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웅담임목사주일설교원고

진정한 자유와 이김(고린도전서 10: 27-30)주일 낮 예배 설교문

차주희 2019. 11. 1. 23:07

 

 

 

담임목사 김종웅

진정한 자유와 이김

고린도전서 10: 27-30

2019 10 27일 주일 낮 예배

                                                                                                                                              No. 440

27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아멘

 

성경 말씀을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나 또 위로를 받으려 한다면 잘못하면 미신이나 심리학이 된다. 근본주의 신앙(신학)들이 문자주의 축자영감[逐字靈感]만이 아니고 성속[聖俗]을 구분한다. 헬라어에는 제물을 에이돌로투톤(우상제물)이라는 말과, 히에로투톤(성전제물)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 같은 것을 꼭 설교 본문으로 해야 되느냐,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내면은 어떤 면이냐 하면은 성경을 통해서 좋은 말씀,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말씀 교훈을 찾으려고 성경을 읽으면은 또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말씀에 줄을 그으면은 기독교는 윤리가 됩니다. 그러면은 여러분 세상에 상대적 진리로 격하되는 아주 잘못된 거에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잘 될 거야 라는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나 또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면은 그런 것은 잘못하면 미신이나 심리학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것들도 다 문제는 뭐냐 하면은 좋은 약간의 도움은 있지만은 그리스도에 있는 생명, 영생을 잃어버리게 하는 기독교의 참 본질을 잃어버리게 하는 정말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1. 우상에게 바쳐 진 고기를 먹어야 되느냐 안 먹어도 되느냐, 당시에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중요한 문제였었다.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근본주의 신학도 있고, 개혁주의 신학도 있고, 신정통주의 신학도 있고, 많은 신학이 존재한다.

 

오늘 성경 본문도 여러분들이 보시면은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안치만은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의 색갈이 달라집니다, 신앙의 색갈이 달라 지는 것에 따라서 신앙적 유익과 또 교회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종교적 과업의 성취만을 일어나게 하는가, 하는 정말 중요한 문제들이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해석을 우리 교회 다니면서 정말 올바른 성경 해석에 의한 신앙 생활 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되요. 자꾸 이 어려운 세상에 교회를 통해서 위로를 받는다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것들 때문에 여러분들의 삶에 허황된 신기루를 좇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깨어 나게 된 것들을 너무나 감사해야 되요.

 

그러지 아니하고, 일반 교회 다니는 거와 같은 예전에 신앙을 가지고 우리 교회의 모든 삶을 평가한다면은 교회의 출발부터가 잘못된 거에요. 오늘 여러분 고린도전서 8 9 10장에서는 처음에는 우상에게 바쳐 진 고기를 먹어야 되느냐 안 먹어도 되느냐, 당시에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중요한 문제였어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또 우상인 신전에 가서 믿지 않는 자들과 교제를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이런 문제에 대한 것들, 또 그곳에 가도 우상 숭배에 대해서 하지 않으면서 교제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 이런 것들에 대한 쭉 말씀을 하고, 오늘은 뭣이냐 하면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것은 세상에 있어요.

 

그래서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함께 교제하며 살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그래서 불신자들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일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그때의 그런 모습을 통해서 말씀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은 뭐라는 가 하면은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지금은 여러분들이 이런 문제가 별로 큰 문제가 아니지만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고, 또 이 문제를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색깔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당대에 불신자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고기가 차려 져 있어요. 초대를 받았는데.

 

그럴 때에 묻지 말고 먹으라, 라는 말은요 단순히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기독교인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도리나 상식 선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어야 된다 이런 말이에요. 이런 말씀들의 삶이 여러분들은 왜 중요하냐 하면은 우리 한국에는 신앙이 들어올 때에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성경이지 만은요 이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근본주의 신학도 있고, 개혁주의 신학도 있고, 신정통주의 신학도 있고, 많은 신학이 존재해요. 여러분 우리 한국에 교회의 신앙이나 그 다음에 교회의 전통은 19세기 말에 우리가 들어와서 21세기를 거칠 때 그 때 선교사들이나, 세계적 신학의 사조가 뭐냐 하면은 근본주의 신학이 보수 신학 속에 중심에 있었어요.

