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웅담임목사주일설교원고

칭찬받는 교회와 예배 (성찬)(고린도전서 11장 17-22절)주일 예배 설교문

차주희 2017. 4. 2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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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김종웅

칭찬받는 교회와 예배(성찬)

고린도전서 11 17-22

2017 4 16일 주일 낮 예배

                                                                                                                                                         No. 311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아멘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실존이다. 구원의 부활은 표적이며 부활의 소망을 주셨. 그 부활의 아침에 이제는 오해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이겨 나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을 내가 칭찬할 수 없다 하셨다.

 

우리가 이 부활절에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한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정말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실존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그런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자꾸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또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는 사탄도 마귀도 안다고 그랬어요.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실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의 부활을 어떻게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가 하면은 표적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의 부활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아바아버지가 되신 거에요.

 

1. 2천년 전에 예수님이 부활한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많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그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심을 우리는 무엇으로 아는가 하면은 부활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오늘 부활절에도 저와 여러분들이 2천년 전에 예수님이 부활한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요, 또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영원한 가족이 된 것을 받아 드리는 그런 신앙이 강화되어야 되요. 또 부활은 그저 죽었다가 소생해서 우리도 나중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한 소망 정도가 아니에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는가 하면은 우리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케이피지 골프 선수였든 정재훈 집사 딸 수아가 고등학교 일학년 골프 선수입니다. 얼마 전에 전국 고등학교 1학년 대회에서 우승을 했는데 잘 알다시피 한국이 이제 체육 특기 자들이 학교 다니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피지로 골프유학을 갑니다, 지난주 수요일 날 와서 저에게 안수를 이래 받으면서, 제가 물었어요 무엇이 그래 힘드냐 하니까 자기는 멘탈이 약한 것이 좀 힘이 든대요, 그래서 어떻느냐 하니까 시합에 참여하면은 내가 몇 등 할까 성적이 어떻게 나올까 걱정과 염려가 크대요, 그래 그 이유가 뭔 줄 아느냐 하니까 mental이 약해서 그렇대요.

 

그래서 내가 멘탈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네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의 유한성 제한성 때문에 염려가 생기는 거야, 내가 몇 등 할 줄 모르니까 내가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어떻게 나올 줄 모르니까 염려가 생기는 거야, 그래 모든 인간에게는 동일한 염려가 있는 거야, 안다고 해도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거야, 이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연연하지 말고 또 그런 경험을 하다 보면 멘탈이 강해지는 거야 라고 했어요. 여러분들이 염려와 근심 이런 모든 문제는 우리가 지식의 유한성 때문에 생기는 심리적 현상이에요. 또 참 우리가 살면서 굉장히 다른 사람의 오해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되고, 아프고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나를 헤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에요.

 

그 사람이 나를 다 모르면서 자기가 보고 있는 부분만 알면서 다 안다고 그래요 그래서 억울한 거에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러잖아요, 나 그 사람 잘 알아, 이러는 사람은 죄인이에요, 나 그 사람 알지만은 다 몰라, 예수 믿으면 이렇게 바뀌어야 되요. 그리고 나 그것 잘 알아, 부분만 아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뭐라는가 하면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거든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은 그래 동의하기보다는 그분이 그랬으면은 무슨 이유가 있겠지 이래 주어야 된다고요.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많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는 거에요.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망을 주신 거에요. 이 부활절에 여러분들이 그 소망을 가져야 되는 거에요. 그 소망이라는 것은 그저 지금의 상태로 우리가 다시 깨어나는 정도가 아니고, 이제는 우리는 미래의 일 모든 일을 밝히 아는 거에요, 상대방을 이제는 말을 안 해도 처다만 봐도 상대방이 왜 그랬으며, 상대방의 의도가 뭔가, 모든 것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아는 그런 것이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육체가 새로워 지면서 우리 속에 주어지는 실존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남들이 내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주지 못할 때에 괴로워하지 말고, 예수님의 그 부활의 아침에 이제는 그런 오해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이겨 나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에요.

 

2. 17절에 와 보면은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성령을 보내어서 영원한 가족 되게 한 것이 애찬이다.

