노리면서 아침 저녁 문안하는 것하고 뭐가 다르겠어요? 그게 가인의 인간 중심의 예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은 그러잖아요? 남은 치매 걸린 부모를 모시고 있으면은 빨리 죽지 왜 저렇게 저 집에는 저 엄마만 없으면은 행복한데 남입니다. 진짜 자녀는 엄마 치매 걸려도 괜찮아, 남들이 손가락질 해도 괜찮아. 엄마 때문에 내가 힘들어도 엄마가 존재하는 자체가 자기의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세상과 다른 평화고, 세상과 다른 구원이 우리 인간적인 삶 속에도 있는데, 영적인 삶에는 하물며 교회의 타락은 그거입니다. 세속화라는 것은 복음성가 부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야 할 정말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화하고, 전혀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그 구원의 은총과 행복을 세상의 것으로 바꾸어 버렸거든요.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사람들이 모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옛날에 한국 교회가 순수할 때에는 하나님에게 복 받은 것 가지고, 간증 안 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된 것을 말했다고요. 오늘도 여러분 우리 준비 찬송할 때,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후렴에 말하잖아요.
이것을 모르는 분은 여러분 정말 신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시작해 보세요.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의 차이는 가인은 하나님의 주머니를 노리는 인간적인 제사였다면은, 아벨은 하나님 때문에 행복했든 하나님 중심의 예배 자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우리들에게 그 예배 속에 천국을 감추어 놓은 겁니다. 설명으로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엄청난 착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드리는 이 예배전에 참석만 하면, 예전에 참석하면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출발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입술의 고백이 진짜의 예배가 아닙니다.
4. 바울이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되는 그 하나님을 알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겁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뭔가?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나면서 생기는 가치관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에 보면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라, 언제나 신앙의 고백이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삶을 강조했든 유대교의 최고봉에 있었든 바울이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되는 그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겁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뭔가?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인 예배니라 그럽니다. 여러분 영적인 예배라고 이야기 하니까 성령이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역사해서 여러분들이 뒤로 넘어지거나, 이빨이 금 이빨로 바뀌거나 여러분 희한한 종교적인 여러분 Fantasy에 경험되는 것을 영적인 예배라 하면 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 몸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사의 예배는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입니다. 가인의 예배와 같이 세상사는 사람들이 우상에게드리는 그러한 목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늘 이야기 하지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뭔가?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아닙니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나면서 생기는 가치관입니다. 그 가치관의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여러분 이 예배에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이 아멘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소리에 듣고 싶은 소리를 목사님이 해 주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교회의 신앙의 전통이라든지, 예전의 규범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와서 입술의 고백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이 내게서 멀어 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술의 고백의 예배를 드립니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이 내게서 멀어 졌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도 이사야의 말에 동의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동안에 구원의 즐거움이 있었습니까? 하나님만 생각해도 행복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은 누구 탓하지 말고, 내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였지마는 마음은 멀어져 있었구나. 생각하셔야 됩니다.
사탄은 우리를 그렇게 하기보다는 다른데에서 이유를 찼습니다. 어디에 가 봐라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 어디에 가서 기도해 봐라 기도의 응답이 있다. 이런 거로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부유함을 얻으려면은, 입술로 공경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멀어져 있는가를 보셔야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는 주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듣는 설교하고 좀 다르지요? 장로가 되어서 예배를 안 드려? 그래 가 하나님 복 받겠어? 성경 어디에도 이런 말없습니다.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열심히 경배하는 유대인을 향하여,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5.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자신을 봐야 된다. 우리가 부유해 지기를 바라는 하나님. 이사야는 그렇게 말합니다.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사랑의 하나님 앞에 내가 무너져야 된다.
어쩌면은 한국 교회가 얼마나 예배에 열심입니까?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상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자신을 봐야 됩니다. 여러분 어린 신앙과 성숙된 신앙이 뭡니까? 종교적인 규범에 잘 지키는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지만은 종교적인 규범을 가지고, 교인들 기 죽이기가 쉽습니다. 왜 목사의 삶은 기독교의 규범에 맞는 Setting 된 삶입니다. 여러분은 아니잖아요. 제가 언젠가 한번 이야기 했잖아요. 장로는 동창회 가서 술잔 안 받으면은 이상한 장로라 하지만, 목사는 동창회 가서 술잔 주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이라 합니다.