 

2. 신학적으로 말을 할 때에는 일반 은총 특별 은총이라 한다. 대부분 일반 은총을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근본주의적 신학이다. 우리 원래 장로교는 칼빈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가는 이 신앙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일반 은총이다.

 

왜 그랬는가 하면은 17세기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그 계몽주의가 교회에 영향을 주어서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왔고, 교회를 흔들었다고요. 그래서 그것을 변정[辨正]하기 위해서 강한 근본주의 신학을 주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 때였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에게 교인들에게 지금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라 하지 말라 하면 되겠지만은 그래 안 하잖아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들은 어린 얘가 아니고 로봇트가 아니고,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숙한 어른이다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치판단을 할 줄 알아야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도 하는 거에요.

 

그러면 근본주의 신앙(신학)들이 대부분 보면 뭐냐 하면은 문자주의 축자영감[逐字靈感]만이 아니고 성속[聖俗]을 구분해요. 그래서 옛날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불신자와 교류화 된다든지 불신자의 생각에 그냥 아주 분리하는 이런 신앙을 참 많이 가졌다고요 선교사들이, 왜냐하면은 우리 한국에서 그 당시에는 기독교가 소수였고,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자칫하면은 세상에 물들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들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그저 저 예수 안 믿는 저 사람들은 옛날에는요 사탄의 자식이라든지, 또 뭐 여러분 타 종교에 대해서는 굉장히 터부시하는 이런 것들이 당연히 우리 속에 있었고, 그런 것을 잘 가리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그런데 우리 개혁주의 신앙 제가 어릴 때만 해도요 장로교 외에는 다 이단인 줄 알았어요. 또 그렇게 가르쳤고 목사님이, 그러면 이 장로교는 정치 체계로서 말을 하는 것이고, 신학적인 사상은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그러면 이 개혁주의 신학은 뭐냐 하면은 지난 주일도 여러분들에게 제가 시편 24 1절 말씀에 인용이다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것이라는 거에요. 옛날에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 할 때에 언제까지 세상일만 해, 돈만 벌려고 해, 와서 예배 드리고 선교하고 하나님 일을 하지, 전부 근본주의적 신앙 속에서 나온 것들이에요. 그런데 진짜 장로교는 뭔가, 진짜 성경은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도 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인문학도 좋은 것, 인문학은요 여러분들의 신앙의 유익이 되는 좋은 것이에요, 인간이 만들었다고 다 나쁜 것이 아니에요. 이런 것들을 신학적으로 말을 할 때에는 일반은총 특별은총이라 그래요. 대부분 일반 은총을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근본주의적 신학이에요. 우리 원래 장로교는 어떤 것이냐 하면은 여러분 칼빈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쭉 연결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가는 이 신앙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일반 은총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와서 제 설교를 들을 때에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또 신앙인들은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면은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머리에 강한 자극을 주려고 이런 용어를 만들어 내는 거에요.

 

3. 진리를 믿어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보면은 상식이 통하는 삶, 이런 것이 개혁주의 신앙이다. 특별은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반은총을 부정하지 않고, 존중해 준다. 자기의 사상이 복음적으로 비추어져서 새롭게 되도록 노력 해주는 것이 선교고 그것이 바로 믿는 것이다.