 

염려와 근심이 있으면은 멘탈이 약한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런데, 인자와 선하심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맡김으로 평안을 누리는 거에요. 이런 신앙 생활 해야 되요. 그런 신앙 생활하도록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우리에게 정말 좋은 교회를 선물로 준겁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본문에 보니까 고린도 교회가 2절에 보세요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킴으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하여 준 교회의 전통을 잘 지켜서 칭찬한다 그래요. 그러면서 오늘 읽은 17절에 와 보면은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전통을 따라서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모이기에 힘쓰는데 내가 그렇게 열심히 모이고 예배를 드리는 너희를 칭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의 모임이 너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로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해요. 그리고 22절에 보면은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없인 여기고 궁핍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래요. 자 이 말이 뭐냐 하면은 초대교회에는요 애찬을 해요 먼저, 주일마다 모여서 애찬을 하고, 그리고 예배와 성찬을 해요.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애찬을 하잖아요 점심을 같이 먹잖아요, 옛날에는 그것이 거꾸로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요 먹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도 먹어야 되고요, 숨이 붙어 있는 한 안 먹으면 죽어요. 그래서 어떤 인간도 먹는 문제가 가장 중요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성령을 보내서 영원한 가족이 된 것에 확인이 뭐냐 하면은 애찬이에요. 여러분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이 사람이 나와 한편이라는 말이에요.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우리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면은 같이 밥을 먹지 않습니다. 이방인들과는 밥 안 먹어요, 내편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을 보내어 선물로 준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한자리에서 떡을 떼고 밥을 먹었어요.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가족이 되었다는 것, 자유인과 노예가 함께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렇게 한편이 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된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성찬예식을 통해서 하나됨을 더욱 곤고히 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전통이었어요. 그런데 왜 고린도 교회에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것은 내가 칭찬하지만은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라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는 노예 교인이 있었고, 자유인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3. 너희들이 애찬에서 노예 그룹이 밥을 먹지 못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을 내가 칭찬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한다 해도 애찬에서 노예에 대한 배려가 없음은 의미가 없다. 하나가 됨을 고취하며 격려하는 것이 성찬 예식이다.

 

그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음식을 가져와서 애찬을 하는데 헬라지역에 아가야 지역에 수도라고요 고린도가,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은 다 일을 안 하는데 그 곳은 그런 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들이 주5일해서 토요일 주일을 쉬지만은 주일이라고 쉬는 문화가 있는 곳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유인들은 자기가 마음대로 쉬고, 주일 성수를 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은 마음대로 못 쉰다 말입니다. 주인이 하라는 일 다해 놔 놓고 빨리 해 놔 놓고, 새벽에 일어나서 예배 시간까지 열심히 해 놔 놓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거에요.

 

달려오면은 이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유인들이 집에서 싸 온 떡하고 포도주를 먹은 거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거기 있는 대로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취하고 있는 이런 상태에요. 그런데 노예들은 와서 배를 쫄쫄 굶으면서 예배에 참여하는 거에요, 성찬에 참여하는 거에요. 성찬을 떼면서 노예나 자유인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하고 홀짝 마시는 거에요. 이제는 김씨와 이씨와 박씨가 백인과 흑인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한 백성입니다 하면서 떡을 떼서 먹는 거에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너희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유인들 너희들이 애찬에서 노예 그룹이 밥을 먹지 못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을 내가 칭찬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한다 해도 애찬에서 노예 교인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런 말이에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참 우리 한국에는 모이기에 참 힘쓰는 교회입니다. 새벽 기도에도 열심히 하는 교회도 많고요, 한국 교회만큼 주일성수 잘하는 교인 없습니다. 칭찬 할만하다는 거에요. 그런데 뭣이 없는가 하면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은 우리가 드리는 이러한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 내가 칭찬할 수 없다, 이런 말이에요. 여러분 교회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요. 교회는 실존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면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상태가 교회에요.

