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웅담임목사주일설교원고

선생과 스승(고린도전서 4: 14-21)주일 예배 낮 설교문

차주희 2019. 5. 24. 12:10

 

 

 

선생과 스승

고린도전서 4: 14-21

2019 5 19일 주일 낮 예배

                                                                                                                                              No. 419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아멘

 

학교의 스승은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고, 사랑으로 가르치는 자다. 스승은 저의가 있는 게 아니고, 기대만 있다, 기대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불량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기대이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될 때, 선생질하는 사람이 스승 노릇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나 여러분들의 가정의 문제나 모든 문제는 스승으로서 본을 보이는 교육이 아니고,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교육 때문이다 저는 그렇게 봐요.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작년 9월에 찬양 예배 때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드렸는데, 우리가 흔히 학교에서 선생님 이러잖아요, 그것이 일제 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게 주입한 말이다 이러더라고요, 샌새이(先生)그 전의 우리나라는 스승 은사 이런 말을 쓰셨어요. 굉장히 다른 의미가 있데요. 선생은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자다 이런 의미지요. 다시 말하면 학원에 강사 학원 선생이다, 그런데 학교의 선생님 스승은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고, 사랑으로 가르치는 자다. 사랑하는 자다. 라는 의미가 있데요.

 

1. 스승으로서 노릇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어릴 때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 스승이다. 바울이 나는 복음으로서 너희를 낳았다. 영적인 부모로서 너희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선생질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스승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학교에서 선생님만이 학생에게 그러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에게 선생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스승 노릇 하는 부모도 있고요,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이 선생질하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은 스승의 노릇을 하는 목사도 있고요, 뭐 교인이라고 목사에 대해서 늘 가르침을 받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봐요. 교인들도 목사님에 대해서 선생질하는 교인들이 참 많아요. 스승 노릇을 해야 되는데, 선생질, 목사님 설교를 왜 그렇게 하십니까, 선생질이에요. 목사님 왜 목회를 그렇게 하십니까, 전부 우리 이런 것이 너무 많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나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안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나 바울은 선생질하신 게 아니에요. 오늘도 고린도교회가 굉장히 문제가 많았는데 왜 문제가 많았는가 하면은 예루살렘에서 파송 된 유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꾸 선생질한 거에요. 교인들에게 우상에 대한 신에 대한 지식을 전달한 거에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한 거에요. 바울은 그러지 안 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이 지식이 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시험에 들게 하고, 교회가 서로 패거리로 나뉘어서 싸움하고 이랬다고요. 그런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뭐라는 가 하면은 이런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한다. 스승으로서 노릇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 스승이다. 그럴 때에 부모도 제가 가만히 보니까 아이가 어릴 때에 부모 노릇 하는 것이 스승이고요, 부모도 시간이 자꾸 지나면서 자녀에게 스승 질을 해요. 그때부터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도 않고, 부모와 자식 지간에 갈들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어떻게 했는가, 선생질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낳았다, 하면서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선생은 많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으로 전하는 자들이 참 많다.

 

그런데 나는 복음으로서 너희를 낳았다. 영적인 부모로서 너희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이거든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선생질하고, 스승 노릇의 차이를 아셔야 될 것 같아요. 우리가 어릴 때에 제가 지난 달 9월 달에도 말했지 만은, 아이가 태어나서 걷기를 시작할 때가 한 열 달쯤 걸리거든요, 그래서 누워 있든 아이가 뭔가를 붙잡고 일어서면은 부모에게는 굉장한 환희에요. 야 우리 아이가 일어섰다고, 그 위대한 일을 했다고, 지금 있는 여러분들도 다 태어난 지 열 달 만에 그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들이 이곳에 앉아 있다고 봐요. 그랬든 아이인데 이제 중고등 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부모는 뭐라는 가 하면은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일어서는 것 하나에 환희를 가졌든 부모가 이제는 인수분해도 풀 줄 알고, 이러는데도 너 왜 그것밖에 못해, 이렇게 한다고.

 

2. 선생은 가르칠 때, 저의가 있다. 스승은 기대만 있다, 기대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의를 가지면은 판단하고 정죄가 나온다, 기대를 가져야 된다. 사람에 대해서 저의를 가지지 말아야 된다 어떤 문제에서도.

