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의 강단

다시 살아온 아들 (눅 15:11-24)

차주희 2014. 2. 28. 11:58

 

 

 

 <소명의 강단>

 

 

다시 살아온 아들 (눅 15:11-24)

 

  오늘 주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받는 것인데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을 미리 요구했습니다. 아버지는 두말없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아들은 유산을 모두 처분한 돈을 갖고 먼 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작은 아들은 불효막심한 아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 아버지의 간섭이 싫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이 귀찮게만 여겼습니다. 현대인의 위험은 여기 있습니다. 부모와 교사의 훈계도 교회의 간섭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방종이라고 합니다. 이 아들은 방종이 자 유로 착각했습니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 주님께 속해 있느냐 죄에 속해 있느냐의 차이 뿐입니다. 주님께 속해 있으면 주님 자녀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것이요, 죄에 속해 있으면 죄의 종이 되어 불안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셋째, 돈만 있으면 된다는 착각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청년은 모든 것을 다 상실했습니다. 허랑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즉, 무질서한 생활을 했습니다. 돈은 올바른 방법으로 땀 흘려 벌어야 하고 올바르게 보관할 줄을 알아 야 하며 가치 있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자기 돈을 쓸 줄만 알았습니다. 결국 허랑방탕한 삶이 됐습니다. 결국은 인생을 낭비하고 남의 머슴으로 전락하여 인격마저 상실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추하게 여기는 돼지 치는 인부가 됐으니 그의 선민의식마저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무질서한 생활은 모든 것을 상실하게 합니다.

 

  넷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죽게 됐을 때야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 했습니다.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앞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들이 아닌 품 군의 하나로 겸손하게 아버지 앞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상거가 먼데도 뛰어나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겼습니다. 제일 좋은 옷은 아들로서 영광을 회복한 것을 말하며 가락지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신을 신긴 것은 아들로 인정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노예나 종은 신을 신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과 아들만이 신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죄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와 같이 주님 떠나 방황하는 우리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나서서 주님께로 인도 하여야 하겠습니다.

 

  결론: 아버지께로 돌아온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입니다.

 

(2014년 3월 2일(주일) 청주소명교회 진범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