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웅담임목사주일설교원고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고린도전서 10: 19-24)주일 낮 예배 설교문

차주희 2019. 10. 4. 14:49

 

 

담임목사 김종웅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고린도전서 10:19-24

2019 9 29일 주일 낮 예배

                                                                                                                                                 No. 436

19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아멘

 

진리인 성경이 히브리적 사고로 쓰여 졌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세상의 것은 각양 좋은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히브리적 사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한다. 히브리적으로 보면은 헬라시대에 너희들이 아프로디테신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뭔 줄 아느냐?

 

교회가 피스메이크가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가나 피스메이크가 되어야 되는데 교회가 그러지 못하고 트러벌 메이크가 되어지고, 또 교인들도 교화 안에서나 사회에서 트러벌메이크가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은 가난하나 부하나 하늘의 은혜와 평안을 맛보기 때문에 참 행복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소위 말하는 복을 받으면은 행복하고 그러지 못하면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 이런 것들은 왜냐하면은 성경을 히브리적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데, 헬라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믿어야지 자기가 믿는 것을 진리라 생각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를 믿으려면은 진리인 성경이 히브리적 사고로 쓰여 졌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 성경이 기록될 당시 예수님이 오실 때에는 이 세계가 팔레스타인의 세계가 헬라 세계 속에 있었다. 헬라의 사고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있었다. 헬라의 사고로 많은 오염을 불러일으켰다. 아디아포라 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객관적인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을 진리라는 것은 이 히브리적으로 쓰여 진 성경의 진리를 헬라적으로 해석을 해서 이해해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왜 이런 오해가 일어나는가 하면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 예수님이 오실 때에는 이 세계가 팔레스타인의 세계가 헬라 세계 속에 있었습니다. 헬라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은 그저 지역적으로 헬라 세계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헬라의 사고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리인 성경이 사회적인 통념, 헬라의 사고로 많은 오염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 것이 지금도 한국 교회의 여전히 존재하고, 2천 년의 기독교의 모든 잘못된 모습은 성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헬라적으로 이해를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믿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오류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니까 용서하고 들으세요. 이번 한 주간 동안 시애틀에서 오신 목사님들과 죽 지내는데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사태 이런 것들을 참 말씀을 많이 해요. 그리고 잘 때에도 계속 침대에서 무엇을 들어요, 그래서 뭘 듣나 봤더니 유튜브를 계속 듣고 계시더라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좌빨들이 문제다 라고 말을 하면서 흥분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당신은 나보고 좌파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제가 뭐라는 가 하면은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히브리적인 것은 통전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라는데, 여러분들이 왜 이런 것들이 중요하냐 하면은 이런 거에요. 기독교의 윤리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그러니까 이런 물체라든지 인간이 만든 인문학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인문학적 사고라든지, 의점 주의라든지 이런 것들을 우리는 아디아포라 라고 그래요. 성경에도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은 선한 것이니까 먹어라 라고 말씀을 하세요. 이 아디아포라 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객관적인 것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은 좌파나 우파 우리 사회를 지금 두 동강을 내고 있는 이런 것들은 인문학적 사고인데, 아디아포라 라는 것을 인식해야지,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라는 거에요.

 

2. 하나님적 시각으로 보지 않고, 헬라적 시각으로 보니까, 진영논리로 되어져서 대립이 된다. 성경을 볼 때에 히브리적 사고로 성경을 목사님이 이렇게 보니까 진리가 이런 것이구나 이런 것들을 깨달아야 된다.

 

이 아디아포라 라는 것은 좌파는 선하고, 우파는 나쁘고, 우파는 선하고, 좌파는 나쁘다는 것은 헬라적 이분법이 만들어 낸 진영 논리의 가치 판단이에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거듭나면은 이 사고가 사라져야 되요.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뭐라고 이야기 했는가 하면은 야고보서 가지고 말씀했어요. 야고보서에 보면은 이 세상의 것은 회전하는 그림자가 있다. 여러분 아디아포라 이지만은 이쪽 면은 밝지만은 여기는 검어요, 어두워요. 이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에요. 이 세상의 사상이나 의점도 이쪽 면이 밝으면은 이쪽 면이 어두워요. 그래서 좌파의 선한 면이 우파의 어두운 면이 되고, 우파의 선한 면이 좌파의 어두운 면이 되는 아디아포라에요.

