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에 대한 수구와 보수
고린도전서 11: 2
2020년 1월 12일 주일 낮 예배
No. 451
2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아멘
●고대 사회나 유대 사회에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의 평가가 좋다. 성경에서 말하는 보수와 진보? 성만찬에 관한 문제와 성령의 은사에 관한 것. 하나님의 뜻이 인자와 선하심을 알고 굴복하게 되고 감사가 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승리로 이끄신다. 이게 주일 성수고 예배라는 것이다.
오늘 여기에 보면은 너희가 고린도 교회가 모든 일에 바울을 기억하고, 또 바울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3절에서부터 16절에 가보면은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하여 준 전통을 잘 지키지 아니하고 혼란[昏亂]스러웠어요. 심지어 16절에는 논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요, 그래도 나를 기억하고 내가 전하여 준 전통을 잘 지킨 것을 칭찬한다 라는 것은 참 어떤 의미에서 반어법[反語法]적으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정말 자신이 원하는 복음 안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잘 담겨져 있지요.
1. 성경적으로 보수는 복음의 본질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보수다. 교회에는 복음을 그대로 어떤 상황 어떤 시대 어떤 여건에서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보수라고 본다.
여러분 이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부분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유교적인 관습과 교육에 있다 보니까 지적 질 해서 고쳐 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이들에게도 그저 지적 질 하고 하는데, 아이들에게 공부를 안 해도 참 열심히 한다, 이런 격려가 훨씬 더 유용하잖아요. 저도 여러분들에게 지적 질보다 그런 부분들을 참 많이 해 왔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한가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여기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할 때에 이 전하여 주는 것은 유대 사회 또 고대 사회에는 굉장히 중요한 삶의 하나의 Motto에요. 그 전통 이러는데 사람은 언제나 특히 고대 사회나 유대 사회에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이 참 사람다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어떤 구성원으로 살 때에는 그 전통을 잘 지키려고 하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럴 때에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전통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거에요. 이런 본질을 알지 못하면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은 불편하게 되어져요. 또 이런 것을 잘 알지 못하면은 논쟁이 생기고, 편가름이 생겨요. 우리나라도 지금 보면은 진보나 보수로 나뉘어서 모든 사사건건 이렇게 대립하는 것을 보는데 정치적인 진보와 보수를 생각하고 그것이 Ideologie가 되어서 그래요. 성경에서 말하는 보수와 진보가 뭔가 하는 것을 아셔야 되어져요. 먼저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알게 되면은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같은 것을 느껴요.
가령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보수 이러면은 성경적으로 보수는 뭐냐 하면은 복음의 본질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보수에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목사에요. 여러분 이런 정치적인 사안[事案]이나 이런 것에서도 저는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존재의 목적이고 또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안 해요. 그래서 저는 보수주의 자에요. 그런데 수구는 뭔가, 보수보다 나쁜 게 수구에요, 수구는 뭐냐 하면은 본질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인간이 만들어 낸 전통과 껍질 관습을 지켜 나가려고 그래요.
그러면은 기득권층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우리나라의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은 그 사람이 정치인이든 국민이든 목사든 교인이든 수구를 가지고 보수라 생각해요. 여러분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탁 볼 때 그 사람들의 논리에 들어가지 말고요 목사님의 설교를 따라서 여러분들의 가치판단을 달리 하세요. 교회에는 복음을 그대로 어떤 상황 어떤 시대 어떤 여건에서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보수구나, 또 그리고 정치적인 보수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국가의 존재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가, 정말 이런 것이 정치고 국가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아야 되요. 그런 사람이 보수에요.
그러지 아니하고 정치의 체제나 그 다음에 관습이나 이런 것을 지키려고 해 버리면은 수구가 되요.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이런 것에서 수구적인 것을 가지고 보수주의라 해요. 진보는 뭔가, 왜냐하면은 진보는요 성경에서도 복음은 변하지 않는데 시대와 여건의 장소에 따라서 그 복음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구원을 표현 하는 것은 언제나 변해야 되어져요. 이 변화를 추구 하는 것이 진보에요. 그러면 진보도 뭐냐 하면은 본질은 바꾸지 않고, 시대를 따라서 옷을 새롭게 가라 입는 것은 진보에요. 그러면 보수는 복음의 본질을 변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이 기본적인 것을 방점[傍點]을 두고 말할 때에는 보수에요.