 

그러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는가 하면은 아이가 변했대, 옛날 어릴 때 안 그러더니만, 아이가 변한 것이 아니고 부모가 변한 거에요. 아이는 그대로 있는 거에요. 그런데 부모는 변했어요, 어떻게 변했는가, 스승에서 선생으로 바뀐 거에요. 스승 노릇에서 이제 부모가 스승 노릇 하다가 이제 부모가 선생질 하기를 시작하는 거에요. 그 차이가 뭔가,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요 그 차이는 선생은 저의가 있는 거에요 가르칠 때, 그래서 이 아이에게 이것 가르쳐서 효과가 있으면은 칭찬하고 없으면은 벌주고 이래 버려요. 스승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저의가 있는 게 아니에요, 기대만 있어요. 저의는 내가 원하는 목적대로 이 아이를 만들어 가려고 하지만은, 기대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기대에요.

 

어릴 때 여러분들이 아이가 뒤집기만 해도 정말 부모에게 환희잖아요. 그 뒤집는데 무슨 부모가 저의가 있어요, 아이의 성장하는 과정의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는 거지요. 오늘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자녀나 그 다음에 뭐 타인에 대해서나 누구에 대해서도 저의를 가지면은요 판단하고 정죄가 나와요. 기대를 가져야 되요. 그래서 제가 고린도전서 13장 좀 이런 책들이 여러분들의 모든 가치판단에 좀 기준이 되었으면 싶어요. 사랑은 바라며, 바라는 것이 뭐라 그랬어요.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 그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내가 원하는 기대대로 변화될 것을 가지는 것은 저의가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대로 변화되어져 갈 것, 때가 되면은 여러분 뒤집기도 하고, 또 때가 되면은 일어서기도 하고,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니까, 그 어린 얘에게 젖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이런다고요. 또 때가 되면 뒤집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한다고요. 그러다가 이제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고 하는 자기 합리화라고 저는 봐요.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어떤 목적이 들어가면서 아이에게 상처 주지요, 너는 왜 그 모양이야, 왜 그것밖에 못해, 그때부터 아이는 변하지 않는다고, 그때부터 아이에게 자괴감도 생기고, 열등의식도 생기고, 많은 일들이 문제가 생긴다고 봐요. 오늘 스승의 주일 맞이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한가지 깨달음이, 아이가 변한 것이 아니라, 타인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했구나, 내가 순수하게 보지 않고, 저의를 가지고 대하는구나, 그것 알지 못하면은 우리는 선생질하는 사람이 됩니다.

 

선생질 해 가지고 사람이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그래 가지고 지식 많이 들어가면은 지금 우리가 보는 정치권에서 보는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 버린 다고요. 전부 선생질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이 되니까 자기도 전부 선생질만 하는 거에요. 사람에 대해서 저의를 가지지 말아야 되요 어떤 문제에서도. 두 번째로 스승은요 저는요 자기 입장보다 교육생의 처지를 생각한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여러분 뒤집을 때 부모의 환희는 그 아이의 처지를 이해하거든요, 아직 어린 것, 그런데 아이들이 크고 나면은 아이의 처지를 이해 안 해요. 공부도 능력입니다. I.Q.도 다 달라요. I.Q. 높다고 공부 잘하는 것 저는 아니라고 봐요.

 

3.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부모고, 그것이 스승이다. 사랑을 받고 커서 세상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가치판단 안 하면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I.Q. 도 높아야 되지만 엉덩이도 무거워야 되요. 엉덩이 무거운 게 여러분 그게 기질의 문제인데 모두다 그런가, 그렇지 않는데 우리는 다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는 거에요. 제가 아이들 키우면서 깨달은 게 그것이에요. 역시 공부는 머리도 좋고 엉덩이도 무거운 것들이 공부 잘하는 거지요. 머리 좋은 얘들이 그런 얘들이 그렇게 안 많더라고. 머리 좋으면 30분쯤 공부하면 다 안 것 같이 일어나서 돌아다녀요. 오늘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부모고, 그것이 스승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주일학교가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어른 대비 주일 학생 숫자가 제일 많아요.