 

이런 것들을 절대시해서 선악을 구분하게 되면은 성경이 아니고, 그것은 헬라적 사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회전하는 그림자가 있는데 이 세상의 것은 각양 좋은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니까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이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려면은 하나님적 사고로 보아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적 사고로 보면은 좌파의 좋은 점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이 되고, 우파의 좋은 점이 우리에게 선물이 되는 좋은 선물이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적 시각으로

보지 않고, 헬라적 시각으로 보니까, 진영논리로 되어져서 대립이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좌파진영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파의 어두움을 공격을 하고, 우파의 잔영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좌파의 어두움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기독교마저도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이유 하나로 선악을 분별해 버린다고요.

 

여러분들의 가치판단이 바뀌어 져야만이 우리가 어디에 가나 통합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고, 여러분들이 가난하나 부유하나 어떤 경우에도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는 복된 신앙 생활을 한다 이런 말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들으면서, 또 이 성경을 볼 때에 히브리적 사고로 성경을 목사님이 이렇게 보니까 진리가 이런 것이구나 이런 것들을 깨달아야 되어져요. 여러분 그러면은 이런 히브리적 사고가 뭔가, 여러분 우리가 민주 사회라는 것이 참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 되려면은 어떻게 되어져야 되는가 민주 사회가 제대로 되려면은 우파가 진영 하는 자유의 가치를 가지고 민주를 봐야 되는가, 좌파가 생각하는 평등의 가치를 가지고 민주를 봐야 되느냐, 이러면은 진영 논리가 되는 거에요.

 

오늘 여러분 우리가 민주 사회라는 것이 인류의 역사상에 얼마 되지 안 했어요. 그 전에는 대부분 왕조 시대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민주사회가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 주어진 선물이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를 프랑스 혁명을 기준으로 해서 이렇게 볼 수도 있다고요. 그럼 그 프랑스 혁명이 뭐냐 하면은 프랑스 국기 속에 잘 나타나 있는 거에요. 프랑스 국기가 삼색이잖아요, 파란색, 흰색, 빨간색, 그 삼색이 지향하는 것이 뭐냐 하는가 하면은 평등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것은 좌파적인 생각이지요. 그러면서도 또 뭔가 하면은 평등하지만은 모든 인간은 자유로워야 된다. 그래서 자기의 능력을 누리기 위해서 제한 받지 않고, 극대화 해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야 된다. 우파적인 생각이지요.

 

3. 히브리적 사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한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성령이 원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관계와 교제하는 것과 귀신의 방법으로 교제하는 것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느냐?

 

이 두 개의 대립된 가치관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 박애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헬라적 사고는 평등의 중요한 가치만을 하면서 자유를 부정하거나, 또 자유의 가치를 귀하게 선하게 여기며 평등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헬라적 사고에요. 히브리적 사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뭐냐, 목사님, 목사가 해야 하는 것이 뭐냐, 이 좌파나 우파나 다 아우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성경에는 교회가 헬라인도 유대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그랬다고요. 자유인도 노예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 그랬지, 하나님은 노예를 부정하는 것도 노예가 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도 하지 안 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왜 이런가 하면서 제가 헬라적 사고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진리와 성경적으로 믿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같은 목사로서 참 미안한 소리 하나 할게, 목사님에게 진리는 뭐고, 목사님에게 성경은 뭐냐고 묻는 것, 실례인 줄 알면서 내가 묻는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과 진리는 이 성경을 히브리적 사고로 바라보는 거에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오늘 이 본문도 보면은 여기에 뭐라는 가 하면은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 위에는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너희는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은 고린도 교회의 신학적 통찰력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어 우상은 없어, 그러기 때문에 우상에게 받쳐 진 제물도 고기일 따름이지 나쁜 것이 아니야, 하고 먹으면서 그 신전의 제사에 참여해서 초를 키거나 절을 하지 안 했지만 그들과 교제하는 그들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우상이라는 존재는 없지만은 귀신이 그 이방인의 신전에 제사의 행위를 통해서 사람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곳에 가서 그 잔을 마시는 것과 그들의 그 식탁에 참여하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과 귀신의 잔을 마시는 것과 같아,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한다.

