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천국 같은 교회, 지옥 같은 교회
고린도전서 8: 1-3
2019년 3월 24일 주일 낮 예배
No. 411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아멘
○교회가 천국을 맛보는 교회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 고린도 지역은 아프로디테신전과 포세이돈신전 바다의 신 사랑의 여신의 신전이 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창조와 부활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해 주신 것을 받아 드려야 된다.
제가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고, 또 목회를 하는 이유는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천국을 맛보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많은 교인들이 볼 때에 종교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보면서 인생의 짐도 무거운데 종교적인 짐까지 지고 살아가는 그런 것을 보면서 진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무엇일까? 2천년 동안 그 혹독한 박해 가운데서도 존재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신학교에 갔고, 제가 답을 찾기는 교회는 뭔가? 여러분들이 죽어서 천국 가잖아요, 그 천국을 이 땅에서 맛보도록 천국의 모형으로 주신 거에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보면은 여전히 교회를 통하여 천국을 맛보기 보다는 종교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교인들이 종교적인 무거운 짐을 지면서 힘들게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참 많이 봅니다.
1. 교회의 Issue는 교회가 천국을 경험하는가 하지 못하는가가 이슈가 되어야 된다. 신학적으로 우상에게 바쳐 진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가 이슈가 되었다.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지, 아프로디테가 포세이돈이 무슨 신이야? 이런 신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이 제대로 있었다.
이런 것은 우리 한국만이 아니고, 초대 교회에서 고린도교회에 이런 데에서도 여전히 존재했든 거에요. 그래서 오늘도 이 말씀은 그런 교회가 천국을 맛보는 교회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큰 문제는 어떤 문제였는가 하면은 고린도 지역은 제가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지만은 아프로디테신전과 포세이돈신전 바다의 신 사랑의 여신의 신전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 신전에 드려 지는 제사가 만연 되어져 있고, 그런 것들이 고린도 교회의 모든 삶의 일상 속에 존재했든 거에요. 그런 곳에 교회가 세워 지니까 어떤 것이 문제가 되어졌는가 하면은 우상에게 바쳐 진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먹어서는 안 되느냐 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Issue 가 된 겁니다.
교회의 이슈는 교회가 천국을 경험하는가? 경험하지 못하는가가 Issue가 되어야 되는데, 신학적으로 우상에게 바쳐 진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먹지 말아야 되는가? 하는 게 Issue가 된 거에요. 왜 그랬는가? 고린도 교회에 고린도 지역의 모든 고기는 신전에 받쳐 지고 난 뒤에 시장에 내다 팔았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 고기를 쉽게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에 많은 유혹이 있었어요. 언제 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신전의 제사에 참여를 하고 나면은 나누어 주는 고기를 먹는다고요. 그래서 그 고기에 대한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고, 또 가난한 사람들은 여러분 세계사에서 배웠지만 신전에 제사를 드릴 때에는 대부분 길들을 중심으로 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요식업을 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 양복점을 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 그래서 그 제사의 참여하지 아니하면은 고기를 못 먹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의 생업에도 많은 지장이 왔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고기를 먹느냐 못 먹느냐 하는 것이 굉장한 중요한 문제였어요. 또 고린도 지역에는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언제나 시장에 파는 고기를 사서 먹을 수가 있었는데, 자기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자기 돈으로 고기를 살 때에는 이것이 신전에 받쳐 진 고기냐 아니냐를 구분해서 사지만은 다른 사람 집에 초대 받아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이것이 신전에 받쳐 진 고기인가? 아닌가? 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이 되어졌어요.
그래서 오늘 거기에 보면은 우리 교회에 지금 저 주제 성구에도 있지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라고, 고 앞에 보면은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이러는데,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은 이 말은 그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하는 믿음이 강한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주장을 바울이 인용한 겁니다. 어떤 지식인가? 4절 이하에 보면은 신이 어디 있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지, 아프로디테가 신이야? 나무 조각 쇠 덩어리지, 포세이돈신이 어디 있어, 이런 신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이 제대로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아무것도 아닌 그것에 바쳐 진 고기가 뭐 그렇게 부정 타는 거야? 고기는 먹는 고기야.