 

여러분들이 각자가 있으면 교회가 아니고, 이렇게 한 장소에 모여 있는 이 상태가 교회라 말입니다. 예배는 뭐 하는가 하면은 이렇게 모여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이 아바아버지가 되신 것을 우리가 서로 확인 하여서 사회적인 신분이나 혈연에 모든 차이나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고취하는 것이 도모하는 것이 예배에요. 그것을 격려하는 것이 성찬 예식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죄인들은 어떠한가 하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모일 때마다 상처를 주는 거에요. 저는 텔레비 뭐 뉴스 잘 보지만은 그 다음에 뉴스보다 좋아하는 것도 하나 있어요 할 만큼 좋아하는 나는 자연인이다 ㅎ ㅎ ㅎ

 

그래 토요일 내가 물어 봤어요 우리 교역자들에게 나는 자연인이다가 참 좋던데, 그것 보느냐고 하니까 장전도사가 목사님 나는 안 봐요 이러더라고, 다른 부목사님도 잘 안본데요, 나보다 거룩해서 그런가, 그런데 친구 목사님들에게 물어 보면은 다 좋아하는 프로가 나는 자연인이다래요,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 해보니까 남자들 중에 50넘은 사람들이 다 좋아해, 60가고 더 가면 더 좋아해,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남자들이 사회생활 하면서 50이 지나면은 상처투성인 거에요, 그래 자연인들이 그 혼자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살게 되었는가 전부 세상에서 사람에게 상처받아서 사람이 싫어서 산속에 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속에서 치유함을 받고 있는데 여러분 그게 우리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아직 상처가 없기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하고, 50넘고 60넘은 사람들은 살면서 특히 남자들은 사회생활 하면서 많은 상처 받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싫어서 산속에 가 있지만은 참 또 아이러니한 것은 그 자연인이 그 곳에 있으면서 찾아온 사람하고 밥 먹으면서 그렇게 행복해 해요. 그 외로움을 1년에 몇 차례 찾아오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 외로움을 견디면서 그곳에서 살더라고,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의 이 모임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태인데 세상하고 달라야 된다는 거에요.

 

4.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고,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상태 애찬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성찬을 베푼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모이는 것은 칭찬하는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은 칭찬할 수 없다. 예배와 성찬식을 거룩히 해도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다른 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고, 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상태 애찬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성찬을 베푸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이 상처라는 것이 뭐 그 사람들이 말을 할 때에 전부 뭐 누구에게 돈 빌려 주고 이런 것도 상처 지만은요 뭔가 하면은 내 맘 나와 같이 알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50넘으면은 왜 전부 그러는가 하면은 제가 보니까 50전에는 부모가 살아 계시거든요, 그래 부모에게 위로 받는데 50-60 넘으면 부모가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여러분 저도 사람에게 상처받고 뭐 엉뚱한 소리 듣고 억울하면은 가서 찾아서 이야기 하면은 더 큰 오해가 쌓이고 갈들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양산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묘소에 가서 턱 앉아 있으면은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은 다른 모든 사람은 내 말 한마디 내 행동하나를 가지고 내가 어떠니 저떠니 하는데 제 어머니는 제 말이나 제 행동을 보지 않고 나를 보거든요, 저 어릴 때 굉장히 개구짓거든요, 그리고 저는 어릴 때에 반장 잘 안하고 제가 지명하는 얘가 반장이 되요, 그러면 학교에서 남자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은 선생님이 당연히 반장을 불러야 되는데 종웅이 데려가라 ㅎ ㅎ ㅎ 나만 잡으면 반에 규율이 되니까, 그런데 그런 난데 우리 엄마는 뭐라는가 하면은 내 개구짐을 보지 않고, 우리 웅이가 그럴 얘가 아니래,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거든요.

 

사람은 말 한디에 행동 하나를 가지고 나쁜 놈 좋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평가를 하는데 부모는 우리 자신을 보거든요, 오늘도 여러분 교회에서 지난주일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우리가 함께 은혜 받은 것은 이제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수록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자는 거지요, 하나님 같이 사람을 보자는 거지요. 그래서 애찬을 할 때에도 고린도교회가 자유인들은요 노예 교인이 어떻게 예배에 왔는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기는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자유이지만은 노예는 주인에게 매여 있는 재산이라는 것을 경험 안 해보니까 모르는 거요, 그러니까 배려가 없는 거요.