 

이 말은 너희가 교회에 와서 성찬식에 참여해서 포도주를 먹으면서도 그곳에 가서 귀신에게 드린 잔을 겸하여 마셔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귀신의 식탁과 주의 식탁 성찬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절에 가서 절 밥 먹는 것을 겸하여 하면 안 된다. 참여하지 말라. 이 말씀을 헬라적인 사고로 보면은 저 신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귀신의 제사고, 이 교회에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님께 드리는 제사고, 교회에서 밥을 먹거나 성찬식은 주의 잔을 떼는 것이고, 그곳에 가서 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제사다, 이러면은 이분적 사고[二分的 思考]를 보는 거에요. 여러분 히브리적인 것은 뭐냐 하면은 이 교제라는 것은 지난 주일도 말씀을 드렸지요.

 

저 이단의 제사에서 저 신전의 제사에서 왜 믿음이 강하고 신학적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교제하는 것을 말해요. 그 교제한다는 말은 뭣이냐 하면은 인간의 관계를 이방적 귀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성령이 원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관계와 교제하는 것과 귀신의 방법으로 교제하는 것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느냐 이런 말이에요.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에게 그러면 성령이 하는 식탁 거룩한 교제 성령의 교통하심은 뭔가, 24절에 말하는 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4. 기독교인들은 성령 안에서의 교제는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려고 동업을 하는 거에요. 히브리적으로 보면은 믿지 않는 자와 같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협작[挾作]을 하거나 동업을 하지 말고, 유익을 위해서 하라

 

왜 이방의 신전에 가서 제사를 하는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래서 고린도후서 61415절과 16절에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 하리요. 여기에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말라 하는 것은 동업을 하지 말라는 것을 물리적으로 동업을 안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은 헬라적 사고가 되어져 버려요. 그러면은 이방인들과 예수 안 믿는 사람들과 동업을 안 하면은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 믿는 사람, 이방인과 동업을 하면은 저것은 나쁜 사람, 이런 선악의 논리가 생겨 져 버린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장로가 믿지 않는 사람하고 동업을 해 이런다고요, 여러분 믿지 않는 자와 동업을 안 하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이 복 주는가 이런 것들은 다 헬라적 사고로 성경을 보는 거에요. 무슨 말이냐, 이방인들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동업을 해요. 기독교인들은 성령 안에서의 교제는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려고 동업을 하는 거에요. 이 두 개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느냐 이런 말이에요. 너희가 성찬에서는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려고 성찬을 떼면서 성도의 교제를 하고는, 저 이방 세상에 나가서는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협작[挾作] 하고 동업을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 없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가 똑 같은 말씀인데도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지요. 헬라적으로 해 버리면은 선악이 뭐냐 하면은 이방인과 동업하느냐 안 하느냐에요. 히브리적으로 보면은 믿지 않는 자와 같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협작[挾作]을 하거나 동업을 하지 말고, 유익을 위해서 하라.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이곳에서 신앙 생활하고 성찬을 떼고 예배를 드려도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고 이런 사람은 귀신의 잔을 참여하는 것이고,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헬라적 사고로 성경을 볼 때, 나타나는 거에요. 선악의 판단이 그렇게 생기는 거에요, 히브리적으로 보면은.

 

5. 성경은 우리가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그들과 다른 삶을 살 것인가,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면서 그들과 구별된 공동체가 될 것인가, 헬라적이분법이 아니라, 진영논리가 아니라, 히브리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하나님적 삶을 살 때에 이 세상에 아디아포라가 선한 것이 되고, 유익이 된다.

 

제가 여러분 저 화성에 가면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이름을 말해도 될 것 같아요. 산골이라고 하는 식당인데요, 이 오징어 덮밥 하고 추어탕이 진짜로 맛이 있어요. 그래서 가서 식사를 할 때에는 번호표를 뽑습니다. 보통 10분에서 30분 기다려요. 그래서 내가 주인에게 뭐라고 했는가 하면은 이 돈 벌어서 다 뭐해요, 이러니까 이분이 한다는 소리가 저기 보세요, 우리 써빙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분들 월급 주고 행복하게 하려면은 어쩌면은 이것도 모자라요 이러더라고, 거룩한 식탁에 참여하는 자의 교제 권이에요. 또 서울공항이 있는 쪽에 가면 또 추어탕이 굉장히 유명한 집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30분 기다립니다. 그래서 제가 종업원에게 물었거든요 아이구 내가 미안해요 이랬어요, 그래 왜요 이러더라고, 괜히 내가 와 가지고 힘들게 하는 것 같다고. 

오늘도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든 교제 건이나 삶의 존재의 이유가 그래야 되는 거에요. 지금 이 말씀이에요. 여러분 뭐 갑오정 이라고 하는 거기에 이병영집사 부인이 같이 그 사장하고 잘 안데요, 저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무 잘 되요. 종업원들 집 사주고 이런데요, 여러분 통합적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의 차이는 그것이에요.