2. 하나님을 잘 알고, 네가 신학적 통찰력이 신학적으로 신론을 정확하게 안다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아직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만이 하나님을 아는 자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그 신학적 통찰력과 지식이 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도 돼. 라고 주장을 했든 거에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이런 신학적 통찰력이 좀 부족해서 그저 신에게 바쳐 진 고기를 먹으면 부정 타고, 하나님이 노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런 모습들이었어요. 이런 신학적 지식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대립했든 겁니다. 이런 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고기를 못 먹는 이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믿음을 먹는 자에게 정죄하고 판단하고 이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런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것들이 참 많이 있지요. 교리적이나 이런 것들이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을 해서, 교회가 교회다워 지지 못하는 부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중심이 뭐냐 하면은 그 모든 중심에는 무엇이 문제냐 하면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앎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른다는 거에요, 바울이 볼 때에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은, 네가 신학적 통찰력에 있어서 나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잘 알고, 신론을 정확하게 안다고 생각하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한다면은 아직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 한국에는 성경을 어느 나라보다 열심히 읽어요. 그래서 성경 통독도 돈 내고 하고, 1년에 몇 독 한 것도 자랑하고, 또 신학에서도 정통 신학 했다고 해서 뭐 교단 따지고 뭐 하고 하는데, 너희들이 그런 것을 가지고 사랑이 없으면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도 우리 교회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50년 믿었든지, 신학을 했든지, 성경을 천 독했든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면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뭐냐? 히브리어에 안다는 말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나, 그 하나님에 대해서 정보를 아는 것이나 이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있는 것이고, 또 이 말은 너무나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쉽게 이야기하면은 아는 것은 알게 되면은 상대방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어져요. 그래서 3절에 뭐라는 가 하면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느니라. 우리나라 번역에서 여러분들이 보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고 알아준다, 이런 의미로 받아 드리기가 쉬운데,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을 정말로 알게 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만이 하나님을 아는 자다 이런 말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정말 신앙 생활하면서 천국을 맛보고 우리 교회가 천국을 맛보는 그런 교회가 되려면은 여러분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되요. 정말 하나님을 알아서.
3. 기독교에서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의 싸움이 기독교적 싸움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적으로 살아가면은 상대방을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된다. 히브리적으로 성경을 보면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알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다. 전지 하다는 히브리적으로 안다 수용한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의 얼굴의 인식,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이나,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가?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이런 정보를 아는 것이 아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상대방을 아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가? 정말 알게 되면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요. 헬라적으로 알게 되면은 상대방을 정죄하게 되어져요. 그래서 기독교에서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의 싸움이 기독교적 싸움이라는 것을 아셔야 되요. 이 말이 참 중요한데,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알아듣기 쉽도록 이야기한다면은 이런 거에요. 여러분들이 부부지간에도 옛날에 연애하고 이럴 때에는 참 서로 사랑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이러다가, 결혼을 해서 서로의 이제 삶의 경험이 많아서 상대방을 많이 헬라적으로 알게 되는 순간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시작해요. 그것은 아는 게 아니에요.