그런 것 때문에 갈등하려면 신학 가세요. ㅎ ㅎ 그런 게 아닙니다 여러분. 상하고 통회[痛悔]하는 심령입니다. 상하고 통회 [痛悔]한다니까 자기를 질책하는 것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보는 겁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2부 때는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시험 들까 봐, 그런데 전체를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려고 그래요. 우리 이상철 집사가 그만 둡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처음에는 그래야지 젊었는데, 그랬는데 그 다음에 이야기가 뭔가 하면 이상철 집사님이 10월 말 부로 제가 그만 두겠습니다. 하는데 기분이 상하더라고, 내가 할 일을 누군가가 오게 하시고 내가 그만 두어야지, 이래야지 어떻게 회사를 그만 두는 거와 같이 통보하느냐 가족인데, 그런데 제가요 참 이런 목사입니다.
이번 주에 예수 비전교회 권사하고 또 다른 목사하고 이래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권사가 어떤 분이냐 하면은 일찍이 이혼을 하고, 딸 하나를 키워서 딸이 프랑스 유학 가서 아주 첨단 학문을 해서 그곳에서 잘 자리잡고 오스트리아 남자하고 결혼을 해서 잘 사는데,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데 3주 오기로 했는데 일주일 동안 일본 둘이 갔다고 이러더라고, 제가 그 이야기를 탁 듣는데 뭐라고 했는가 하면은 이런 말 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 지킨다던데, 잘 키워 노니까 엄마 외롭네요, 그런데 그 권사님이 하는 말씀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아니에요 목사님 그 애들이 잘 사는 게 너무 행복해요. 남하고 엄마하고의 차이입니다.
엄마는 자기가 외롭고 힘든 것 보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이 행복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탁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에 탁 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아들 대열이가 관리 집사로 있다가 지가 좋은 자리로 일을 찾아서 간다면은 내가 뭐라 했겠나? 아빠 나 교회 괜찮아 네가 좋으면 좋아 네가 빨리 가 이랬을 거라 말입니다. 설교를 매일 가족이라고 하면서 가치의 판단과 선택에는요 그 것으로부터 멀어져 있더라고요. 그만큼 우리가 너무나 옛 세상에 익숙해 져 있는 거에요, 제가 회개 했습니다. 여러분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우리가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통념대로 살아가 버리잖아요. 말씀 앞에서 우리가 봐야 됩니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이 잘 되는 것 여러분들의 자녀라면은 자녀가 뭔가를 잘 되려고 나간다면은 그래 집 걱정하지마, 아버지 걱정하지마, 네가 잘 되는 게 좋아!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공동체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 하는 것 좋은 거에요. 우리 아버지 엄마가 치매 걸려도 아버지만 생각하고 엄마만 생각해도 행복한 것은 그런 아버지 엄마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능력 있는 하나님만 이야기 하잖아요. 여러분 제가 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는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부유해 지기를 바라는 하나님. 이사야는 그렇게 말합니다.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쉬운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와서 헌금하고, 봉사하고, 예배 드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내가 가정이 여기는 바다.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다.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 가인의 예배가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한다거나 입술로만 예수님 예수님 찾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천국 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아벨과 같이 예수님이 계시하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무너져야 됩니다. 저는 어릴 때에 가난한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안 했습니다. 철드는 게 뭡니까? 그런 아버지를 감사한 것.