2. 당연히 보수나 진보나 다 하나구나, 이렇게 느낀다. 예수 믿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예배 자가 아니고 예배를 보러 오는 참관인이기 때문이다. 진짜 예배 자가 되어야 된다.
진보는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말아야 되는데 시대에 따라서 관습이나 제도는 바뀌어야 된다 하는 것은 진보에요. 그래 이 사람들은 본질 이것 보다는 본질은 그대로 두고, 시대에 따라서 제도와 관습은 변화 되어야 된다 라고 변화의 방점을 두는 것이 진보다 말입니다. 신앙적인 진보와 보수를 보면은, 이런 것도 정치적으로 마찬가지에요. 그러면은 당연히 보수나 진보나 다 하나구나, 이렇게 느껴요. 수구와 진보는 하나가 아니고 달라요, 반대의 입장에 서 가지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은 우리나라는 보수보다 수구가 많고, 신앙인들 중에서도 많아요. 또 진보도 참된 진보가 없어요 본질은 안 바뀌고 제도와 관습이나 형태가 바뀌어야 되는데 판가리 하려고 그래요.
전체를 다 뒤집으려 해요. 이것을 저는 뭐라고 이야기 해야 되는가, 용어가 생각이 안 나서 부 교역자들에게도 물으니까 뭐 제대로 된 용어가 없더라고요. 우리는 여러분 이런 생각들이 뭐냐 이런 부분들. 이제 11장부터 12장에 이래 들어가는데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고, 설교를 들어야만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어져요. 자 여러분들이 옛날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나 국어 시간에 제일 많이 한 것이 뭐냐 하면은 글의 제목 주제 문단 나누기잖아요. 그래야만이 제대로 알게 되는 거에요.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은 우리에게 글로 주어졌어요. 그래서 이 부분에 제목은 뭐며 주제는 뭐고 이 주제의 문단은 어떻게 나누어 지는가를 제대로 알아야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어져요.
그러지 아니하면은 대단히 잘못된 표현 중의 하나이지만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한다면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은 오해가 일어나요. 자 그러면은 여러분들에게 지금 예배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제가 이 보수와 진보에 관점에서 말씀을 드리는데 11장 2절부터 14장까지는 예배에 관한 문제에요. 11장 2절부터 16절까지는 예배 중에 고대 교회의 예배에는 여자가 수건(미사보)을 써야 되요. 지금도 천주교는 미사보를 쓰잖아요. 그래서 이 수건을 써야 되느냐 말아야 되는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가 많은 혼란을 가져 왔어요. 그것에 대한 대답인데 이런 부분에서도 수건을 써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로 접근을 한다면은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저 관습과 제도를 가지고 수구와 진보가 싸우는 것이 된다고.
그래서 천주교는 미사보를 쓰는데 왜 우리는 안 쓰느냐 이런 것들은 이 쓰는 이유가 뭔지를 알아야 된다고,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이 3절부터 16절인데 기대하고 들으세요. 이것 아시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17절부터는 성만찬에 관한 문제에요. 그리고 12장부터 14장 까지는 예배에 중요한 성령의 은사에 관한 거에요. 그러면은 이 전체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먼저 길잡이로 이야기한다면은 우리가 기독교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예배거든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예배 자가 아니고, 예배를 보러 오는 참관인이기 때문이에요. 진짜 예배 자가 되야 되요.
3. 예배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십계명에 보면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면서 일을 하지 말라 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일요일이라 하면 안 된다, Sun day 라 하면 안 되고, 주일이라 해야 된다. 이런 것들은 다 수구적인 관습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주일 성수 거든요, 그런데 이 주일 성수나 예배의 본질을 알게 되면은 미사보를 써야 되느냐 안 써야 되느냐 이런 문제 가지고 논쟁하지 안 해요. 그것은 하나의 관습이고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 교회의 수구적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옛날에 지금은 여러분 우리 교회는 오후 예배도 없지만은 예전에는 주일 저녁에 예배를 드려야 되었어요. 그것을 주일 오후로 당겨 오는데 얼마나 많은 진통이 있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오후 예배 드리면은 거기는 좀 자유주의가 아닌가, 왜냐하면은 본 예배가 본질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하는 거에요.