 

진리를 믿어야지 네가 믿는 게 진리가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거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분리주의자가 되고, 트러벌 메이커가 되는 거에요. 자기의 모든 삶은 합리화 하고, 남들은 정죄하는 일들, 그런 것이 죄인의 삶이에요,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은. 사람들 중에 제일 답답한 게 뭐에요, 자기가 보는 게 다인 줄 아는 거에요, 그건 어린아이들이에요. 성숙하면은 내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어져요. 그런 것이 뭐냐 하면은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서 사는 거에요. 지금 여러분 신앙이 좋다 안 좋다 하는 것도 이런 것 아셔야 되요. 진리를 믿어서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행동에 보면은 상식이 통하는 삶, 이런 것이 개혁주의 신앙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말하는 것이나 주장들 보면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왜 그랬는가, 우리 한국의 선교로 인하여 복음이 들어올 때에 그때의 상황이 그런 상황이었다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날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모습을 성경과 복음으로 비판하면서 새롭게 되어져야 되요 지금.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좀 상식적인 교인이 되었으면 해요. 그러려면은 내가 믿는 것이 진리가 아니구나 내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내가 경험한 것이 다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으로부터 신앙 생활이 출발 되어져야 되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나중에 말씀 드리겠지만 오늘 본문을 여러분들에게 좀 더 잘 설명을 하자면은 자 묻지 말고 먹으라고 그러고 난 뒤에 28절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여기에도 참 중요한 말씀이 있어요. 여기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할 때 이 제물은 우리나라 말에는 제물 이랬지만은 헬라어에는 제물을 에이돌로투톤(우상제물) 이라는 말과, 히에로투톤(성전제물)이라는 말이 있어요 제물도. 에이돌로가 뭐냐 하면은 우상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요즘도 여러분 영어에 아이돌이 우상이라는 말이고, 지금도 우리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 아이돌 아이돌 하는데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말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에이돌로투톤 이라고 할 때에는 굉장히 그것을 비하하는 말이에요. 먹어서는 안 되는 쓰레기와 같은 음식 이런 말이에요. 히에로투톤이라는 말은 똑 같은 고기를 가지고 굉장히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말할 때 성전 제물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불신자 집에 초청을 받아서 차려 진 이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 진 고기인데, 바울은 뭔가 하면은 에이돌로투톤 이라 안 하고 히에로투톤이라 말한다고,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말을 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면 근본주의가 되는 거에요. 분명히 우상이라는 것을 실체는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지만은 바울은 이 세상에서 그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우상숭배에 빠지고 있는 그 사람들을 사탄의 새끼라 하지 않고요, 불쌍히 여기지만은 그 사람들의 생각과 그 사람들의 사고를 존중해 줘요. 특별은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반은총을 부정하지 않고, 존중해 줘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쓰는 용어대로 이 고기를 히에로투톤이라 이래 해 준다고, 오늘날 여러분 이런 말씀을 이렇게 해석을 제대로 해주면은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불상을 가서 때려부수고, 예수 안 믿는 동서를 보고 사탄이니 이런 말 안 한다고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저 지난주에 설교할 때에 그 사람의 사상적 자유를 인정해 주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인정을 해 주지만은 그 사람이 자기의 사상이 복음적으로 비추어져서 새롭게 되도록 노력 해주는 것이 선교고 그것이 바로 믿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종교 원리주의자들 다 보세요 쳐부수고 이런 것들이 다 분리주의자들 속에 나오는 거에요.

 