 

왜 그런가, 우리 교회의 선생님들은 선생질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스승 노릇 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이에게 그 성경 하나 더 가르쳐 주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해요, 중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 사랑을 받고 커서 세상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가치판단 안 하면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오늘도 그저 우리가 학원 선생님과 같은 그런 지식의 전달이 우리나라에 너무 만연하고, 교회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나 교회는 참 문제가 많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 인간관계에서도 또 여러분들의 자녀에게도 선생질 하지 말고요, 스승의 노릇, 부모의 눈으로 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좀 이런 마음은 이해했으면 싶어요. 우리 교회의 여러분들이 다니면서 참 편하다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니까요. 남은 드러난 말, 드러난 행동을 가지고 평가하지만 부모는요 이면을 봐요. 제가 여러분들의 이면을 보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이 편한 거에요. 여러분들도 여러분들끼리 그래야 되요. 말 한마디 드러난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럴 수 밖에 없었든 이유를 보는 것. 그것은 부모만이 할 수 있는 거에요. 저는 그것이 스승이라고 봐요. 상대방을 슈퍼멘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고요, 있는 그대로의 능력을 받아 주는 것, 저는 그게 부모라고 봐요. 이랬든 부모가 부모 노릇 제대로 한다는 것 인문학적인 선생 노릇을 배우면서 얘를 엉망진창 만들어 버리거든요.

 

오늘도 그리고 거기에 보면은 16절부터 부모와 스승의 차이 선생의 차이를 잘 보여 주고 있어요. 16절에 보면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에서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뭐라는 가 하면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면서 나의 길이라고 그래요. 나의 길, 거기에 나의 행사라는 말은 나의 길, 자신의 인생의 계적 자신의 삶의 모습 자신이 모든 것을 가치판단 하는 가치관, 그 가치관을 본받으라는 거에요.

 

어투 본받으라는 게 아니에요. 그의 말을 본 받으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18절 이하 보면은 어떤 이들 어떤 이들이 뭐냐 하면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온 유대주의자들을 말해요. 신학을 가르치는 학자를 말해요. 그래서 고린도교회 와서 문제를 많이 일으킨 자들을 말해요.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 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대중은요 말에 열광을 해요. 사람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받으려면 말을 잘하면 되요.

 

4. 좋은 생각은 아무나 한다, 그 생각을 실현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성령의 능력을 뒤집고 이런 게 아니고, 사랑의 능력이다.

 

히틀러 연설의 대가였습니다. 모든 유명한 정치인들은 연설의 대가들이에요. 우리나라가 정말 대통령을 뽑을 때, 말 잘하는 사람 뽑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에요. 국회의원은 말 잘하는 사람 뽑기 때문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그랬어요. 좋은 생각은요 아무나 해요, 생각을 실현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좋은 말 누가 못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되요. 지난 9월에도 말했지만 우리 한때 뭐 다 그렇지만은 잘 봤잖아요. 누구누구 얼마나 좋은 생각 좋은 말해서 청년들이 열광을 했어요. 와서 보니까 정치권에 들어오니까 그 생각 하나도 안 되잖아요. 여러분 지금 경제 얼마나 이론적으로 말로서 완벽합니까, 실현이 안 되요.

 

설교 말 잘하는 것에 넘어갈 필요 없는 거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성령의 능력을 뒤집고 이런 게 아니에요. 사랑의 능력이에요. 부모가 어릴 때에 자녀를 대했든 그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뒤집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했다고요. 아마 나이 들어서 든 아이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가졌다면은 저는 아무도 일어서지 못했으리라 봐요. 누가 그러데요, 사람이요 태어나서 일어서서 걷기까지의 얼마 넘어지는가 하면 3천 번 넘어진대요. 3천 번 넘어지는 것을 일어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안 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걷는 거에요. 3천 번 2 9 9 9번까지 이것 사람 되겠나 일어서겠나, 아이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저의를 가지고 일어서는 목적을 가지고 길렀다면은 못 일어선다고 봐요.

 

저는 사고가 나면서 사람이 얼마나 약한가 하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정말 온갖 훈련 다 받았어요, 공수 훈련은 쉬려고 간 것 같더라고, 그 공수 훈련 받고 그 튼튼한 몸이요 사고가 나 가지고 20일 동안 의식 불명 딱 상태에서 깨어나 가지고요 화장실 간다고 침대에 딱 내려오는 순간 탁 주저앉았어요, 근육이 다 풀렸더라고, 못 일어서겠더라고, 그 힘없는 다리를 가지고 일어서는데 3천 번, 부모의 인내라 생각해요. 그 인내가 뭐였는가, 내 입장에서 자녀 안 본 거에요. 저의를 가지고 자녀를 안 기른 거에요. 하나님이 일어서게 하실 것의 기대를 저버리지 안 했다, 그 사랑이 일어서게 했는데, 왜 공부는 그 모양이냐고 이야기해 버리니까, 엉망진창 되는 거지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 그러니까 교인들이 엉망이요, 저는 내가 변화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변하실 것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안 했습니다. 12년 지나니까 다 자기 할일 하잖아요, 뭐 효도 관광 갈 때 내가 뭐 말 한마디 안 해도 너무 잘 하잖아요. 오늘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한다는 자기 합리화를 가지고 상대방에 대한 평가나 말하지 말고요, 하나님이 변하실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것, 그것이 낳은 자의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이다. 저는 우리 교회의 선생님들이 참 그런 가르침을 보면서 그래서 그런 것이구나, 본 바울은 본을 보였는데 이 본이라는 것은요 자신의 삶에서 그려 내는 것을 말해요.