우리 교회도 수요일 오후 오전 예배를 드리는데 왜 수요일 날 다른 데는 저녁 예배 드리는데 오전 예배 드리느냐, 예배의 본질을 모르고 수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새벽 기도 이런 모든 문제들, 오늘도 이 설교를 듣고 여러분들이 예배는 뭐냐 하면은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거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 내 주장을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 인자와 선하심이 많음을 알고 내가 그것에 굴복하게 되어지면은 여러분들의 삶의 이전에 경험 해보지 못했든 평강이 생겨요. 그렇게 되어지면은 진보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공평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요. 그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대도 나는 남들보다 복 많이 못 받아서 평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종교적인 여러분 지나친 투기만 생긴다고.
우리 교회 예배를 여러분들이 잘 보세요, 또 주일 성수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들이 주일날 이러면은 십계명에 보면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면서 일을 하지 말라 그래요. 그럴 때에도 안식일이 왜 있는가, 이 부분을 알지 못하면은 저 수구적인 생각은 안식교 같은 데에는 토요일이 안식인데 왜 주일날 지켜야 되느냐, 토요일 날 지켜야지, 이것은 보수가 아니고 수구에요. 그러면서 또 여러분 뭐냐 하면은 구약에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를 드렸는데 이런 예배 드려서 되나, 수구적인 생각이에요. 예배와 주일의 본질을 아셔야 된다고, 여러분 우리가 말할 때에 우리는 주일 이러잖아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일요일이라 하면 안 된다, Sun day 라 하면 안 되고, 주일이라 해야 된다. 이런 것들은 다 수구적인 관습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논쟁거리로 삼아서 장로가 일요일이라 그래 이래 버린다고, 일요일이라 해도 주일을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주일날이라 하면서 일요일과 같이 지내는 사람이 있어요. 예배를 드려도 예배가 아니고 예배를 보는 자가 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주일날 왜 일 하고 왜 주일날 일 하지 말아야 했는가, 라고 할 때에는 여러분들이 왜 그러면 안식일 거룩히 지키라고 했는가 하면은 거룩이 뭔가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된다고, 이것을 모르면은 헬라적 이분법으로 이렇게 말해요.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도간에 좋은 교제[交際]를 하면 거룩히 지킨다. 그래서 예전에 예배에 모범에는 주일날에는 일체 오락을 금하고 했어요.
4. 거룩 이라는 것은 구별되었다, 주일날은 다른 날 하고 구별된 날이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의 것이다. 육일 동안 내가 일한 것이 내 능력 내 노력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나온 삶이다. 6일의 그 일을 하나님 앞에 봉헌하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주일이다.
그런 모범이 다 중세 시대에 생겼든 거에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때에는 뭐 텔레비도 없었지만은요 그저 주일날은 성경보고 기도하고 교인들 교제만 해야지 거룩히 지키는 것이지, 주일날 뭐 밥 사 먹거나 뭐 하면 큰일나고 죄짓는다 생각했어요. 보수 신앙이 아니라 수구 신앙이에요. 거룩 이라는 것은 구별되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은 다른 날 하고 구별된 날이에요. 그러면 다른 날은 무슨 날이냐 일하는 날이에요. 주일날은 일하지 않는 날이에요. 그러면은 일하는 것에 구별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일에 대한 개념을 또 이해 해야 되요. 일은 타락한 인간이 자기가 일의 주최가 되어서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자원이나 모든 삶을 확보해서 자기의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일이에요.
이런 것이 일인지도 모르고 뭐 일이 뭔지도 몰라, 그냥 자기가 뭐 사업을 하면 사업이 일이고, 직장 다니면 직장이 일인 줄 알아, 그런 게 아니에요, 일의 가장 기본적인 신학적 본질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노력해서 자신의 삶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서 자기의 생애를 유지해 가려고 하는 행위들을 말해요. 그런 것을 좀 고차원적으로 말하면 문명 이런 이야기 한다고, 여러분들이 한 주일 동안은 그러잖아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건강,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활용을 해서 머고 살려고 자신의 생명을 영위하고 유지해 가려고 노력을 하잖아요.