4.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지은 자다. 우상에게 바쳐 진 그것을 에이돌로투톤 하지 않고, 히에로투톤이라 해 준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그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제물이라고 바울은 인정은 아니라 말이다. 신앙적 양심은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 있는 양심이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은.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이 지은 자녀라고요. 제가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씀하는 거에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예수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에요. 하나님이 지은 자에요. 그런데 그는 어떤 자인가, 제가 웃으면서 이야기 했지요. 심각하게 들으세요 웃으면서 해도, 이런 말은 설교에 써서 죄송한데, 여러분들에게 각인이 되라고 하는 거에요, 호로 자식이에요, 부모는 부모인데 부모를 부모인 줄 모르는 자식이라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인정 하지 않는 호로 백성이다 이런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말도 우리끼리 있을 때 하는 말이지요. 그 사람들 앞에 가서는 그 사람들의 인격도 고귀하게 인정 해주는 것, 내 말이 아니에요 성경이에요. 우상에게 바쳐 진 그것을 에이돌로투톤하지 않고, 히에로투톤이라 해 준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그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제물이라고 바울은 인정은 아니라 말이에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오늘도 여러분 교회에 다지면서 이런 부분 아셔야 되요. 목사님이 여러분들이 모르고 이런 사람들 입장 헤아려 주어요. 왜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 전부 자기 입장에서 말하면 되지 안 해요. 그런데 고 다음에 보면은 더 그런 것들이 명확하게 들어 나는데요,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여기에서 그러면 그 알게 한 자가 누구냐라는 문제는 또 다른 해석의 중요한 문제에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불신자 초청 자 집주인이 알게 했다. 왜 알게 했는가, 집 주인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똑 같은 고기가 있지만은요 이 고기가 신전에 바쳐 진 고기는 아마 그때 비쌌을 거에요. 귀한 것이었을 거에요. 그래서 초청을 해 놔 놓고, 내가 이 고기는 어제 제사를 지낸 신선한 고기야, 내가 귀한 것 당신에게 대접해, 이렇게 말을 해 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럴 때에 여기 이 말씀은 뭐냐 하면은,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이런 말을 했을 때에는 먹지 마라,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이렇게 해석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해석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은 양심이라는 말에 걸리는 게 있어요.

 

여기 이 양심은 신앙적 양심을 말하는데, 8장에서도 봤지만은 신앙적 양심은 최소 한도로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 있는 양심이에요. 다시 말하면은 여러분들에게 오늘날 용어대로 이야기하면은 주일날 교회에 가기 위해서 내가 사업장에 문을 열지 말아야 되는 것은 최소 한도고 신앙이 있는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양심이지, 안 믿는 사람 속에는 그런 양심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을 여러분 비판하고 판단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이것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면 어떤 상황인가, 집 주인은 초대된 사람에게 조금 더 좋은 것을 대접하기 위해서 어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린 그 음식을 비싸게 가지고 와서 대접을 하는데 초대된 교인들 중에는 오지랍이 있어서 믿음이 약해 가지고 마치 자기는 모든 고기를 먹을 때마다 이것이 신전에서 바쳐 진 고기냐 아닌 고기냐 가려 가지고 바쳐 진 고기는 안 먹는 것을 자기 의로 내세우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물은 거에요.

 

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때로는 신앙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배려하고 끌려 다녀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해 버린다고, 그러면 자기 의가 된다. 자기 의는 사단의 신앙 생활이고, 은혜로 인한 신앙만이 하나님에 의한 신앙 생활이다.

 

이것 어제 바쳐 진 고기 입니까, 그러니까 주인이 예 어제 제사를 지냈는데 손님들 모신다고 제가 특별히 가져온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물은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신앙적 양심을 위해서 너는 그 고기를 먹지 말라. 요 부분에서도 다시 29절에 가면은 또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자 요 말씀은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신앙적 양심은 네 것이 아니야,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너에게 준 양심이야, 이런 말인데, 굉장히 난해[難解]한 해석이에요. 지금 나는 그 고기를 먹을 믿음의 신앙적 양심이 있어, 그런데 내가 이것을 먹으면은 그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실족을 당하는 자기 의에 의한 믿음이 약한 사람의 신앙의 양심이 다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럴 때에 여기에 이 말씀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오 이런 말씀 이 말씀도 여러분 뭐 토시 하나에 따라서 사람의 말이 완전히 달라지듯이 성경도 그런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또 어느 정도 제대로 신학적 통찰력이 있는 목사들은 성경도 아무 성경이나 읽으면 안 돼, 주석 성경 같은 것 읽지 마라 그래요. 왜냐하면 그 주석이 잘못 되었을 때에 완전히 잘못된 신앙으로 빠지잖아요. 여러분이 현대어 성경에 보면은 참 어역 [語域]에서 쉽게 해 놨어요. 그 양심을 묻지 말고 먹으라 하니까 그 다음에 어역을 어떻게 해 놨는가 하면은 이 사람이 반문을 하는 거에요,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끌려 다녀야 합니까, 스스로 질문을 해요. 그럴 때에 끌려 다녀야 할 이유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31절에 그래야 된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들이 읽어 보시면 해석이 되어져 있어요.