 

헬라적으로 보면은 귀신에게 하는 이 물리적 의식적의 참여하는 것과 교회당에 와서 성찬에 참여하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가지고 선악으로 구분을 해 버려요. 성경을 그래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적으로 보면은 저 헬라시대에 너희들이 아프로디테신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뭔 줄 아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네가 신학적 사고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참여하는 것은 길드에 의한 네 사업의 이익을 위해서 종교적인 예전에 참여하지 않지만, 교제하잖아, 그것은 성찬을 떼는 거룩한 식탁과 주의 잔에 참여하면서 겸하여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들과 같은 삶의 방식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돼, 이런 말이에요.

 

똑 같은 본문을 보고도 너무나 다르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면은 우리가 이런 부분에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대해서 음행 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 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음행 하는 자들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라고 하니까 사귀지 말라는 답을 주었는데, 이 사람들이 뭔가 하면은 이 사람들과는 교제도 안 하고 함께 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가 물리적으로 그렇게 분리를 하려고 하면은 세상 밖에 나가야 된다. 여러분들이 이방인들과 더불어 교제하지 아니하고 살려면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된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그들과 어떤 다른 삶을 살 것인가, 교회는 세상의 존재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구별된 공동체가 될 것인가, 그러려면은 헬라적이분법이 아니라, 진영논리가 아니라, 히브리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거에요. 그러려면은 각양 좋은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선악의 판단은 아디아포라다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로 온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영생이에요. 하나님적 삶을 살 때에 이 세상에 아디아포라가 선한 것이 되고, 유익이 된다 이런 말이에요.

 

6. 성경적 통전적 사고를 가지고 히브리적 사고로 접근하는 것이다. 누가 이런 것 이야기하는가, 목사가 해야지요. 목사가 어떻게 하는가, 성경을 히브리적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 진리가 얼마나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유익한가, 오로지 선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지금 보세요, 최저 임금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헬라적이분법 사고로 보면서 우파적인 사고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악한 것이다 하고, 좌파적인 의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선한 것이다 이래 봐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에요. 최저 임금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려면은 박애 종업원은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는가 하면은 내가 이렇게 많이 받으면은 회사가 어려워 지지 않을까, 그게 박애에요. 그게 기독교적인 사고로서 최저 임금이 우리의 삶에 유익이 되게 하는 거에요. 사장은 좀 많이 남아서 회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종업원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자기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야 되요 이게 박애에요.

 

이게 성경적 통전적 사고를 가지고 히브리적 사고로 접근하는 거에요. 누가 이런 것 이야기하는가, 목사가 해야지요. 목사가 어떻게 하는가, 성경을 히브리적으로 해석을 해야지요. 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듯이 종업원이 써빙 하는 사람이 나에게 하잖아요 손님에게 하잖아요. 왜 그 짐을 주인에게만 맡겨요, 내가 그 써빙을 받은 대가를 지불해야지요, 최저 임금의 만약에 만원이라면은 내가 그 음식의 10%만 준다고 하면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이루어져요. 성경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경적 가치관으로 가치판단 하세요, 삶을 선택하세요, 교리로 해 버리면은 이것은 진영논리가 되요. 교리로 해 버리는 순간 헬라적 이분법으로 성경을 보기를 시작하게 하는 거에요.

 

진리가 얼마나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유익한가, 오로지 선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어요. 이 세상의 것은 선악을 판단하면 안 되요. 여러분 똑 같은 칼도 엄마의 손에 들리면은 아름다운 음식을 만들지만은 그 부엌의 칼을 강도의 손에 들리면은 사람 죽이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 죽이는 것을 가지고 칼은 나쁘다고 이야기 해서도 안 되고, 음식을 만드는 엄마 손에 들린 칼을 보면서 선하다고 하면 안 되요. 칼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에요. 그게 선하게 사용되려면은 엄마와 같이 헤치는 것이 아니라, 유익되게 사용되는 것. 다이나마이트가 선하고 악한 겁니까, 그래서 노벨이 울면서 만든 것이 노벨 평화상이잖아요. 건설을 위해서 만든 이 다이나마이트를 사람 죽이는 무기로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이 다이나마이트를 악하다고 하고, 다이나마이트가 건설에서 좋게 쓰이는 것을 선하다고 하는 것은 헬라적 사고에요 박애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왜 주셨는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나에게만 유익이 되는 게 아니에요, 모두에게 유익되도록, 이것이 히브리적 사고에요. 그래서 그 뒤에 22절에 보면은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이런 것도 헬라적이분법을 가지고 우상숭배 하는데 가면 하나님을 노여워해서 하나님에게 벌받아, 안 가면은 하나님이 복 주셔 성경에 봐라 거기에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노여워하는 것인 데 네가 하나님보다 강해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피할 수 있겠나, 헬라적 이분법이에요. 이 말씀은 구약에 여러분 이 말씀의 배경이 구약을 해석을 할 때도 너무나 헬라적으로 이분법적으로 해석을 해요.

