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초안 요약문(구역공과)

천국은 어떻게 오는가?(12) 설교 요약문

차주희 2016. 2. 2. 17:57

 

 

천국은 어떻게 오는가? (12)

 

 

3:4-6                                                                                                                                              찬양: 218장        

종교원리주의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이슬람의 지하드와 같이, 평화를 위한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것을 의로 여기는 것입니다. 유대교 중에도 열심당은 이와 같은 신앙인들입니다. 구약에서 전쟁과 살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성취한다고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을 열성신학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열성신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 중에도 땅 밟기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꾀하려고도 하고, 어떤 신앙인들은 불상 파괴 하거나, 절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도 합니다.

그와 같은 경우 단순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우상 숭배라고만 하지 말고, 올바른 신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아서 세상의 빛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열성 신학의 유래는 민 25장에, 이스라엘이 싯딤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였고, 모압 여인들의 요청에 따라 바알 브올에게 가담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의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회중에 한 남자가 모압 여인을 데리고 자신의 막사에 들어가는 것을 본 모세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들을 따라 들어가 그 남자와 여자를 창으로 찔러 배를 뚫어 죽이자 염병이 그쳤는데, 그 때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가지고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다고 하면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 106: 28-31절에는, 비느하스의 사건을 두고, 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이름을 덮럽힌 자를 처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왕상 18:40, 19:10절에도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산에 영적인 전쟁을 하던 엘리야가 기손 시내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죽이고,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다고 합니다.

3:6절에 바울도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라고 하는데,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라는 말은 열성신학으로 교회를 박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신학의 입장을 가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열심당이 바로 이와 같은 신학의 입장을 견지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열심당은 66년에 로마와 독립운동을 벌이다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을 당하였으나, 맛사다로 피신하여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74년에 완전히 몰살을 당합니다.

이러한 맛사다의 점령에는 유대사를 통하여 중요한 자료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요세푸스의 계략이 숨어있는 것도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요세푸스는 원래 열심당으로 로마 항쟁에 앞장섰으니 갈리리에서 모두 자결하자고 부추키고, 자신만 살아남아서 로마에 협력한 인물입니다. 나중에 로마의 보호 아래 유대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세푸스의 유대사를 읽을 때는 요세푸스 자신의 변명과 합리화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왜곡이 없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유사와 비교)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시몬은 열심당원이었으며 가룟유다도 열심당원이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열심당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검을 사용하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고, 9:53-56절에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를 불을 내려 멸하자고 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이면서 열성신학을 가졌던 바울도 나중에 예수님을 그리스도 받아들이고 나서는 롬 12:17-21절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합니다.

 

남을 이겨야 자신이 잘 살 수 있다는 정글의 법칙만이 통하는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고, 자신과 다름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상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화해서 대립하기를 좋아합니다. 좌파와 우파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냐 성장이냐의 문제인데, 종북이라는 것을 갖다 붙여 이데올로기화해서 조금도 타협이 없는 극한적인 대립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족은 이념을 초월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신비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종종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가족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겨야하고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가족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정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념을 초월하고 어떠한 다름도 넘어서는 신비한 공동체인데, 콩가루 교회는 이념에 지배를 받으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신앙도 이데올로기화하면 대립으로 인한 피의 역사가 전개된 것을 교회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실존입니다 모든 인류를 한 가족으로 만들어서 서로 사랑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이기기 위해서 예수를 믿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신앙을 전파해야 합니다.

 

 

* 나누어 봅시다.

 

1. 열성신학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구약적 사례를 들     어 봅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신앙의 이념화로 인한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피를 흘린 교회 역사에서의 사례를 나     누어 봅시다.

 

3.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종교다원주의와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 신앙의 이념화와 그리스도의 구원의 실존의 차이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5. 12:17-21절을 읽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무엇이며, 그와 같이 승리해야 할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나누어 보고, 218장 찬송을 하고 기도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