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웅담임목사주일설교원고

先生(스승)과 恩師(은사)(고린도전서 4:14-21)주일 예배 설교문

차주희 2018. 9. 21. 12:24

 

 

 

 

先生(스승)恩師(은사)

고린도전서4: 14-21

2018 9 16일 주일 낮 예배

                                                                                                                                        No. 384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7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어떤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아멘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있는가 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있다. 바울의 신앙을 가져야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복된 교회가 된다. 예수 믿고 성령 받으면은 선생이 아니라 스승이 되고, 은사가 되는 것이다. 성숙 되어지면은 판단하지 않고 점점 이해하게 된다.

 

오늘은 우리 찬양 예배가 있어서 설교를 제가 5분 설교를 하려고 1 2부 설교를 오늘 분문의 의해서 설교를 했는데 녹화 녹음이 하나도 안 되었대요, ㅎ ㅎ ㅎ 그러나 여러분들이 다 알면은 길게도 할 수 있고 짧게도 할 수 있지만은 핵심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가 핵심적인 부분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해요.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있는가 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있어요. 바울 사도와 같은 신앙이 있는가 하면은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신앙이 있어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바울의 신앙을 가져야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복된 교회가 됩니다.

 

1. 스승은 어떤 사람인가?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며 가르치는 자이다. 사도바울은 스승으로서 은사로서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했든 것이다. 스승으로서 가르치는 자는 내가 가르쳐도 전혀 효과가 없어도 절대로 가르치는 부모의 본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많은 성도들은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그 차이가 뭐냐 면은 오늘 설교 제목에 제가 선생과 은사 이래 놨는데 선생이라는 말을 제가 이렇게 찾아 보니까 원래 우리나라 말에는 스승이었대요, 그러다가 일제 시대 때부터 선생으로 바뀌었는데 저는 그 스승의 말 속에는 은사라는 의미가 포함 되어져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선생과 스승이나 은사의 차이는 뭔가, 선생은 그저 가르치는 자입니다. 은사는 어떤 사람인가, 스승은 어떤 사람인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며 가르치는 자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의 여러 가지 교권의 문제는 여러분 뭐 교육부 장관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선생의 상이 선생으로 되어서는 안 되고, 스승이 되어야 되고, 은사가 되어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해요.

 

여러분들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사람은 다 가르치려고 해요, 목사도 가르치려고 하고, 여러분들도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 중에 선생으로서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많으면은 힘이 듭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고, 사도바울은 스승으로서 은사로서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했든 거에요. 그러면 그 차이는 뭐냐 그래서 오늘 바울은 뭔가 하면은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다, 내가 너희들의 영적인 아버지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영적인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 교회의 안상홍 같은 그런 아버지가 아니에요. 정말 우리 이 지상에 존재하는 부모님의 마음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스승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은 부모님으로서의 가르치는 것과 선생으로서의 가르치는 차이는 저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은 선생은 저의가 있습니다 가르칠 때에, 내가 가르친 대로 아이들이 잘 알아듣고 성장해야 된다는 저의가 있어요. 부모는 그런 저의가 없이 가르칩니다. 그래서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자는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효과가 없으면은 혼을 내고, 포기를 합니다. 그러나 부모 스승으로서 가르치는 자는요 내가 가르쳐도 전혀 효과가 없어도 절대로 가르치는 부모의 본분을 포기하지 안 해요. 저는 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자들은 그 저의만이 아니고, 정말 그 가르치는 자는 처지를 생각하지 안 해요.

 

그러나 부모는 자기가 가르치는 자의 처지를 생각해요. 여러분 선생님들이 너 왜 공부를 못해, 공부 못하는 아이를 질책하고 공부 안 해 미워하는 것은 선생으로 가르치는 겁니다. 부모는 내 아이가 가르치는데 그 아이의 처지를 생각해요. 학교에서 선생님도 참된 스승은요 자기가 가르치지만은 공부 못하는 아이의 처지를 이해해서 그 아이를 좀더 알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바로 그런 것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진짜 스승은 사랑하는 자이지,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보면은 전부 가르치려고 그래요. 저는 목사이지만은 여러분들에게도 말씀을 종종 드리지요, 저는 정말 부모의 마음으로 교인들을 대하려고 많이 생각을 해요.

 

2. 부모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고 사랑하는 자다. 스승과 은사는 학생들을 사랑하는 자이지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바울은 나의 행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길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내가 신앙 생활하는 여정을 보고 본받으라는 것. 행사에는 어떤 사건이나 말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말을 한다.