 

7.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와 사랑의 측면에서 해석을 해야 되는가? 용서의 하나님이 십자가에 이것은 왜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을 볼 때 공동체에 나타나는 성품이고, 하나님이 공동체에 나타나는 공의는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공의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사님이 믿는 진리를 따라서 설교를 들으면 여러분들의 삶의 학대가 일어나고 억압이 일어나요.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거에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도 했지만 노여워하는 하나님, 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안 해서 광야에서 다 죽었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의 복을 받았어, 헬라적 이분법에서 진리를 보는 거에요. 그것은 목사는 자기가 믿는 진리에요. 그래서 목사님에게 순종하면 복 받고, 안 받고, 그 목사님이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그 말씀이 뭔가, 하나님이 왜 그 말씀을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와 사랑의 측면에서 해석을 해야 되요.

 

그래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사랑 속성에서 사랑을 공동체에 하느냐, 개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무시해 버리고, 동일시 하면은 모순이 일어나요, 잘못한 사람에게 반듯이 벌을 주어야 되지요, 그러나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지요, 그래서 십자가는 모순이라 그러지요, 하나님은 반듯이 벌을 주어야 되지만은 또 용서의 하나님이 십자가에 이것은 왜 모순이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공의는요, 성경을 볼 때 공동체에 나타나는 성품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에게 나타나는 성품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공동체에 나타나는 공의는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공의에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하는 것을 그냥 묵고 하는 것은 공의가 아니거든요 사랑이 아니거든요, 자녀가 잘못하는데, 용서하고 벌 안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자녀가 잘못했으면은 반듯이 벌을 주어야 되요. 그런데 그 벌이 사랑의 매라고 하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공의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공동체에게 나타나고, 사랑은 개인에게 나타나는 거에요. 그래서 그 뒤에 보면은 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그런 말이에요. 우상은 없어 그래서 신전에 가서 음식 먹어도 돼, 그들과 함께 귀신의 잔을 마셔도 돼, 합법적이야 왜, 우상은 없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아디아포라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음식일 따름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유익한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은 여러분들 이런 말이에요. 그곳에 가서 동업을 해 가지고 내가 이익을 많이 내 가지고 내가 잘 살면서 교회 헌금 많이 하는 것, 그게 잘못된 게 아니에요. 합법적인 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이것 깨달아야 되요. 거듭나게 되면 그것 알아요. 전부 실용주의적 사관에서 보니까 부자 되고, 자녀 좋은 대학 가면은 유익한 것이고, 부자 되지 못하고, 좋은 대학 못 가고 이러면은 나쁜 것이고, 진영 논리로 보는 거에요 세상을. 좋은 서울대학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에요.

 

8. 과거의 일은 과거의 시각으로 봐줘야 된다. 그러면은 어두움과 밝은 면이 분명히 공존하는 것을 알고, 상대의 집념을 품어 줄 수 있다. 하나님적 사람이 되려면은 과거에 그를 수 밖에 없었든 것을 받아 줘야 된다. 현재의 일들도 미래적 시각으로 봐야 된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가 서울 대학 들어갔다고 해서 좋은 겁니까, 미래의 시각으로 현재를 봐야지요. 그게 좋은 것이 될지 나쁜 것이 될지는 몰라요. 히브리적 사고를 받으면 이래요. 우리나라의 지금 전부 문제는 헬라적 사고 때문이에요. 과거의 일을 현재적 시각으로 선악을 판단해요. 이것은 헬라적 사고에요. 과거에 우리 교회에 모습을 현재의 시각으로 잘 되었니 못되었니 전부 헬라적 사고이고, 자기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적 사람이 되려면은 과거에 그를 수 밖에 없었든 것을 받아 줘야 되는 거에요. 현재의 일들도 미래적 시각으로 봐야 되요. 현재적 시각으로 보면은 지금 이익이냐 불이익이냐로 봐요. 그래서 미래에 이익이 될지, 불리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자기의 주장이 옳음을 위해서 미래에 내가 하면은 유익이 될 거라 그래요. 상대방의 이야기대로 하면은 미래에 잘못되고 망할 거라고 생각해요. 진영논리에요, 헬라적 사고에요. 미래에 유블리로 미래의 시각을 보면 현재의 유블리로 보지 안 해요.