 

나는 배고프면 밥 먹고 배부르면 안 먹는 자유가 있는데, 노예에게는 그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노예의 처지를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이라면서 진탕 먹고, 취해 있다고. 우리 인간은 경험 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 해주지 안 해요. 교회에서 만약에 그런 것이 고린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는 모이는 것은 칭찬하는데, 그 모여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때문에 칭찬할 수 없다. 너희 예배는 아무리 거룩히 드려도 예배가 아니다. 성찬식을 아무리 거룩히 해도 그 성찬은 의미가 없다 이런 말이에요. 오늘도 우리가 성찬 예식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오늘 여러분들이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 다음에 성찬이 정말 의미가 있으려면은 여러분들이 평소에 남을 교회 안에서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 해주고 다른 사람을 수용하는 삶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 되는 거에요.

 

이 자리에서 예배를 아무리 거룩하게 드려도 그 삶이 없다면은 그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까지 견디는가 그것까지 아시는 하나님에요, 우리는 전지하지 못해요. 그런데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든 죄인들은 지가 전지한 줄 알아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 이런 이야기하는 거요, 내 그 사람 잘 알아, 자기가 죄인이라는 표시에요. 그 사람이 그 사람 죽이는 거라고, 알기는 뭐 알아요 요 부분만 아는데, 나 그일 잘 알아, 알기는 뭐 알아 자기가 보는 관점에서만 본 이야긴데, 성령님이 우리 속에 있고, 내가 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은 누가 이 사람, 어떤 행동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사람을 이야기 하면은 뭐라고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한번 따라 하세요, 그 사람이 그랬다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에요.

 

5.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와 양선, 그래서 우리는 자비와 양선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 연약한 인간이 공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그 사람의 시각으로 봐주는 배려하는 마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로운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이 아니라 양선의 잣대를 갖다 대신다.

 

저는 어떤 사람이 내편이냐 하면은 우리 엄마가 나에게 이야기하듯이 우리 웅이가 그랬다면 무슨 이유가 있었을 꺼야.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의 피 흘린 것은 그 부분 때문이에요. 저는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가, 지난주 제가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와 양선이라고,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는 자비의 마음이 나타나야 된다고요, 자비의 마음이 뭐라고 그랬어요, 연약한 인간의 심성이나 공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그 사람의 시각으로 봐주는 배려하는 마음, 내가 경험 안 해도 여러분 참 우리 그러잖아요 안 아파 보면 모르고요, 아파도 다시 낫고 나면은 언제 아팠느냐 하는 것이 인간의 망각의 축복이 있어요, 그런데 희한해요 다른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보면서 그저 아프겠다 이러는데 엄마는요 아들이 아프면은 아들보다 더 아픔을 느껴요.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에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면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그 아픔을 그 사람보다 더 아프도록 느끼는 것이 성령충만한 자에요, 그게 자비의 마음이에요. 그 자비의 마음은 목요일 날 이야기했듯이 양선이 있다고요, 양선은 뭐라고 그랬어요, 집세를 못 내는 사람에게 집세 못 낸다고 쫓아내는 것은 의로움입니다. 왜 집세 못 내고 살면은 집주인은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세 못 내면 당연히 쫓아내는 것은 의입니다. 양선은 뭐냐 하면은 집세를 못 내는 사람에게 집세를 대신 내어 주는 것이 양선이에요. 저는 우리 한국 교회는 의는 너무나 많아요, 무엇이 없는가 하면은 양선이 없어요. 그래서 힘든 거에요.

 

오늘도 여러분 이 성찬 예식을 하면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는 한 주간 살면서 우리 교회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고려해서 배려해서 그 사람과 함께 했느냐 하는 삶이 예배를 결정하고 교회를 결정하는 거에요. 저는 우리 교회가 한 명도 주일 성수를 안 하는 교인이 없는 교회, 또 뭐 세계의 모든 곳에 선교사를 파송 하는 교회 이런 것 원치 안 해요. 저의 소망은 굉장히 작아요, 이제 10년쯤 되었으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10년 동안 기다렸어요, 5년째 한번 그 설교 한적 있어요, 저는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느냐 하면은 점심 먹을 때 배식 구에 줄 안 서는 교회 되기를 바래요, 다른 사람 좀 먼저 먹고 또 모여서 대화하다가 나보다 먼저 서라고, 그 삶이 교회의 질과 예배를 결정한다는 말이에요.