 

그러면 이러면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은요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때로는 신앙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배려하고 끌려 다녀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해 버린다고, 그러면 자기 의가 되어져요. 요 문제 때문에 진정한 이김과 진정한 자유가 교회 안에 없는 거에요. 여러분 이것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자기 의는 사단의 신앙 생활이고, 은혜로 인한 신앙만이 하나님에 의한 신앙 생활이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자기 의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요. 그래서 현대어의 성경 같은 경우는 여러분들이 이말 보다 그것 읽으면은 의미를 확실히 이해 되지만은 잘못된 해석이에요.

 

1992 10 21일 주님 재림한다고 해서 우리 한국이 얼마나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요, 우리 동기도 거기 빠진 목사 있어요. 그 시작이 누구냐 하면 이장림 목사잖아요. 그렇게 가정과 모든 것 파탄 일으켜 놔 놓고 나중에 자기는 천국 가려고 회개한다 하고 다시 그는 돌아왔어요. 그렇게 깨어진 가정 깨어진 교회 그것은 어떻게 하려고, 이장림이가 어떻게 해서 그런 것에 빠졌는가, 현대인의 성경 아시지요. 그 번역자 입니다. 그 현대인의 성경이 뭐냐 하면은 영어 성경 중에 리빙바이블 본문을 어역한 부분이 많은 것,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이나,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킹제임스 번역 외에는 또 인정을 안 해요. 그것도 잘못이에요.

 

6. 내가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서 내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행동에서 설명을 하고 난 뒤에, 그러한 신앙의 양심과 그런 삶은 거듭난 자 속에 있는 신앙의 출발을 여기에서는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킹제임스 번역 16세기 아주 옛날 고전과 같은 고어로 된 영어 고어로 된 성경이지만은 그 성경은 그래도 원문에 충실 하려고 해요. 그런데 그것만이 텍스트라고 하면은 그게 우상이 되어 버려요, 그것도 비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에 비해서 그래도 성경적이에요. 그러면 이 말씀은 뭐냐, 8장에서는요 이런 말이에요. 은혜로 인한 것을 아셔야 되요. 8장에서는 내가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서 내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행동에서 설명을 하고 난 뒤에 그러한 신앙의 양심과 그런 삶은 거듭난 자 속에 있는 신앙의 출발을 여기에서는 말해 주는 거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그런 말이에요.

 

내가 고기를 그렇게 이 오지랍이 넓어 가지고 자기는 잘 믿는다고 하고, 고기 앞에 놔두고 따지는 이 사람에게 그래서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 진 고기인 것이 드러났을 때 집 주인은 그래도 귀한 것 대접한다고 해서 그렇게 대답을 했는데 이 사람의 신앙 믿음이 약한 사람의 신앙을 고려해서 배려해서 나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 먹지 말라, 그 대신에 그 고기를 대접하는 불신자가 그렇게 귀한 것이라고 나름대로 신앙적 양심이 없어서 자기 관점에서 귀한 것을 내 놓은 것은 에이돌로투톤이라 안하고 히에로투톤이라 해서 또 인정 해주는 거에요. 얼마나 멋진 삶인지 몰라요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 한국 교회에 이런 정말 상식이 통하면서도 생명 있는 그런 행동이 교회 안에서나 목사님이나 교인들 속에 안 나타나는가, 제가 볼 때에는 신앙의 출발이 너무 잘 못되었습니다.