6. 엄청난 착각은, 단순이 입술의 고백의 예배를 중요시 여긴다,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유함은 부유한 소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관리자가 되는 삶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이 삶이 하나님의 부유함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우리가 디모데도 그래 말합니다. 디모데에게 바울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데, 그런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럽니다. 엄청난 착각은 입술의 고백의 예배를 중요시 여깁니다. 화려한 찬송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찬송, 일주일 동안 억눌렸든 그 모든 것을 찬송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힘들게 살아왔는데 목사님 설교를 듣고 그래도 위로를 받아야지요 자기 중심의 예배입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종교적인 규범에 메이는 삶이 아닙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단순이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도 않고, 그러한 신앙 생활에 하나님의 부유함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오늘도 여러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섬기려면은 예수님이 계시하시는 하나님 알아야 되요. 그게 회복의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부유함은 소유의 증가가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부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호주머니를 넉넉하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부유함을 경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유함은 구원받은 자는 소유자가 아니고 관리자입니다. 하나님의 부유함은 부유한 소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관리자가 되는 삶입니다. 제가 여러분 이야기 하잖아요 그 뭐 이말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 듣더라고요, 은혜 받고 부자 하나님 두게 되면은요, 내 통장의 액수가 내 돈이다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통장에 영표가 늘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부유함을 얻는 거라 생각해요. 하나님의 부유함은요 내 통장의 돈을 건전한 소비의 즐거움입니다 이게 부자입니다. 저는 이번에 저축의 날도 수입의 80%를 저금하는 이런 사람 칭찬하고 상 주었다는데, 어느 시대인데요, 그러니까 나라 경제 안 되는 겁니다. 건전한 소비를 하는 사람에게 상 주어야 됩니다 이제는. 돈은 돌아야 되잖아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창고에 싸이는 돈은 썩은 돈이라고 지옥의 불쏘시게 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때문에 내 통장에 돈 들은 것 가지고 내 돈이라 생각하지 말고요, 내 통장에 있는 이 돈이 쓰여 질 때 내 돈입니다. 아멘 이렇게 살아야 되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집이 여러분들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가 있다고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웃기는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야 내 집이지요. 저는 제 이름으로 부동산 된 것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참 부유합니다. 얼마짜리 가지고 있는가 하면은요, 제가 신학교 갈 때마다 분당수서를 타고 가는데 복정 사거리 지나면 기분이 좋고 가슴이 벌렁벌렁 합니다. 왜냐하면은 거기에요 550m짜리 123층짜리 내 집 잘 올라가고 있어요. 거기 등기 되야 내 것입니까 내 것이라 생각하면 내 것이지요. 등기가 내 이름으로 안 되가 있으니까 너무나 좋아요. 왜냐 하면은요 다 관리해 주더라고, 청소 해주고, 모든 공과금 내주고, 저는 그런 것 없이 가끔 쓰고 싶을 때 그것 관리한 사람에게 입장료 조금 주고 들어가서 좀 누리면 됩니다.
입장료라 생각하지 안 해요, 내 건물 관리 한 값 내가 주는 거지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이 삶이 하나님의 부유함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그랬어요. 예수를 믿고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아야 되요. 이제는 더 이상 여러분들이 소유를 더하게 하는 하나님에게 속지 마세요. 예전에 어릴 때에 들었든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부자 아버지는 맨날 어디에 가면 지질이도 정말 값싼 것만 먹고 옷도 뭐 값싼 옷 입고, 걸어 다니고 하는데, 아들은 어디에 가면 일류만 먹고, 아 이래서 목사님이 물었대요, 어찌 아버지는 맨날 그리 부자면서 그래 살고 아들은 이러느냐 하니까, 그 부자가 한다는 소리가 내야 내가 벌어야 되지만은 우리 아들이야 내가 벌은 돈 가지고 써는데 그래 사는 게 맞지 않느냐고 그렇습니다.