히브리적으로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은 상대방을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어져 있어요. 부모와 자식 지간에도 마찬가지에요. 어릴 때에 자식을 여러분들이 대할 때에는 참 사랑의 대상으로 봤다가, 얘가 점점 커 가면서 아이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게 되어져요. 어릴 때에는 얘가 공부를 잘할 아이인지, 못할 아이인지도 몰랐다가 학교 들어가서 보니까, 공부를 못하는 정보를 알게 되어져요. 그때부터 이 아이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갈등이 생기는 거에요. 이런 것들은 다 헬라적인 삶을 살아서 그런 거에요. 히브리적으로 살면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으면은 알면 알수록 사랑의 대상이 되어져요.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한가지 아셔야 되는 것이, 제가 인간이 만든 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책 속에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는 편이 있지요. 그저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에요, 쉬운 책인 것 같지만은 여러분들의 가치관이 될 때까지 읽으셔야 되요 지금. 전지 하다는 것은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헬라적으로 아는 거에요. 히브리적으로 전지 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판단과 정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헬라적으로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이에요. 우리 한국에 그런 사람 많지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은 다윗을 아브라함을 누구를 다 판단과 정죄에 대상으로 삼아서 어떤 사람은 천국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 보내고, 어떤 사람은 복주고, 어떤 사람은 벌주고, 히브리적으로 성경을 보면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알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세요.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에요. 저는 성경을 보면서 왜 하나님이 좋은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나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고, 나를 받아 드리세요. 그 하나님을 믿으셔야 되요. 이게 설교에요. 판단하고 정죄하는 하나님은 설교가 아니고, 강의에요 신학교 강의에요. 여러분 보세요, 전지[全知] 하다는 히브리적인 것은 안다는 것은 수용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의 자녀들 어릴 때에 다 알잖아요. 얘가 왜 우는지도 알아요. 그때는 다 용서가 되고 수용이 되어요. 사춘기가 되어서 자아 의식이 생기면서 저거는 내 배속에서 났는데, 저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순간 무엇이 생기는가 하면은 갈등이 생겨요. 모르면서 부모는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여러분 교회가 천국이 되려면은 전도를 많이 해서 커지고 교회가 무얼 많이 하고 뭐 문화 행사 많이 하고 이런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교회가 천국이 되려면은 이해가 있어야 되요. 오해라는 것이 뭐에요?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부분적으로 알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4. 우리는 전지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식의 제한이 있고, 사랑의 제한이 있는 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받아 드려야 되요. 그분의 인자와 선하심을 받아 드려야 된다. 자기 계시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이시다.
신앙의 실족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지극히 한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알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안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렇게 했어 라고 실족하는 거에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보고 있고 자기가 경험한 것은 부분인데, 나 그 사람 다 안데,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하나님을 성경은, 자기 계시라고 그래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계시 해주신 하나님을 아셔야 되요.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도 아니고요, 간증 자가 말하는 하나님도 아니고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이 자기를 말하는 그것을 받아 드려야 되는데, 자기가 경험한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이라 이야기 해 버린다고요,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이라 이야기 해 버린다고요. 오해가 생기는 거에요.
교회에 그런 게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두 가지, 앞에 이런 것 설명하려면 여러분들이 머리가 아프고 이러니까, 요정도 이해하라고요. 우리는 전지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식의 제한이 있고, 사랑의 제한이 있는 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받아 드려야 되요. 그분의 인자와 선하심을 받아 드려야 되요. 한 하나님을 받아 드리고 하나님을 믿고, 인자와 선하심을 인정 하는 말 한마디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었지요. 내 삶 속에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여러분 이래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과 관계가 나빠질 수가 없어요. 시험들 일이 없어요.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교통 사고 나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 생각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교통 사고 안 일으킨다고 하는 간증을 잘못들은 거에요. 자기 계시의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데, 자기 계시의 하나님이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그것을 쉼과 회복이 있는 잔치에서 제가 설명을 해 드릴 거에요. 내가 남들보다 제대로 살았는데, 원치 않는 병에 걸렸어, 인자와 선하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하지 안 해요.
5. 하나님을 아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자다. 하나님을 사랑해야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왜 사랑해야 되는가? 정말 사랑하게 되면은 가치가 부여 된다. 가치가 부여 되어져야 만이 행복 해진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저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아 가 아니고요,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이 사람이 하나님 아는 거에요. 신학 박사 열 개 가지고 있고, 성경 천 독 해서 있는 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사람은 자기 식으로 사람을 이해해 버려요. 왜 엄마는 좋은가? 엄마는 자기 식으로 나를 이해하지 안 해요. 내가 보여 준 만큼만 알아요 엄마는. 낳은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사람을 그 사람을 아는 사람. 어떤 사람인가? 내가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게 신앙인의 인간 관계에요.