 

먼저 먹는 사람이 맛있는 것 다 자기가 가져가지 않고, 뒤에 있는 사람이 먹는 것을 고려해서 적당하게 가져갔다가 한 8-9 정도 가져갔다가 다 먹고 난 뒤에 한번 더 갔다 먹는 그런 교회 3겹 살 파티에도 우리 교구는 잘 먹여야지 해 가지고 많이 확보해 나가는 장로님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교구가 더 잘 먹도록 배려 해주는 그런 장로님이 훌륭한 장로님이라고, 교인들이 우리 장로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먼저 이런 것 확보해 왔어, 세상이에요 세상, 오늘도 여러분 이 생각 하자고요, 자비와 양선 한국 교회는 너무나 의로워요. 부모는 자식에게 절대로 의로운 잣대를 갖다 대지 안 해요, 양선의 잣대를 갖다 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로운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이 아니라 양선의 잣대를 갖다 대요.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고의로 짖는 자 범죄 입니다, 그건 용서 못한대요. 저는 이 세상에 고의로 짓는 자 범죄를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봐요. 두 번째는 몰라서 짓는 죄요, 세 번째는 약해서 짓는 거에요, 이게 죄인 줄 아는데 약해 연약한 심성이라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도 품어 주시는 하나님이에요. 사람들은요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합리화하고 남의 잘못은 의에 잣대를 갖다 댄다고, 여러분 성령 받고 예배의 회수가 늘어나고, 성찬의 회수가 늘어날수록 내가 편하면 다른 사람이 불편하다는 마음도 커지고요,

 

내가 너무 챙기면 다른 사람이 손해 본다는 마음도 커지고요,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모르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신앙이 성숙 되어져서 고린도 교회와 같이 모이는 것만 칭찬받고, 모였을 때에 여러분 거기 있는 대로 도리어 해가 되는 그런 교회의 모습 때문에 칭찬을 받지 못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고 우리 한국은 충분히 전통을 잘 지켜요. 모일 때마다 해가 아니고, 그 사람의 형편을 잘 헤아려 주시고, 엄마가 자식을 바라보듯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성찬 예식 때 아이구 나만 알든 인간 같은 내 자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게 되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때문이다, 이런 감격이 진정한 성찬의 감격입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 성찬을 떼었어요, 이 부활절 성찬에 참여하면서 얼마나 나는 내 입장과 내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과 내가 모르는 이면을 선의로 받아 드리며 살았는가 그렇지 못했다면은 주님의 그 보혈의 나의 그 모든 이기를 묻어 버리고, 다음 추수감사 때는 하나님 이제 조금 더 지나가면은 우리 교회가 앞으로 한 10년쯤 되면은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대 안 해요. 배식 구에 줄 서지 않는 교회 ㅎ ㅎ 뭘 해도 내가 먼저 많은 것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뒷사람에게 배려해서 남겨 놓을 줄 아는 그런 교회, 언제쯤 이루어진다고요, 10년쯤 후에, 10년 기다릴껴, 지난 유월절 저녁 성찬 때 찬양 하겠습니다.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형제들은 서로 비교하고 질시하지만 부모는 어느 자녀 하나 버릴 것 없는 마음으로 보듯이 사람들은 서로 비교해서 선인과 악인을 가르고 유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를 따라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심을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탄생케 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큰 능력을 받지 못하고 능력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못해서 경쟁의 사회 속에 힘들게 벌은 물질을 나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귀한 예물을 주님 앞에 바칩니다.

 

약한 지체 없는 사람, 혹시 잘못했더라도 정죄의 눈으로 보지 않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 하나님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예물을 통하여 세워져서 가난한 사람도 무시당하지 않고, 부자도 불편하지 않는 거룩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석에 투병하는 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교회 되게 하시고, 가난으로 인하여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린 자에 희망이 되는 교회가 되도록 주님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을 성령으로 불붙듯이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정글의 세상 속에 죽기를 바라는 그가 너희 형제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들어내기 위하여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한 영혼도 멸망하지 않도록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서 나의 시각으로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가지고 정죄하지 않고, 내가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관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모이는 예배의 거룩성 보다 그 예배의 거룩성이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통하여 증명되는 것을 알아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기를 내가 좀 불편해서 다른 사람들이 편해 지기를, 내가 좀 손해 봐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를, 타인의 웃는 얼굴 보면서 더 행복해 지는 이상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남북으로 갈라지고, 이념으로 갈라지고, 세대로 갈라져서 아우성치는 이 땅에 인류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