 

오늘도 제가 이런 이야기 한다고 이런 말 했다고 여러분들이 시험 들지 말고요 돌이키세요.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여러분들 속에 열려요. 가끔 심방 가서 물어 보면은 왜 교회 다니냐 하면은요 이런 분들 있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잖아요, 인간의 실존은 불안이라고, 이런 것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을 평가한 것인데 맞는 이야기잖아요. 신학적인 면에서 왜 인간의 실존이 불안이냐 하면은 유한한 존재 이기 때문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런 대답이 나와요. 그래서 심리학은 성경을 가지고 안 하면은요 현상에 대한 것만 설명해야지 근본적인 것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해결책이 없는 거에요. 여러분 인간은 불안한 존재에요 누구에게나.

 

그래서 교회에 다닐 때에도 복음을 접하지 못하면은 그저 뭔가 내가 하나 믿기는 믿어야 되는데 그래도 기독교가 좀 신사 같으니까 교회 다닌다고, 내 자녀에게 뭔가 하나 믿음은 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여러분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람이 살면서 친구 세 명은 있어야 된데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몸 아플 때 봐줄 수 있는 의사 친구 있어야 된데요, 또 하나는 억울할 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변호사 친구 있어야 된데요, 또 하나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 안 되면 목사 친구도 있어야 된데요. 그럴 때 그 목사 친구가 자기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목사가 필요하다고 한다는 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자녀에게도 다 요즘은 갖추어 주는데 종교도 하나 가지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살면서 어려울 때에 그래도 뭔가 믿을 것을 하나 만들어 주어야 되지 않느냐,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과 복음을 하나의 일반 은총 측면에서 보는 거에요.

 

7. 생명 있는 복음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앙이 하나님과 만남으로부터 출발 되어야 된다. 그 하나님과 만남도 환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되는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발견해 봐야 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은 나는 죄인이란 고백이 나온다.

 

그러니까 생명이 안 나타나는 거에요. 얼마나 예수 믿고 난 뒤에 변화된 가치관 속에서 이전에 경험 해보지 못했든 새로운 세계의 경험, 이전에 느껴 보지 못했든 정말 가치 있는 감정과 기쁨의 삶을 출발 못하는 거에요.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복 받으려고, 그러면 미신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정말 생명 있는 복음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앙이 왜 되어야 되는가 하면은 하나님과 만남으로부터 출발 되어야 되요. 그 하나님과 만남도 환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되는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발견해 봐야 되요. 그러면은 세상이 달라진다니까요. 그게 뭔가 하면 이런 거에요.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은 능력 받는 것 아니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이 나와야 되요.

 

그 동안 내가 보는 것이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하고 다른 것은 모두다 재단하고 배척했든 이 완악한 죄인입니다 이런 것이 나와야 됩니다.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발견한 순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남들보다 더 높은 것, 더 많이 가지려고 했든 것,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그저 움켜 쥐고 살았든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요. 내가 알고 있는 이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이 없는 사람을 믿음을 판단하고, 어디에 가나 이것이 고기를 먹는 것이 될 것인가 안 먹어야 될 것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우상에게 바쳐 진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고 하는 이 행동이 얼마나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어져요. 여러분들 속에 이 경험으로부터 신앙이 출발되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좀 하기 위해서 제가 한번 이야기 했잖아요. 저는 어릴 때에 아버지에게 내 주장이 참 강했어요. 왜 내가 경험하고 내가 본 세계가 다인 줄 알았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내 아버지를 재단했어요. 그랬는데 군대 갔는데 그런 나를 자식이라고 기다려 주고 학비 주고 밥 주는 것, 낳은 자가 아니면은 할 수 없는 행동을 알면서 그 밤에 수용은 되었어요, 편지지에 눈물이 편지지를 젖을 만큼 불효 자식 올립니다 했어요. 여러분 거기서부터 사람다운 삶의 출발이 되어지는 거에요. 부모에 대해서 내가 주장 안 하게 되어져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를 안 믿을 때에도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기 주장 많이 해요.