우리 우장로님이 앞에 앉아 있는데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해, 그럴 때에 헬라적으로 알면은 우장로 그럴 수 있어? 자기 지식적 한계를 가지고 판단하는 거에요. 히브리적으로 알게 되면은 우리 장로님이 그럴 때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꺼야. 여기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교회 다니면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천국을 경험 못한다면은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는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부부지간에 왜 싸워요? 남편이 열심히 일하다가 저녁에 와서 보니까 설거지도 안 해 놓고 청소도 안 해 놨어, 당신 뭐 했느냐고,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같이 이야기해 버려요. 그러면 물어야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내가 이래서 못했다고, 그럴 때 또 자기 식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받아 드려야 되요.
오늘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그런 말씀이에요. 이 말씀 암송해서 아는 게 아니라 이 말입니다. 알게 되면 사랑해요.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어져요. 그런데 사람들은 정보로 알게 되면은 판단과 정죄가 일어나요. 그게 헬라적 앎이에요. 우리가 전부 성경 공부를 헬라적으로 공부를 해 버리니까 교회 다녀서 교회 옛 법을 잘 알고 전통을 잘 알고, 성경을 많이 알면 알수록 판단과 정죄가 나와요. 저는요 성경 다 몰라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저에게 이럴 때 말하세요, 저는 우리 교회만이 아니고 목회를 해 오면서 내가 의식적으로 부지중에 말했는지는 몰라도 의식적으로 장로가 되어서 그럴 수 있느냐, 한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 권사가 뭐 그래, 말 한적 없어요.
우리 장로님이 그럴 때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우리 권사님이 그럴 때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했지요. 여러분들이 저에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목사님이 그러실 때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이 사람이 나를 아는 사람이에요. 내가 우리 목사님 20년 지내봐서 아는데, 그래서 그래, 모르는 거에요.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을 헬라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판단과 정죄가 있었어요. 그 교회에 하나님을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정말 알게 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나님을 사랑해야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지금 그런 말이에요. 왜 우리가 그래야 되는가? 왜 사랑해야 되는가? 정말 사랑하게 되면은요 가치가 부여 되어져요. 가치가 부여 되어져야만이 행복 해져요.
이런 놀라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알지도 못하고 전부 헬라적으로 지식 공부만 해 버리니까, 교회가 얼마나 판단과 정죄가 난무 한지 몰라요. 옛날의 목사님들은 박사 학위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옛날 목회는 교회가 좋았어요. 유학 갔다 오고 박사 학위가 있는 목사님들 설교 멋지게 했는데 그 설교를 가지고 정죄의 수단으로 삼아요. 왜 헬라적으로 공부해 왔거든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부모님 앞에 가면은 여러분들이 부모님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부모님 앞에 서면은 행복한 거에요. 상대방을 사랑하고 여러분들이 정말 상대방 때문에 내가 행복 해지려면은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의 가치가 부여 되어져요.
6. 하나님의 존재는 창조와 부활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계시해 주셨는가? 창조와 부활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 이것 받아 드려야 되는데, 이것은 믿기 싫어한다.
어제 음악회를 하는데 최고의 음악회라는 찬사가 아침에 저한테 막 들려요. 제가 어제 몸이 다운되어서 5시부터 그냥 못 일어났거든요, 아침 6시에 일어났어요. 그래서 참 궁금했는데, 제가 무슨 생각했는지 아세요, 아 우리 교인들이 김현호 선생을 사랑하고, 김현호 선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출연자들을 사랑했구나, 그러니까 최고의 연주로 보이는 거에요. 또 이야기 들으니까 김현호 선생이 아침에 뭐라는 가 하면은 다른데 가는 것보다 우리 교회에서 너무나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왔다는 거에요. 그 사람들이 우리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최고의 연주가 가능했든 거에요. 제가 성가대 늘 하는 이야기 있잖아요, 잘하려 하지 마라고, 잘하려면 왜 여기서 들어요 KBS 교향악단이 하는 것을 듣지요. 사랑의 마음으로 보라고, 라고 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어요.