그런데 주일날은 뭐냐 하면은 그것을 그만 두는 것, 그만 두는 것만이 아니고 그만 둔다는 말 속에는 뭐 있는가 하면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육일 동안 내가 일한 것이 내 능력 내 노력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나온 삶이다. 그래서 6일의 그 일을 하나님 앞에 봉헌하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주일이라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여기 와 가지고 아이구 우리 자녀 이번에 대학 시험 어떻게 될까 걱정해서 하나님 도와 주세요 이러면 일하는 거에요. 주일 성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더 욕심 많다, 이런다고, 내가 6일 동안 내 자녀 공부를 열심히 하게 했는데 주일날 와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것이야.
그래서 내 자녀가 어느 대학에 가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안에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 이런 것을 고백하는 것이 주일 성수에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제가 뭐 장 장로님 또 기도하실 때 그런 말씀 했는데 예배, 설교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게 설교가 아니거든요. 그것은 주일 성수 잘못 하고 예배 잘못하는 거에요. 들어야 할 말씀을 듣는 거에요. 들어야 할 말씀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목사님은 설교 말씀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원래의 의도를 잘 파악해서 오늘을 사는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대로 옷을 덧입어서 증거하는 거에요. 그래서 설교는 순종하려고 들어야지요. 판단하려고 들으면 안 되요.
5. 말씀이나 주일 성수에서 언제나 하나님에게 굴복을 해야 된다. 그러면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게 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나온다. 모든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다.
많은 교인들이 요즘도 보면은 그러잖아요. 듣고 싶은 설교를 듣기 위해서 이 교회에 왔다가 저 교회 갔다가 자기 마음에 드는 것, 그것은 예배도 아니고요, 그것은 주일 성수도 아니에요. 뿐만 아니에요, 기도도 여러분들에게 제가 참 우리 2부 예배 장대상 집사 기도 참 성경적으로 잘 했어요. 이러니까 또 장 장로님은 기도를 잘못한 것 같네, 이러면 정말 머리 아파요, ㅎ ㅎ 집사이기 때문에 내가 칭찬을 하지만은 기도도 자기 주장하는 게 아니거든요,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거에요. 그게 대화란 말입니다. 우리 장장로님 또 목회적인 기도를 참 잘하셨는데, 이런 말 안 하면 또 삐칠까 봐 이말 넣어 주어야 돼, ㅎ ㅎ
장 집사 같은 경우는 지난 주일 설교 학개서 말씀 신명기 말씀을 가지고 내가 짓지 않는 집에 거하고 내가 심지 않는 포도원에서 먹는데 나는 판벽한 집에 거하면서 교회가 허물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래 살았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내가 다시 한번 이제는 하나님의 전이 세워 지는 것, 허물어지는 성전을 세우는데 제가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이게 기도에요. 이렇게 되어지면 여러분들의 삶이 사람다운 삶이 되어지고요 평화가 넘쳐요. 여러분 환경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자녀가 예수 믿는다고 꼴등 하는 자녀가 전교 일등 하게 되면은 예수 안 믿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목사 아들도 개척을 하니까 서울고등학교 7등 하다가 쭉 미끄럼 타 가지고 거의 밑 바닥에 가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안 해서 그래요, 저는 그 속에도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뜻이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들의 이런 기도나 말씀이나 주일 성수에서 언제나 하나님에게 굴복을 해야 되요. 그러면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게 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나와요. 그렇게 될 때에 진보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참된 공평 평등이 나타나요. 제가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용서하고 들으세요 옛날 지금도 뭐 안 잘랐으니까 우리 교회 안수집사지 김남우 집사가 제 조카인데 행시 파스하고 고시 파스 해서 남부지청에 이제 임용 받는다고 삼촌이라고 신영광 교회에 있을 때 인사 왔다고,
그럴 때 내가 남우야 하나님의 은혜로 검사 되고 임용 받은 것 아느냐, 예 삼촌 그렇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임용 받은 게 뭔데, 하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 거지요 이러더라고, 그것도 서울대학 경제학과 나와 행시 사시 다 파스 되도 성경은 잘 몰라 신학은 ㅎ ㅎ 그래서 제가 뭐라 했는가 하면은 네가 우신 고등학교 다닐 때에 버스 기사가 너 학교 태워 주었지, 그렇다는 거에요. 버스 기사가 너를 학교에 태워 주었지만 하나님이 버스 기사를 조정해서 너를 학교 가게 한 거야, 문방구 아저씨가 너에게 노트 팔아 줬지, 문방구 아저씨가 노트를 팔았지만 그 노트를 Borneo 어느 섬에 있는 벌목공이 나무를 자르기도 하고, 제지 공장에서 노트도 만들고 그것이 또 누군가 이동을 해서 네 학교 문방구 앞에서 너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노트를 팔게 한 거야, 그 모든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는 거야.