 

이런 부분에서 여러분들이 공의와 사랑을 혼돈하면 안 되요. 하나님의 시각을 그런 헬라적 시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면 안 되요. 여러분 이런 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이런 말씀들이에요.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데요. 우리나라 친일파 어떤 사람들이에요, 현재의 유블리를 가지고 봐요. 그래서 친일 하는 거에요. 누가 독립운동 해요, 미래의 시각을 가지고 현재의 유블리를 판단 안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죽더라도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독립운동 해요. 공의는 뭔가, 그 미래에 왔을 때 친일파의 것을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정의를 실현해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사랑을 하는 거지요. 그게 뭐냐, 우리가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주보다 강하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라는 것을 히브리적으로 사고를 해 가지고, 이것을 가치판단이나 선택의 삶으로 사는 것을 못한 거에요. 왜 그런 것은 세상이고, 성경은 성경의 세계가 있어 이래 버린다고요. 성경적으로 하면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때 개인과 공의, 개인의 사랑과 공동체에 나타나는 공의를 그렇게 정리를 했어야 되요. 왜 그래 못했는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려면은 히브리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요. 그러면 이 말씀을 이렇게 봐야 되요. 여러분들의 개인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그게 뭐 세상이 말하는 통념, 히브리적 사고로 이분법적 사고로서 바라보는 생각 때문에 좋은 대학 못 가면 슬퍼해요. 좋은 대학 갔다고 해서 그 얘가 좋아질지 안 좋아질지 모르지만 모르는데 뭐, 현재적 시각으로 보는 거에요, 미래의 시각은 없어요. 이런 삶이 여러분들의 삶의 전반에 나타나야 되요.

 

9. 덕을 세우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합법적이다. 무엇이 선악인가, 얼마나 유익된 것인가, 얼마나 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인가, 그것이 하나님적이냐 세상적이냐로 판단할 때 히브리적 사고가 되는 것이다.

 

저는 참 감사해요, 당료가 아직까지 당화혈색소 약을 먹는데 7.2 라서 되도록이면 운동을 좀 해요. 무릎에 또 물이 차서 제가 참 감사한 것은 국가유공자가 되어서 군 골프장에 가면은 29,000 35,000 이래요. 거기 가서 걸으면은 한 만 오천 보, 또 긴 데는 이 만보 정도 걷더라고, 가서 운동을 하는데 같이 하는 사람들이 죽자고 달라 들어요. 그러면 저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이것 잘해 가지고 뭐 하려고 이래요, 기분 조찬아, 나는 뭐냐 하면은 그것 잘해 가지고 뭐 하려고, 그것 이기려고 하다가 스트레스 받아 가지고, 나는 걸으러 오는 거에요. 그래서 카트 해서 걸어요. 그래서 유익이 되는 거에요. 이해 되세요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가 여러분들이 부자가 되는 것, 부자가 되면은 여러분들에게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몰라요. 어떤 부자가 되어야 되는가, 자기에게 누림이 되고, 그 누림이 타인과 나눔이 될 때에 그 부유함이 자신에게 행복이 되어져요. 그것은 하나님께로 오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어야 되요.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의 시각을 가지고 내가 지금 살아야 되요. 그러면은 여러분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 뭐든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갖고 판단하는 게 아니고, 어느 것이 네 삶의 유익이 되느냐를 가지고 봐, 제가 여러분들 가치판단을 얼마나 성경적이고 종교적인 규범에 합당하고 안 합당 하고를 판단을 안 하니까 여러분들이 참 편한 거에요.