 

8. 십자가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은, 주님 이 죄인을 용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용납해 준다. 이런 사람들은 특별은총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일반은총도 다 가지게 되어진다.

 

내가 행한 조그마한 것을 이만큼 침소봉대[針小棒大] 해 버려요. 그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다 없애 버려요. 그저 고기 하나 신전에서 바쳐 진 고기 하나 이것 가려서 먹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을 해서 그것을 배려하는 신앙을 정죄하고 이랬든 자신의 그 교만, 자신의 그 아집, 그런 나를 하나님 자녀 되도록 사람 되도록 십자가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은, 주님 이 죄인을 용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때부터 내가 보는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이 깨달아 져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요. 그러면서 경험 해보지 못한 사람의 심정도 헤아려 져요. 나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용납해 줘요. 이런 사람들은 특별은총안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일반은총도 다 가지게 되어져요.

 

이런 사람 거듭나게 되면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 되어져요. 어디에 가나 티는 행동이 일어나지 안 해요. 교회는 티는 행동이 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해요. 남 틀렸다고 내가 맞는 것도 아닌데, 세상은 남 틀린 것만 들어내려고 한다고요 자기 의에요. 무엇이 없는가, 회개가 없는 거에요. 돌아섬이 없는 거에요. 아버지 낳았으면 이래야지요, 아버지가 원하는 것, 내 형편에서 생각해 보세요, 왜 나에게 강요해요, 그런 자식을 팽개치지 않고, 기다려 주어요. 군대 갔더니만 내하고 생각이 달라도, 내 하고 싶은 대로 안 하면은 용서와 용납이 없어요. 철저한 채찍과 보상만 존재해요. 그때 누가 보이는가, 이 못난 자식을 기다려 주고 용납해 준 부모가 그래서 부모의 본질을 만나게 되면은 불효자라는 말이 나와요.

기도의 응답이라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복 주었다는 간증 속에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절대로 이게 안 나와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내 주장하고, 내 조그마한 경험과 내 생각으로 모든 세상을 잣대 다 잣대를 가지고 재단해 버리고 내 조그마한 행한 의는 이만큼 생각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 몹쓸 짓만 했는데 그런 나를 팽개치지도 않고, 저 의롭고 바른 사람을 하나님 자녀 삼아 주지 않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었고, 이 회개의 출발이 되어지면은 희한한 가치가 생겨요. 성령이 여러분들 속에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능력이 있느냐, 종교적인 의가 있느냐 열심히 있느냐 이것 아니에요. 회개가 있고 이런 사람 속에 성령이 있으면은요 이상한 가치가 생겨요, 어떤 가치가 생기는가, 옛날에는 남에게 이기는 것이 이긴다고 생각했는데, 저주는 것이 이기는 줄을 알게 되요.

 

9.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발견해서 죄인이라는 고백에서 출발해 보면, 나중에 보면 저 주는 자가 이기는 것을 알게 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면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저 주신다. 이제는 남을 이기려고 하는 세상 속에서 저 줄 수 있는 기독교인이 되자.

 

우리 사회 보세요, 전부 이기려고 해요, 그래서 자기의 옳음만 주장해요. 저주는 사람 없어요. 그래서 생명이 이 사회의 물이 생수가 흘러가지를 안 해요. 건조해요. 왜 회개가 없어요, 진정한 하나님의 만남이 없어요. 신앙의 출발이 심리학적으로 출발 되어져 버려요. 여러분 어떤 신앙으로 출발 되었던 간에 오늘부터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발견해서 죄인이라는 고백에서 출발해 보세요, 지금은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 같지만은 나중에 보세요, 저주는 자가 이기는 것을 곧 알게 되어져요. 우리말에 있잖아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어요, 누가 저 주는가, 부모만이 저줄 수 있어요. 교회도 오면은 전부 안 지려고 그래요. 자기만 옳다고 그래. 그 자기 옳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나쁨을 들추어 내야 되요. 자기가 보는 세계에서는 그거니까. 출발이 있어야 되요. 오늘 있어야 되요 여러분들 속에.