7. 하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는 그런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유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들의 풍성한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하나님은 제가 보는 하나님은 지질한 하나님이셨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는 그런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유합니다, 왜 내 돈 떨어지면 하나님이 또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여러분들이 착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쌀을 독에 먼지가 변해서 쌀 되게 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도깨비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수고를 충분히 누리면서 사는 복, 세상사는 사람들과 같이 소유자가 아니고, 관리자의 삶을 살아서 나도 누리고 나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도 함께 누리는 이런 삶을 살려면은 여러분 먼지가 변하여 쌀 되게 하는 하나님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자본주의 시대를 살지만은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익숙한 사람들은 옛날 공산치하의 동래에 가면 길에 널린 게 돈으로 보입니다. 왜? 자본주의는 상품화하는데 그 누구보다 빠르거든요. 그러나 한가지 아셔야 됩니다. 자본주의가 진리가 아닙니다. 절대로 성경은 신명기를 하면서 제가 했지요. 상품화 되지 말아야 할 것이 교육입니다. 돈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의료가 상품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 상품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주하는 집이 결코 상품화되는 사회는 하나님의 사회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그래 봅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목사님 우리 교회는 교인의 친밀도가 낮습니다. 그게 안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동창회와 동호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 힘을 발휘해야 되는가? 여러분들의 자녀가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갈 때, 교회는 하나님 노릇 해 줘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번 것 쓰지요. 왜 우리 못씁니까? 내 쓰고 나면은 자녀 교육 뭐로 시킬까? 그게 기본적으로 보장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왜 돈 못씁니까? 몸이 아플 때 어떻게 하나 보장되면 쓸 수 있습니다. 저는 10년 목회하면서 돈이 없어서 우리 교인들 가운데 학교 못 보내는 것 내 귀에 드릴 때 외면하지 안 했고요.
돈이 없어서 병원 못 가는 것 외면하지 안 했고요, 여러분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 집 줘야 됩니다. 월셋방이라도 줘야 됩니다. 양식 떨어졌을 때 양식 줘야 됩니다. 그런 4가지만 기본적으로 된다면은 돈 모을 일 없잖아요. 그게 보장이 안 되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유로서 부유함을 누리다가 누려 보지도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 내가 뭐 하려고 살았나, 그러면서도 천국 가게 된 것 감사하다고, 그런 삶이 기독교인의 삶이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 그러려면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버리고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세요. 앞으로는 여러분들의 소유를 넉넉하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바를 잘 관리하고 사용을 통하여 넉넉해 하시는 그 하나님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버리고, 교회를 세우신 것을 알아서 정말 여러분들의 삶 속에 금년에도 제가 신명기에 보면은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이러한 고백이 있는 교회 되야 됩니다.
정말 교인들이 행복할까? 제가 가끔 물어 보면은 목사님 목사님에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런 사람 많아요. 제가 신학생 들에게 하는 이야기 있습니다, 왜 목사 되려고 하느냐? 3개 교구를 내 교구로 삼으려고, 한 사람이라도 교인을 행복하게 하려고 목회해야 된다고. 오늘도 여러분 참된 예배 자는 이런 교회가 되려면은 입술의 찬양이 아닙니다.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의 중심의 예배 자가 되어서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예배당 마당만 밟고 가는 그런 크리스챤이 아니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들의 풍성한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살다가 천국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참된 예배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예배 자가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는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람이 다시 살아도 살수 없는 인생인데,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될 텐데, 왜 우리가 사람답게 살지 못합니까? 지금 쓰면은 자녀 공부 시키지 못할까 봐, 지금 썼다가 병들었을 때에 큰일 당할 때에 죽을까 봐, 지금 이렇게 쓰다가 집에서 쫓겨났을 때 거리에 나앉을까 봐, 지금 이래 막 쓰다가 쌀 떨어졌을 때에 굶어 죽을까 봐,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긍휼이 여기사, 아버지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이 저 멀리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가 돈이 없어 자녀 공부 못할 때, 공부하게 하고, 돈이 없어서 병원 가지 못할 때 그래도 살려 놓고,
거리에 나앉을 때 월셋방이라도 주고, 굶어 죽기 직전에 쌀 팔아 주는 하나님 노릇 하는 교회를 만드는데 이 예물이 잘 사용 되어져서 정말 우리 교회는 부유한 자를 비난하지 않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지 않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는 거룩한 주님의 몸의 교회로 재림의 그날까지 존재하게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장차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여 주셔서 이러한 구원을 얻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이로다, 이런 신앙의 고백이 예배에 참여한 모든 자들 속에 있도록 마당만 밟는 예배 자가 되지 않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지 않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위탁하는 믿음의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부유함을 위해서 자신은 스스로 가난해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완악한 인간의 마음을 돌아오도록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문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 끝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 안에 거하시며, 사람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노릇 해 주기를 원하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예배당 마당만 밟고 가는 예배 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 “하”자만 들어도 행복하고, 눈물이 날만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이 자녀들이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신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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