6. 내가 짓지 아니한 집에서 내가 거하고, 내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에서 내가 먹게 되었다 이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 은혜고 이런 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총회가 모여서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에 맞는 예배의 모범 시간이나 예배의 형태를 정해 져야 된다.
선생님이 물론 봉급을 받으면서 가르쳤지만 분필 가루 먹어 가면서 너에게 하나라도 더 알게 하려고 애썼지, 그래서 너는 오늘날 네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네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사회에 빚진 거야, 그런 것이 신명기에 내가 짓지 아니한 집에서 내가 거하고, 내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에서 내가 먹게 되었다 이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 은혜고 이런 것이 신앙의 출발이에요. 그래서 너는 앞으로 검사의 본질대로 돈 없다고 없는 죄 있게 만들지 말고, 돈 있다고 있는 죄 없게 만들지 않는 검사가 되어야 돼, 이게 빚을 갚는 거에요, 하나님께, 거기에 놀라운 사회의 공평과 이런 것이 나타나잖아요.
여러분들이 기업을 한다면은 여러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내 자본이 내 회사를 영위하는데 종업원은 나한테 월급 받고 생산의 수단으로 생각하면은 그 사람은 주일을 지키는 사람도 예배 자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공장에 와서 일을 하게하신 것은 저 사람이 없으면은 어떻게 내가 이 사장의 자리에 있을까,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사주로서 갑 질 하지 않고, 을의 자리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게 주일 성수고 그게 예배다 이 말입니다. 이런 것 모르고 그저 안식일은 토요일인데 주일날 왜 지키느냐 일요일 왜 지켜야 되느냐, 왜 저녁 예배는 없이 오전 예배만 있느냐, 전부 수구적[守舊的]인 거에요. 그런 부분들이 지금 계속해서 이제 11장 12장 13장 14장에 나타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정말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시대가 변했잖아요. 그 새벽 기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지 안 했습니까, 농경 시대의 새벽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안 되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농촌에는요 전기 불 안 들어왔어요. 저 호롱불 세대에요. 호롱불 켜다가 촛불 켜면 얼마나 밝은지 몰라요. 그러다가 조금 있으니까 저녁때면 전기를 주더라고, 그럴 때에는 전부 여러분 해 떨어지면 자라는 것이 부모의 입에 달린 소리에요. 경상도 사람이니까 제 어머니 아버지는 잽신 하지 말고 그냥 자빠져 자 이런다고, ㅎ ㅎ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같으면은 7시 8시 되면 자면은 2시 3시 일어나잖아, 일어나면 뭐 해야 되요,
얼굴에 이래 물기 닦고 교회 가서 잠시 기도하다가 삽 들고 또 논에 가서 물고 좀 보다가 출출할 때 집에 와서 밥 먹고 또 한숨 자고, 또 나무하러 가고, 삶의 지극히 가장 하나의 물 흐르듯이 흐르는 삶이 새벽 기도다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들 퇴근하면 10시 11시요 산업화의 시대에 걸 맞는 예배의 모범이 생겨야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쯔쯔쯔 세상이 이제 교회가 망쪼가 당했어, 기도의 본질을 생각해야지요. 여러분들이 주일날 같은 경우도 그래요 여러분들에게 공휴일은 우리가 예배를 공식적 예배를 그만 두는 것, 이런 것들이 보수이면서 진보에 멋있는 목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 겁니다.