 

5. 바울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스승의 노릇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 주는 것이다.

 

나의 행사를 십자가를 그려 내는데 그 십자가가 뭔가? 아셔야 되잖아요, 예수님의 그 골고다의 십자가를 종교적인 행위에 갖다 붙이는 논리의 비약으로 말고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향하여 욕하는 유대인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유대인들의 무지를 이해하셨어요. 마치 우리가 어릴 때에 아이들이 일어설 근육이 없다는 것을 인정을 하니까 받아 드리듯이, 제가 요즘 정말 40년 이상 지기에게 두 번에 걸쳐서 제가 배신을 당하면서 못살겠어, 그런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은 모르기 때문에 저러지, 자기가 하는 짓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저러지, 수용이 되더라고, 수요일 날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려고 그래요. 이해 안 될 때,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러하옵니다.

 

그래서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겁주는 말이 아니에요, 너무나 답답해서 하는 말이에요. 이 말을 가지고 바울이 저주하면은 뭐하면 이렇게 하면 안 되요. 오늘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은, 우리 볼 때마다 너무나 답답하리라 생각해요. 그 답답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목사 삼아 주시고, 오늘날까지 기다려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은혜를 알게 될 때, 저는 선생질하는 사람이 스승 노릇 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생각해요. 선생질은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고, 스승의 노릇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 주는 거에요.

 

공부 성적 여러분 성적 엉망진창 해 가지고 오면은 부모만 기분 나쁩니까, 받은 자기는 더 기분 나쁜데, 안 그렇겠어요, 시험 망친 당사자는 더 기분 나쁜데, 부모는 자기 기분 가지고 화를 내고, 끝내 버리지만은 이 아이는 어떻게 해요. 시험 망친 아이에게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부모가 스승으로서의 부모다. 그때 그 아이는 좀 열심히 해야 되겠다 이 생각 들어요. 제가 참 못된 자식이라서 그런지 제가 어릴 때에요 아버지가 굉장히 엄했어요 목사로서, 성질도 급했고, 그래도 저는요 할 짓 다 했어요 왜 했는가, 노는 것은 3시간 즐겁지만 혼나는 것은 2분만 눈감으면 된다고. 우리 정말 2분 눈감게 하지 말고요, 3시간 노는 시간을 공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처지를 이해 해주는 것. 저는 하나님이 좋은 것이 하나님은 저를 이해하시는 것 같아, 내 능력도 알고, 내 한계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직까지 목사 노릇 하라고, 기다려 주는 것 같아요.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드린 헌금의 액수가 보이지 아니하고, 이 헌금을 드리기까지 성도들이 흘린 땀, 눈물을 보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액수를 보았든 바리새인들 종교인들은 부자가 드리는 헌금에 환호했지만 헌금을 드리기까지의 삶을 본 주님은 두렙돈을 드리는 과부의 수고를 보았든 것을 압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람들의 말 한마디 행동을 보지 말고, 그 이면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서 지금보다는 더 풍요로움을 모든 교인들에게 맛보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교회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한 개인의 부유함이 모든 사람의 자기 일과같이 기뻐할 수 있도록, 그 부유함이 자기만의 부유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나눔이 될 수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삼아 주시옵고 그런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은혜의 선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선생질함으로 판단과 정죄가 난무하고, 열등의식과 우월 의식이 충돌하는 세상을 평화의 하나님 나라 되도록,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러하오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 참된 스승의 노릇을 보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우리를 창조한 자이기에 변하지 않는 우리 돌아오도록 하루를 천년 같이 천 년을 하루같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우리의 행사 우리의 삶의 그 길 속에 십자가를 그려 내는 성령님의 감동 역사하심이 오늘도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격을 부여 해주심을 믿어서 자신의 삶에 예수의 흔적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도록 선물로 주신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