 

부모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고 사랑하는 자입니다. 스승이나 은사는 학생들을 사랑하는 자이지 가르치는 자가 아니에요. 그렇게 되려면은 내가 가르치는 아이의 처지도 생각하고, 또 어떤 저의 도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죄인들이기 때문에 자꾸만 변질이 되어져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지만은 정말 우리 모두는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습니까, 태어난 지 열 달 만에, 무슨 일을 했어요, 열 달 만에 지 힘으로 일어섰어요, 그것을 보면서 부모들은 굉장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아이가 오늘 이제 일어서서 걸어, 그랬든 부모가 뛰어 다니는데도 감동도 없고, 저놈이 왜 저래 사람 구실 못한다고, 아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타락한 겁니다.

 

내 아이에 대해서 어떤 저의를 가지게 된 것이고, 내 아이에 대해서 사랑보다는 그 아이의 처지 보다는 자기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왜 열 달 만에 일어서서 한걸음 두 걸음 뗄 떼에 탄성을 부릅니까, 열 달 동안 이 아이에게 어떤 저의를 가지지도 않고 길렀어요, 그리고 이 아이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그 다리에 힘을 줘서 걷는 그 연약한 처지를 이해하니까 열 달 만에 걷는 것이 부모에게 그렇게 환희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커 가면서 부모에게는 아이에 대한 저의가 생겨요. 그리고 아이의 처지보다 저의가 생기면서 자기의 입장에서 아이를 보기를 시작합니다. 뛰어다닌 것이 감동이 안 됩니다.

 

공부 못하는 것이 늘 짐입니다. 여러분 이런 변화가 있어요, 오늘도 여러분 참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사도에 대해서도 가르치려고 그랬어요.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 안에서 일만 스승은 많으나 아비는 많지 않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참 힘든 것이 교인들이 전부 가르치려고 그래요, 목사도 가르치려고 그러고, 교회는 이래서 안 된다고 그러고, 목사님은 설교를 왜 그렇게 하느냐고, 여러분들도 저를 볼 때에 아비의 눈으로 봐야 됩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을 볼 때에 부모의 눈으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차라고 그래요.

 

오늘 언제나 가르치려고 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그러면서 나의 길 나의 행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나의 행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나의 행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길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신앙 생활하는 여정을 보라는 거에요, 그것을 본받으라는 거에요. 자기의 신앙의 여정은 자기의 종교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그려 내는 거라는 거에요. 여러분들의 신앙의 여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려 내는 것이지, 종교 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려 내는 것은 부모의 눈으로 보는 겁니다. 오늘 이 찬양의 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행사할 때 그 행사에는 어떤 사건이나 말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말을 합니다. 그 가치관이 그 사람의 삶에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본어게인 된다는 것 거듭난다는 것은 가치관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이전에 보든 그 시각이 아니고,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겁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 주심과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성령으로 인하여 교회가 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가족의 눈으로 보라, 그것이 아버지의 눈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찬양 예배를 드립니다. 이 찬양 예배를 드릴 때에 여러분들이 선생으로 보는 사람들은 왜 찬양을 저래 밖에 못해, 왜 이런 찬양을 해, 왜 시끄러워.

 

3. 부모로서 스승으로서 그것을 바라볼 때, 어떤 좋은 소리를 들을 때, 영광 뒤에 있는 그림자가 보여야 부모이다. 예수 믿고 성령 받으면은 선생이 아니라, 스승이 되고 은사가 되는 것이다.

 

다른 교회 갔더니만 이것 보다 훨씬 열광적인데 왜 그냥 자기네들끼리만 찬양해, 전부 선생의 눈으로 보는 겁니다. 부모의 눈으로 보면은요, 이 아이들이 마치 열 달짜리가 일어나서 걸을 때에 환호하는 감정이 여러분들 속에 생깁니다 이 찬양을 보면서도. 똑 같이 앉았으면서도 여러분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다른 생각들이 존재했으리라 생각해요. 정열이가 여기 서서 찬양을 드릴 때에 정열이의 삶을 아는 나는 감동입니다. 나보다 정열이를 더 잘아는 엄마는 아마 눈물이 그 속에 흘렀으리라 생각해요. 이제 일어나서 걷는 것 같은 환호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눈으로 바라볼 때에 정말 교회가 교회 다와 지는 것이고 세상과 다르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 말씀이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지난 주일도 말씀을 드렸지만은 우리 모두는 스승의 눈으로 볼 것을 선생의 눈으로 보려 합니다. 남의 눈으로 보는 겁니다. 남의 자식 기르는 겁니다. 내 자식 기르듯이 기르는 것이 스승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번 더 반복하지만은 우리 김호근 집사가 광진 경창서 7백 몇 십 명 중에 함께 하고 싶은 자 1위로 뽑혔다고요, 남은 대단해 입니다, 선생으로서의 목사가 그것을 바라볼 때에 다른 목사에게 우리 교회는 내 설교 듣고 이런 사람도 있어, 선생입니다. 부모로서 스승으로서 그것을 바라볼 때에 저는 그 소리를 들을 때에 우리 김호근 집사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여러분 영광 뒤에 있는 그림자가 보여야 부모입니다.