 

진정한 이김은요 저주는 것에서부터, 성경 해석부터 잘 못되었습니다. 전부 하나님은 이긴다는 하나님이에요. 제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면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저 주어요. 창조자가 피조물 이겨서 무엇 하겠어요. 부모가 자식 이겨 가지고 뭐하겠어요. 자식이긴 부모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면 다른 사람은 뭐라고 그러겠어요, 뭐 저 따위 부모가 있어,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늘 저야 됩니까, 이겨야 될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독선이라고 해도 아집이라 해도 버려서는 안 되요 그것은 다음주일 이야기할 거에요. 오늘은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용납해 주신 저 도적보다도 더 악한 나를 용납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 속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남을 이기려고 하는 세상 속에서 저 줄 수 있는 기독교인이 되세요. 무엇에 대해서 지는가도 알아야 되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더 높은 곳에 가야만이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실상 보세요, 왜 대통령 되려고 하는가, 대통령만 되면은 다 할 줄 알아요. 세상에 감옥 중에 그런 감옥 없는 것이 청와대라 하잖아요. 여러분 많이 가져서 높은 곳에 가서 누리는 그 자유는 방임[放任]이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감정은 진정한 자유에요. 이러한 삶의 가치의 출발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죄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내주장하고, 다른 사람 판단 정죄하고, 내가 보는 게 다라고 생각했든 이런 나를 하나님은 목사 삼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가 있을 때, 교인 이기려고 안 해요. 다른 사람 이기려고 안 해요. 다른 사람에게 내 옳음을 인정 받으려고도 안 해요. 그 자유가 오늘 여러분들 삶 속에 출발 되어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산 짐승을 제물로 드릴 수 없듯이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 결코 제물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죽은 짐승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듯이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내 주장하든 내 자신이 죽어 진 자의 예배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임을 믿습니다, 헌금의 행위에서 더 많은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나, 자기의 의를 들어내려고 하는 그런 예물은 주님이 받지 아니하는 예물임을 믿습니다. 남들에게 보이는 부분에서만 흥청망청 돈을 아낌없이 쓰고, 하나님만이 아는 헌금에 인색한 자의 헌금의 행위는 주님이 받지 아니함을 믿습니다. 창조한 자이기에 오늘날까지 나를 존재한 자이기에 오늘날까지 하나님 앞에 늘 자기를 주장하는 자도 내치지 않고, 용납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생명보다 귀한 돈을 주님 앞에 드린 자만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이 보이고, 그런 자들의 행위가 아골골짜기 같은 세상에 생수가 되어 흘러 넘쳐 나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 그저 예배의 순서에 참여하는 예배를 보러 오는 자가 아니라, 예배 자가 되게 하심을 감사 드리오며 설수도 없는 자에게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납하시는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계시해 주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믿어 지게 하시고, 고백케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무한하신 은혜 그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세상에 학벌 있는 자, 가문 좋은 자, 의로운 자 많이 있지만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여 주님 앞에 드릴 것 없는 연약한 자, 사람들에게 내 세울 것 없는 자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 주장이 허물어 지도록 보혈의 피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무한하신 은혜와 창조자에게만 있는 기다림, 창조한 자이기에 원수와 같은 자를 용납하는 그 하나님, 하나님보다 의로워서 이런 세상을 심판하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삿대질 하는 그도 돌아오도록 지금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냄새 나고 더러운 우리의 심령에 좌정해서 하늘의 생수로 날마다 정화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갖도록 하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십자가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신학적인 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서 주여 이 완악한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언제나 자기 주장했든 이런 자를 용납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저 주는 것이 진정한 이김을 알고, 내 옳음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 조차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얽어 매는 많은 것에서 자유 함을 누리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 썩어 가는 세상에 생수를 공급해야 할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