 

얼마나 교인들에게 행복한가, 뭐 교회 크게 하고, 뭘 하고 이럴 때에 저는 뭔가 하면은 그것 가지고 선악을 안 봐요. 교인 행복하면 되지. 우리 교회가 앞으로 뭐 크게 해서 뭘 하고, 그것 안 봐요. 지금 여러분들이 행복하면 되는 거에요. 이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이에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 교리적 가치판단, 헬라적 사고로서 가치판단 하는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교리를 내가 믿는 게 진리라고 생각하고 사회적인 통념을 잘 실행해 나가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교회를 세우는 것은 여러분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박해 했다고 그게 나쁜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가 왜 나쁜 것인가, 평등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왜 나쁜 것인가, 자유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수정을 안 하다가 망했지만, 자유주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수정을 해 나가잖아요. 어두운 면을 스스로 정화해 나가잖아요. 왜 기독교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여러분들의 유익과 선함은 무엇으로 하는가, 교리나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에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합법적이에요. 무엇이 선악인가, 얼마나 유익된 것인가, 얼마나 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인가, 그것이 하나님적이냐 세상적이냐로 판단할 때 히브리적 사고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이에요.

 

10. 히브리적으로 보면은 이것이 나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가, 공동체를 세우는가, 허무는가가 선악의 판단의 기준으로 봐 진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똑 같이 사업을 열심히 해서 부자가 되어서 나는 교회 헌금 많이 해, 헌금하려고 사업 해, 그것이 선악의 구분의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분량에서 나도 누리고 타인도 누리고,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요, 미래를 하나님 손에 맡기고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들, 그래서 우리 교회 잘 쓰는 말, 누림이나 쉼이라는 말, 하나님과의 올바를 관계 속에 있을 때 진정한 누림이 있고, 교회가 성경적인 관점에서 세워 져 나갈 때 쉼이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그것은 여러분들이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살고, 진리 속에 있으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요, 성경을 헬라적으로 보느냐 히브리적으로 보느냐, 헬라적으로 보면은 성경의 모든 것을 진영 논리로 봐요. 교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요.

 

히브리적으로 보면은 이것이 나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가, 공동체를 세우는가 허무는가가 선악의 판단의 기준으로 봐 져요. 지금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고, 그 제사에 참여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를 가지고 교리 적으로 신학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그들에게 틀렸다가 아니에요, 너희들의 말이 맞다, 교리적으로 맞다, 그러나 그게 너한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 교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것보다 정말 너희에게 유익한 것이 뭔가 생각해, 신전에 가서 그들과 길드에 참여해서 네 사업이 잘 되는 것이 네 삶이 유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의 영향 때문에 생기는 말이야.

 

성령으로 인한다면은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이 나에게 행복일지 불행일지는 모르는 거에요. 정말 너희들이 유익 되어지고, 공동체가 세워 나가는 것으로 대립보다는 각자의 변화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돼. 하도 요즘 여러분들이 이분법적 사고로서 우리나라 두 동강이 탁 나서 제가 조국의 문제도 여러분들에게 말하면 목사님들이 뭔가 하면은 나는 조국이 너무나 고맙다 이랬어요. 제가 현재적 시각으로 보지마, 제가 지난 주일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했지만 목사의 특권 중에 축복이 뭐냐 하면은 가장 높은 사람이나 가장 낮은 사람이나 누구나 교제할 수 있어요. 목사는 교도소에도 들어갈 수도 있고, 수도원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어디에나, 예전에는 지금 목사가 목사 노릇을 못하니까 금지 구역이 많지만 옛날에는 중환자실에도 목사라 하면 면회 시간 말고도 들어갔어요.

 

권사인데 테헤란로에 높은 빌딩을 가지고 있는 권사에요, 가장 요지에요. 이야기는 못하겠는데, 돌아가셨을 거에요. 엄청난 부자지요. 남편이 국세청장 지낸 분이에요.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에 장로님들 연결도 시켜 주고 했는데, 이분이 뭐라는 가 하면은 우리 교회에 또 이 헌당식 할 때에 와서 십 만원 헌금 했더라고 감사 헌금 그 돈 많은 사람이, 자기 친구는 생일날 선물로서 아들한테 받았는데 10억짜리 뭐 자동차를 받았다고 이래 자랑하면서 그 다음부터 내가 연락 안 했어요. 왜냐하면 그 부자가 유익에요 유익이 아니지요. 내가 부자 아는 것이 뭐 자랑 입니까, 얼마나 교회에 유익이 되고, 주변의 사람에게 유익이 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판단이지요. 저는 보는 게 달라요.

  

11.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 죽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교회되게 해 나가신다. 히브리적 사고로 가지고 보는 순간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이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사의 대한 거대한 계획 속에 모든 것을 볼 때만이 보여 지는 세계다.