이런 근원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항상 껍질을 가지고 목회를 판단하더라고, 이것 알면은 참 고맙구나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다니면서 복음을 알고 본질을 알면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진보적인 생각을 덧입어 가는 목회가 얼마나 감사한가, 왜 여러분들 속에 헛갈리는가 하면은 이런 거에요. 총회가 모여서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에 맞는 예배의 모범 시간이나 예배의 형태를 정해 져야 되는데 맨날 무슨 짓 하는가 하면은 총회장 뽑고, 겨우 또 총회가 한다는 게 뭐냐 하면은 교리사수 하는 것이 총회 일인 줄 알아, 총회는 교인들이 헛갈리지 않도록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형태, 그 시대에 맞는 복음은 바뀌지 않으면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배의 모범을 새롭게 해 나가는 것이 총회의 역할인데 안 하니까 제가 우리 교회만이라도 하자,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다른 교회와 우리 교회는 다르네 이러거든요.
7. 하나님 앞에 굴복하므로 말미암아 잘 되도 감사, 못 되도 감사, 이런 삶이 있다. 주일이라는 것은 카이로스의 시간 하나님의 구원사적 시간이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이제는 야 참 정말 복음에서 보수와 진보적인 올바른 성경적인 관을 가지고 가는 것이 참 감사하구나, 여러분의 생각을 내려 놓으세요. 이제는 그런 간증에 속지 마세요. 예배 뭐하고 뭐 했더니만 복 받았다는 간증에서 속지 마세요, 그래서 끊임없는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좇는 신앙 생활 하지 말고요, 하나님 앞에 굴복하므로 말미암아 잘 되도 감사, 못 되도 감사, 참 이런 삶이 있어요, 있다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러 오니까 이런 삶을 경험 해보지 못하잖아요. 제가 주일날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잖아요, 주일날은 무슨 날이라 했어요, Sun Day 일요일이라는 것은 크로노스 물리적 시간의 일요일이에요.
그 안에 주일이라는 것은 카이로스의 시간 하나님의 구원사적 시간이에요. 그래서 크로노스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물리적인 시간은, 여러분들의 삶의 영 속에 주일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주일 아닌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이 시각이 필요해요. 그러면은 내가 짓지 않은 집에 거하고, 내가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먹는다는 것이 뭔 말인가 알게 되고요, 그것을 알게 되면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갑 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을질 하며 살아가면은요 절대로 삶의 스트레스나 힘든 일이 없어요. 참 우리 불가능한 것 같지요, 가능해요. 하나님만 믿으면. 진리 안에 거하려고 하면은. 이 신앙의 새로운 출발이에요.
이제 장년기 첫해 원년에 되어야지요. 그래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두가 즐거워하는 놀라운 축복, 그것이 성찬식이에요. 여러분 우리나라에 한번 보세요, 잘 들으세요, 박정희 시대를 찬미하는 것도 수구적인 생각이에요. 그것을 잘못했다 하는 것도 잘못된 진보의 생각이에요. 올바른 보수와 진보가 있으면은 그때는 참 그럴 수 밖에 없고 잘하셨구나, 이게 제대로 된 진보가 박정희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라고 봐요. 또 성경도 그렇고요, 성경도요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먹고 마실 것이 있은즉 자족하는 것이 경건의 유익이다. 성경에 먹고 사는 문제만 보면 중요한 문제가 없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육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요. 그것을 부정하면은 허무주의 금욕주의 헬라 사상이 되어 버려요. 우리가 지금은 여러분 얼마 그런 뉴스 나오잖아요, 저 뭐 천호동 어디에 모자가 뭐 20몇 만원 놔 두고 그렇게 죽었다. 저는 그것을 볼 때 이 사회가 비정하고 이렇다는 것보다 비정한 게 그렇지요. 그런데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리나라가 참 잘 살게 되었구나, 제 어릴 때 같으면 그것은 뉴스 거리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는요 아무 생각 없이 정말 먹고 사는 일에 주력을 해야 되요. 그래서 6일 동안 힘써 일하라고 했다고 성경에는, 여러분 정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전에요 제가 목회를 면목없는 면목동에도 했고, 응암동에도 했어요, 응암동에 있는 나한테 그 권사님은 맨날 울면서 다녀요 교회에 예수 믿고 왜냐하면은 그 150번 종점 북가좌동 종점 옆에 교회 있었는데, 그때 버스 안내양들 자기가 너무나 많은 그분이 산파였는데 임신중절 시킨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 그랬어요. 그만큼 열악한 시대였다고, 그때 목회할 때 깜작 놀랐든 것은 중학교 여중 학교 2학년이 우리 교회 집사님 딸이 가출을 했는데, 내가 얼마나 놀래 가지고 가서 심방[尋訪]을 가서 그랬더니만 목사님 놔 두세요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것이지,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여중 학교 2학년이 가출을 했는데도 엄마는 걱정을 안 하더라고, 그 엄마 걱정은 한가지 돈 좀 있어 봤으면, 내일 걱정 안 해 봤으면…