                     

오늘 찬양하는 이 아이들이 이곳에 찬양 하지만은 이 찬양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들이 수고한 그 수고의 그림자를 못 보니까 판단하는 겁니다. 부모는 보거든요 제가 또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지요, 반복에 대해서는 다음에 내가 또 언제 할 이야기 있지만, 제가 대학교회에서 신학박사 20명 입니다, 전도사 40명 입니다, 총장 3명 있었어요, 장관2명 있었습니다, 전부 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10년 설교하고 목회 했습니다. 이 교회 개척하자마자 이 예배당 지었습니다. 친구 목사들 친구 목사 대단해. 여러분 이 교회를 지었을 때에 함께 했든 분들 우리 대단해, 전부 선생의 시각입니다.

 

제 어머니 부모님은 뭐라 한 줄 아세요, 제가 그 짐 어떻게 지려고 그 교회 갔니, 그 교회 지었니, 여러분 정말 이 교회를 지을 때에 목사님 그 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게 스승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으면은 선생이 아니라 스승이 되고, 은사가 되는 겁니다. 정말 교회가 교회 다와 지려면은 그렇게 되어져야 됩니다. 여러분 가르치는 것은 쉽습니다. 판단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는 것은 쉽지 안 해요. 어제도 제가 토요일이 되면은 저는 언제나 머리만 대도 어디에도 1분 안에 잠자는 사람인데 토요일 날은 잠이 잘 안 옵니다. 머리 속에 설교가 열 편 백 편도 더 그려 졌다가 지워 졌다 합니다.

 

4. 교회가 고린도 교회같이 되지 않으려면은 선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승과 은사가 되어야 된다. 모든 사람 목사님도 아비의 눈으로 보고, 다른 사람도 아비의 눈으로 봐야 된다. 은사와 스승이 되고 부모의 마음이 되면은 그 좋은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처지와 현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100분토론 이런 것도 보는데 뭐 이랬다 저랬다, 판단하는데 나 그 사람에게 그러고 싶어요, 네가 한번 해봐라, 지금 오늘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음이라, 이 말이 뭐냐 하면 네가 말하는 그것, 네가 할 수 있는 것 하면 내가 보겠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그러잖아요, 어릴 때에는 정말 부모가 너무 크게 보입니다. 조금 더 이제 머리 굵어지면은 아버지 같이 안 살아, 그 때 부모가 자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너도 아비 되어 바, 이 말이 말이 아니라 능력을 보겠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지식에 대해서 여러분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처지를 바라보면은 사랑과 이해와 수용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랑은 수용이거든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정말 우리 교회가 고린도 교회같이 되지 않으려면은 선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승과 은사가 되어야 됩니다. 모든 사람 목사님도 아비의 눈으로 보고, 다른 사람도 아비의 눈으로 봐야 됩니다. 누가 가르치는 것 못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는 설교를 못해 가지고 교회 안 되는 법 없습니다. 사랑 안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잘하면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교회 다와 지지 않습니다.

 

저도 목사이지만은 여러 설교를 요즘은 잘 듣지도 안 하지만은 15년 차까지는 열심히 많은 설교를 듣는데 참 손봉호 교수 설교 잘하더라고요 바른말만 하더라고, 철들고 보니까 그분은 선생이지 스승이 아니더라고, 바른말 누가 못합니까, 바른 생각 누가 못해요. 내가 하는 그 바른말 듣는 사람의 처지는 그 설교 속에 하나도 없더라고요, 왜 그런가 목회를 안 해봐서 그래요. 목회를 안 하고 설교 기술자라서 그래요. 오늘날 여러분 목사님들도 설교 기술자들 너무 많습니다. 저도 십 몇 년 까지는 설교 기술자였든 것 같아요. 익어 가니까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처지가 보여져요. 그게 스승이고 그게 은사입니다.

 

좋은 생각 아무나 합니다. 우리 사회는 좋은 생각을 못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은 좋은 생각을 말하는 자에게 환호합니다. 저는 그것을 언제 봤는가 하면은 최 근래에 봤습니다 정치인이 기업인이 청춘 콘스트를 하는데 좋은 말을 해요, 옳은 말을 해요. 청년들이 환호하더라고, 대통령 되야 된다고 하더라고, 정치권에 갔더니만 그 말 하나도 실천 못해요. 왜 좋은 말 좋은 판단 좋은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함 든 겁니다. 선생이 너무나 많아요. 교회에 좋은 생각, 좋은 판단 안 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은사와 스승이 되고 부모의 마음이 되면은 그 좋은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처지와 현실을 보게 됩니다.