이 세상의 최고의 연주가 누구에요, 몰라요 손자가 하는 노래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연주는 너무나 아름답고 지상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공연으로 보인다고, 관계가 없는 사람은 소음이래, 똑 같은 사실을 가지고도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가치는 너무나 다르고 행복은 너무나 달라지는 거에요. 저는 열차를 타고 이러면은 아이들이 이렇게 시끄럽게 해요, 그러면 어떤 분은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이야기해요, 휴대폰 좀 밖에서 하게 해주고, 얘들 좀 다스려 달라고, 저도 있으면은 뒤쪽에 아이 있으면은 오늘 참 힘들겠다 이러는데, 할아버지 엄마는요 그 소음이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것 같아. 예수 믿고 변화가 그런 거에요.
그러려면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해 주신 것을 믿어야 되요. 그런데 전부 한국 교회가 왜 판단과 정죄가 난무하는가 하면은 전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이야기해 버린다고, 그게 유대교에요. 잠깐 맛만 보여 드리면은 예수님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야 된다고요, 방언해서 안다고요 그것은 자기 경험이에요. 기도 나는 이렇게 기도 응답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자기 경험이에요. 하나님의 존재는 창조와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계시해 주셨는가, 창조와 부활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해 주신 거에요. 이것 받아 드려야 되는데, 이것은 믿기 싫거든요.
상대방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상대방이 내가 이렇다고 이야기하면은 그것 받아 드리지 않고, 아예 들을 생각도 안 하지요. 자기가 경험한 것 가지고 안다고 생각해 버린다고요. 창조가 왜 하나님의 계시인가? 오늘부터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들거든, 창조물을 봐요, 이게 존재한다는 것은 이게 만든 게 있다는 거에요. 우리 몸이 요즘 공복에도 당료가 160 안 내려가서 내가 고민인데 지금, 약을 좀 더 써야 될 것 같아, 당료라는 게 뭡니까 여러분, 우리 실핏줄에 피가 끈적끈적 해서 가지 못해 가지고, 손끝이나 이 눈 실핏줄이 영양 공급이 안 되어서 그런 것이잖아요. 우리는 몸의 실핏줄이 지구 한 바퀴 반을 돈데, 그 피가 한 바퀴 반을 돌려면은 얼마나 센 압력을 가해야 되겠어요? 센 압력 가하면 핏줄 터지겠지요.
7. 창조론이 과학이 아닌 것은 경험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부활 확실히 부활하신 것이다. 아카페 라는 단어에 십자가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의 개념을 만든 것이다. 이런 신학적 통찰력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심장에 쿵쾅 하는 소리 하나가 피를 온몸을 돌게 해요. 하나님이 신묘막측한 지혜잖아요. 손톱을 깎을 때마다 아이구 하나님이 손톱 좀 안 길게 했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안 길게 했다면 이 손톱 달아 지고 없을 거에요. 머리 깎을 때마다 귀찮아 죽겠는데, 머리는 안 길게 했으면은 어떻게 되겠어요, 지금쯤은 전부 뭐 ㅎ ㅎ ㅎ 하나님은 길어야 할 것은 길게 하고, 길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은 안 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지혜잖아요.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요 소생이 아니에요, 무생물이 생물이 된 거에요. 이게 생명을 가지려면은 우주에 존재하는 것에 불가능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게 살아 움직이는 것하고 같은 거에요.
과학이라는 것은 경험과 증명이 있어야 되요. 창조론이 과학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경험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사실이 아닌 게 아니고.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꾸만 논쟁하는 거에요. 창조는 과학이 아니에요. 왜 경험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과학이 아니라고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부활이에요. 예수님은 역사에서 확실히 부활하신 거에요.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 준 거에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존재한다 믿는 거에요. 그 하나님을 내가 어떤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거에요. 존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어떻게 계시해 주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해 주신 분이에요.