방이 두 배나 비싼 방배동에서 목회 하니까요 자기 아들이 학교 성적 3등인가 5등 떨어졌다고 목사님 살맛 안 난다고 죽는다고 머리 싸매더라고, 돈이 있으면 만가지 걱정 그럴 때에 우리가 뭘 봐야 되는가,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진짜 보수라면은 지금은 진보들이 생각하는 생각을 보수가 해야지요. 지금은 먹고 살만하니까 어떻게 하든지 많은 사람들이 부유가 나누어 질 수 있도록 그게 진짜 보수에요. 진보도 그것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저녁이 있는 삶을 살자, 이게 진짜 또 진보에요. 싸울 일이 하나도 없어요. 수구고 하나는 보수고 진보도 또 이상한 진보가 되니까 서로 싸운다고.
8.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보면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주일 성수가 우리 속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예배의 시간이 이런 부분만 바꾸고 이런 형태에서 매이지 말고, 그 본질 속에 있는 예수님의 구원의 표현이 우리 삶에 드러나서 가난해도 부해도 행복하고 건강해도 주를 위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보면은요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은 아름다운 승리로 이끌어 가시는 그 하나님, 이런 것이 주일 성수고 이것이 예배라니까요. 여러분 우리 교회의 목회 한번 보세요. 제가 이야기 하잖아요. 성찬식 때 이 이야기를 또 여러분들께 많이 드릴 거에요. 뭐 교회가 뭐 선교하고 교육관 짓고 그 지을 때가 있었어요. 본질은 뭔가, 예수님이 이루신 내가 절대로 버리지 못하는 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과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가족이 된 것, 이것을 어떻게 옷 입느냐는 것이지요. 시대에 따라서 우리 교회 형편에 따라서, 이것 아니까 여러분들에게 그래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나 목회의 목적은 교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 그 교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 중에 여러분 보세요, 저는 용서하고 들으세요, 우리 호정이 반주 1-2년 했어요, 지금도 반주자 사례 주어요. 왜 가족이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여러분 뇌출혈로 인하여 지금도 온전한 정신을 못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목회에요. 이런 목사님에게 감사해야 되요. 저는 우리 교회 있다가 어디 가서 잘 살면은요 아이구 잘 살면 됐다 이래요. 못살면은 마음에서 떠나지 안 해요. 송장로님이 필립핀에서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 떠나지 안 해요.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아야지요. 복음의 터전 위에 있으면은 이런 게 목회이고 이런 생각을 해요.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해주는 하나님 아니에요, 예수님은 세상에 끝날까지 가난한 자들은 있다 그랬어요. 교회는 부한 자들 것 빼앗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런 공산주의 사고가 아니에요.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더불어 함께 부유한 삶을 사는, 그래서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여러분들에게 페밀리카드 사서 모든 사람이 그런 문화도 누리게 하고, 또 사랑방이나 콘도나 건물 받치라 안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에요. 그래서 콘도 여유 되거든 자기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가 비번만 가르쳐 주어 가지고 관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 집 있는 사람도 집 교회 옆에 하나 사세요 사서 자기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가 어려워 지면 팔아 먹으라고, 그 대신에 임대 주지 말고 우리 교회 어른들 거기에 사랑방 할 수 있도록 이런 것들이 다 본질을 추구하는 데에서 나와요.