 

5. 그 선생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 선생님 때문에 오늘이 있었다. 우리 모두가 가르치는 선생 판단하는 선생 채점하는 선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은사 스승이 되어야 된다. 서로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좋은 생각 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려고 해야 된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스승이 되면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의 IQ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방가 후 남아서 그 아이를 위해서 특별히 가르치는 스승이 됩니다. 그럴 때에 그 아이가 성장해서 그 스승을 비로서 은사라 그래요. 그 선생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 선생님 때문에 오늘이 있었다, 여러분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제가 은퇴를 했을 때 여러분들이 나의 은사가 되었다고, 여러분들은 저를 목사님은 저의 은사였다고, 그러려면은요 서로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좋은 생각 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려고 해야 됩니다. 목사님 목사님대로 하면은 참 힘든 일 많습니다.

 

지난 주일도 우리 교회 집사님하고 밥을 먹는데 들어 보니 내가 봐도 진짜 나쁜x이더라고, 가족으로 생각해서 잘 보듬어 주었는데 전체를 망하게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음주 5장에 나옵니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스승으로서의 사랑이 무조건 품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여러분, 고린도 교회를 여러분들이 보시면서 목사님 교인들이, 예수님보다 더 의로운 것이 뭐냐 하면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데, 그 사람 때문에 목사님 십자가 예수님 달렸는데 그 사람을 그래 하면 됩니까, 5장에 나옵니다 오늘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는 것은 보편적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가르치는 선생 판단하는 선생 채점하는 선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은사 스승이 되어야 됩니다.

 

저는 대학에서 10년 가르쳐 봤습니다 참 쉬워요, 가르치고 점수 매기면 되요, 설교는 그게 아니거든요, 교수 생활은 쉽습니다, 학생 다 바뀌어요, 노트 한 권 가지고 10년 해도 늘 아이들에게 새로워요. 목사는요 같은 대상의 20년 설교 해야 되요 ㅎ ㅎ ㅎ 그러나 교수보다 목사가 좋은 것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고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도 교회의 선생이 되지 마세요, 목사님을 가르치려고도 하지 말고, 교회를 판단하지도 말고, 사랑하세요 바울이 그런다고요, 말이 아니라 네 능력을 알아 보겠다고, 왜 우리 교회 이렇느냐고, 이런 대에 네가 기여한 것이 뭐냐 하는 거에요. 네가 지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성숙 되어지면은, 판단하지 않고 점점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성숙이 익어 가는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고, 내가 너희 얼마나 여러분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사랑의 사도가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남입니다. 가족의 눈으로 보면은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말을 할꼬, 똑같은 본문 안에서 느껴 지는 것이 다릅니다, 똑 같은 사건 똑 같은 말을 보고도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은 다른 느낌의 말이 나옵니다. 우리 흔히 세상에도 그런 말 하지요, 똑 같이 이슬을 먹어도 독사는 독을 내고, 꿀벌은 꿀은 낸다고, 여러분들 안에 있는 성령님이 여러분들에게 꿀을 생산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어져서 참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와서 우리 남편은 교회 옛날에 도살장 끌려 가듯이 끌려 오든 사람이 자기 발로 오게 되었다고, ㅎ ㅎ ㅎ 왜일까?

 

◈봉헌 기도◈

 

목사가 선생이 되면은 교인들이 드리는 헌금이 종교적 과업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보입니다. 목사가 은사가 되고 스승이 될 때에는 이 헌금을 드린 성도들의 사회의 눈물과 고통이 보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신 성령님 이 헌금이 종교적인 과업을 위해서 사용되기보다 우리 안에 아름다운 가족을 이루는데 사용 되어져서 죽어서 가야 할 그 천국을 맛이라도 보게 되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수술 후 회복 중에 있는 송정아 집사님을 긍휼히 여겨 주시고, 여러 가지 삶의 형편과 처지가 어려운 가운데 용기가 없고, 힘이 부족해서 어려움도 말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그 말이 말하는 자의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보여 질 수 있는 우리 장로님들이 되고, 권사님들이 되어져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소외됨이 없도록 성령께서 선생의 마음에서 스승의 마음, 은사의 마음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원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로고스를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그려 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은혜와 오늘도 저의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지 않고, 은혜로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서 로고서 대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들어내셨듯이 우리의 삶의 길,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본이 그대로 들어 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비에 새겨져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가 아니라 사람 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임을 받아 드려서 본어게인 되어져서 교회의 좋은 선물이 되는 믿음의 권속들과 좋은 선물로 인하여 가야 할 그 천국을 맛보게 되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주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