그 십자가가 뭐에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에게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 행위,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십자가는 아카페다. 인간에게 없는 행동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아카페 라는 단어에 십자가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의 개념을 만든 것이다. 이런 신학적 통찰력이 있어야 되요. 여러분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은 여러분 자기의 존재감 없어져요. 어릴 때에 부모님에게 낳았으면 책임져야지, 자아 의식이 있을 때에 부모님 아는 게 아니잖아요. 자식 되어 준 것이 벼슬로 생각해요. 진짜로 부모를 알게 되면은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생애를 희생하는 그 부모 때문에 그 은혜를 알게 될 때에 내가 행복 해지는 거에요.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에요.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를 데리고 왔으면 책임져야지, 판단과 정죄가 시작이 되어져요. 서로간의 구제받을 수 없는 자를 아내 삼아 주고, 남편 삼아 준 것에 대해서 감사 그게 은혜에요. 왜 교회 생활에 감사가 없는가, 교회 구조가 다 무너져 버렸어요. 이제 교회 다녀 줘, 교회 다니는 것이 무슨 벼슬하는 거에요. 목사님 내가 교회 다녀 주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교회 생활이 은혜가 없는 거에요. 내가 예수 믿을 수 없는 자를 믿게 하신 하나님, 내가 이 교회에 다닐 자격이 없는데 교인으로 받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때부터 내가 감사하게 되는 거에요. 그 은혜 속에 가치가 부여되는 겁니다.
8.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가치 없는 자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자기 한계를 느껴서 모든 것을 수용함으로 판단과 정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면 사람의 가치가 존귀하게 된다.
아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거에요. 존경의 대상을 가지는 거에요.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가치 없는 자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고 사랑하게 되어져요. 자녀를 100% 아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요. 아내를 100% 아는 자는 아내를 사랑해요. 자기의 지식으로 아는 순간 판단의 대상이 되어져요. 오늘도 여러분 교회가 얼마나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알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시험 더는 사람 많고, 사람을 자기가 보는 사람이 다인 줄 알고, 자기가 경험한 것이 다인 줄 알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과 정죄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교회가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나를 발견할 때에 내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은혜에요. 나는 하나님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생각하고, 나는 여러분들을 모르기 때문에 장로가 권사가 되어 가지고 뭐 그래 안 해요. 우리 장로님이 그럴 때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여기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천국이.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 잘하려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언제나 자기 한계를 느껴서 모든 것을 수용함으로 말미암아, 좀 판단과 정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가 존귀해 지는 가치, 관계는 가치를 만들어 내요.
저는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가장 귀한가?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예배 드리는 사람이에요. 우리 교회 뭐 교회를 지어 주었더라도 나가면 끝인 거지요. 그런데 나간 사람보고 자꾸 이해 안 되요. 설교 제대로 들으세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시는 주님, 저는 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가 하면은 하나님은 나의 한계까지 아세요. 사람들은 나의 한계를 인정 안 하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왜 쟤 저래 이런다고, 오늘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충만 해져서 우리 교회가 천국이라도 맛보는 그런 교회가 되어져서 나 예수 잘 믿었지, 나 같은 자를 예수 믿게 하신 성령님의 은혜가 예배 때마다 충만 해지는 그런 복된 신앙 생활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드림이 드림이 되지 않는 헌금이 되지 않도록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과부의 두렙돈과 같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가치를 부여하지 아니할지라도,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님 앞에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예물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이 예물이 우리 모두를 평균케 하고 부유케 하는 아름다운 은혜의 수단이 되어져서 세상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극한적인 대립으로 치닫는 세상 속에, 있는 자를 존경하는 교회 되게 하시고, 없는 자가 무시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게하여 주심을 감사 드리오며, 이런 교회를 선물로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신학적 통찰력이 주는 자유를 누리면서 신학적 통찰력이 없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아니하고, 실족해 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진짜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서 자유의 한계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무한하신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는 자이기에 우리의 외모와 외형을 가지고 가치판단 하지 않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기에 이 세상의 74억 가운데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하지 아니하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을 받아 드림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인간 사회에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내 속에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겠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상대방의 행동을 보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죄인의 생각을 함으로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부모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봄으로 말미암아,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땅에서도 맛보며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땅에서 맛보도록 선물로 주신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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