그것이 성찬식이 뭔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오는 거에요. 성찬을 해서 떡을 뭐 남는 것은 묻어야 되는 그런 것은 수구적인 생각이에요. 성찬을 때면서도 남 죽이고 나 살려고 한다면은 자기의 죄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거에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가 다시 고린도전서로 들어와서 내가 하는데 11장부터 14장까지, 진짜 예배가 뭔가, 주일 성수가 우리 속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저 예배의 시간이 이런 부분만 뭐 바꾸고 이런 형태에서 매이지 말고요, 그 본질 속에 있는 예수님의 구원의 표현이 우리 삶에 드러나서 여러분들이 예수 믿으면서 가난해도 행복하고 부해도 행복하고 건강해도 주를 위한 것이고, 병들어도 그것 때문에 자기의 삶을 고통으로 빠트리지 않는 그런 예수님의 구원 그 구원의 길을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4장 사이 예배에서 여러분들이 회복해서 교회는 천국에 가는 간이역이 아니고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9. 하나님 그리스도가 이루신 그 구원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그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복음에 순종하는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
천국에 가서 여러분들이 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육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쉼이 있는 복된 생애 이런 생애의 출발이 될 수 있는 그런 귀한 예배가 되도록 복음에는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는 보수, 복음을 덧입는 문화와 관습은 시대를 따라서 새롭게 갈아입는 진보 보수와 진보의 생각이 여러분들 속에 함께 아우러져서 쓸데 없는 논쟁 투쟁이 아니고, 하나님 그리스도가 이루신 그 구원이 여러분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그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입맛에 맞는 설교 들으려고 하지 말고요, 들어야 할 말씀을 듣고 쓸데 없는데 용기 내지 마시고요 복음에 순종하는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걸어감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님의 구원이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의 실제의 축복이 되는 그런 신앙 생활이 되시고 여러분들의 기도가 있다면은 하나님 이제는 대한민국의 각 교단의 총회가 시대에 맞는 예배의 모범을 짜는 이런 것에 함께 해서 정말 예수님의 구원이 불편하지 않는 복된 신앙 생활이 우리 한국 교회에 정착이 될 수 있도록 이런 것이 여러분들의 기도의 제목이 되는 그런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금년에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말씀 드리지만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세요. 공적인 예배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참석하세요. 작년도부터 특별한 일 빼자 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진 거지요. 이야기 했지만 안영모 장로님 못 오잖아, 출근해야지.
수요예배도, 내가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가장 중요시 여겨서 성경은 큰일 하라 하지 마래요. 사단은 우리 속에 큰일 하라는 거에요 교회에서, 큰일은 하나님이 하게하시고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해서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내가 심지 않는 포도원에서 포도를 먹고, 내가 짓지 않는 집에서 거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보여져서 한 주간 힘써 일한 소득이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겠다고 하는 그 신앙의 고백을 담아서 귀한 예물을 주님 앞에 드린 손길들 위에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들로 충만케 하시고 언제나 큰일 하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큰일 하려는 나의 마음을 줄이고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해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도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의 삶을 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목사님과 당회가 주관하는 예배의 모든 교회의 전통에 철저히 순종해서 하나님이 주관하는 은혜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맛이라도 보도록 선물로 준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김종웅담임목사주일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요한복음 1: 11-13)주일 낮 예배 설교문 (0) | 2020.01.31 |
---|---|
남자와 여자(고린도전서 11장3절)주일 낮 예배 설교문 (0) | 2020.01.23 |
2020년 프롤로그 (스가랴 8: 13)주일 낮 예배 설교문 (0) | 2020.01.11 |
2019년 에필로그(학개 1: 1-11)주일 낮 예배 설교문 (0) | 2020.01.03 |
천국 백성의 특징(마태복음 6: 14-15)주일 낮 예배 설교문 (0) | 2019.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