 

저는 볼 때에 이것을 성경적으로 보는 시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악함도 선용해서 아름답게 이루어 가세요. 제 목회 13년 동안 이곳에서 저는 망할 짓 실수만 했는데, 교회는 하나님이 세워 가세요, 그것을 가지고 잘했니, 못했니, 판단을 해 나가는 순간 교회는 끝나 버려요. 우리 장로님들이 잘했니, 못했니 내가 판단해서 끝나 버려요. 그것은 하나님 몫이에요. 잘못한 것도 하나님은 교회를 유익되게 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세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다 죽임을 당했지만은 그 죽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교회되게 해 나가시는 하나님. 이것을 보셔야 되요. 어렵습니까, 슬픈 일이에요. 생소한 거에요. 보편적이어야 되는데 이게, 다 알아들어야 되는데.

 

너무 헬라적 사고로 성경을 보는 것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적으로 성경을 보는 것으로 하니까 생소하니까 목사님 설교는 어렵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설교는 여러분들이 열 번을 들으세요, 들어도 내 시각으로 판단 하면서 듣는 게 아니고 왜 목사님이 저런 말씀을 하시지, 이 시각으로 이 설교를 들으면은요 새로운 세계가 보여요.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시크릿트가 아니요 숨겨 진 나라가 아니요, 시크릿가든이 아니라니까, 미스터리 가든이에요. 누구에게나 다 드러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 드러나 있는데, 헬라적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안 보여요. 히브리적 사고로 가지고 보는 순간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이 보여요.

 

나태주 시인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고 우리 교회 어제 회복이 있는 잔치 마치고 뭐 어떤 분이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더라고, 결핍과 가난이 복이었다는 거에요. 그게 거듭나지 않는 시각으로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내 삶의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었다는 것을 현재적 유불리로 가지고 보는 시각을 가지고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구원사의 대한 거대한 계획 속에 모든 것을 볼 때만이 보여 지는 세계에요. 아멘

 

◈봉한 기도◈

 

아버지 하나님 주님 앞에 드리는 헌금을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헌금이 아니고, 거룩한 식탁에 참여하는 존귀한 헌금이 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복 줄 것을 기대하며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나에게 주신 것을 누리기도 하고 나누기를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이야말로 주의 잔에 참여하는 것이고 거룩한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되느냐 안 드려야 되느냐, 헬라적 이분법적 사고로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는 평가하지 아니하고, 이 헌금의 제도를 주신 좋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헌금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지 않고, 헌금의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드리고도 아까운 마음 없게 하여 주시고, 드린 것들이 바벨탑을 쌓듯이 부동산 사고 인간의 의를 위해서 좋은 일 하는데 쓰여 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행복해 하도록 나그네 인생길 가운데 쉼을 얻는 방주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잘 사용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고, 사랑하는 성도들 교리적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 가치로 나에게 유익이 되느냐 손해가 유블리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합당하냐 안 하느냐로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 인생에 무엇이 유익인 것을 알게 하시고, 나에게 아무리 유익이라도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데 허무는 것이라면은 그것 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성숙된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도록 이 예물도 재정의 목적을 따라서 주님 앞에 드리오니 열납해 주시옵소서. 입원 중에 있는 성도들 회복 중에 있는 홍영란집사님에게 투여된 골수가 잘 정착해서 다시 성가대에 앉아서 하나님의 선물을 찬양할 수 있도록 주님 긍휼이 여겨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참여한 자들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최상의 수고함을 하나님이 주신 줄  알아서 자신의 모든 삶의 여건을 받아 드리되, 하오나 젊은이의 죽음이 없도록 주님 긍휼이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시고, 지금도 성령을 보내어서 선하고 아름다움을 이끌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동시에 보여 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의 속성을 통하여 역사 속에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공의와 사랑의 속성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서 헬라적진영논리 이분법적사고를 하나님 안에서의 통합적 생각으로 변화시키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진영논리 헬라적이분법사고로 두 동강이 나가 있는 대한민국, 두 동강이 나 있는 한국 교회를 히브리적 생각으로 통합적 생각으로, 각양 좋은 은사는 하나님께로 오는 줄 알아서 자신의 유익보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고, 과거를 볼 때에 현재의 시각으로 보지 아니하고, 현재를 바라볼 때에 미래의 시각으로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남들이 걸어가지 않는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권속들과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맛보도록 선물로 주신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