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고린도 교회
사도행전 18장 1-17절
2018년 4월 22일 주일 낮 예배
No. 363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아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49년에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회사에 근무하며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바울의 복음을 거부를 해서 디도 유스도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를 만드셨다.
우리 오늘부터 고린도전서를 묵상하게 될 텐데, 목사님 왜 사도행전을 읽습니까, 이 사도행전 이 부분이 바울이 전도 여행 2차 전도 여행에 고린도에 와서 어떻게 고린도가 교회가 세워 졌는가 하는 것을 잘 말씀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부분에 대한 것은 구역공과지 밖에 있습니다, 거기에 오늘 설교의 요약도 있고, 또 함께 나눔의 말씀도 있으니까 그것을 좀 여러분들이 참고하시면 될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50년도에 고린도 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50년도가 아는가, 거기에 보면은 글라우디오 라고 하는 황제가 있는데 그 황제의 일생에 이르는 책에 보면은 이 아가야 지역에 총독 거기에 이름이 나오지요, 갈리오 라는 사람이 언제 부임했는가 하는 게 나옵니다.
1. 이방 디도 유스도 집에서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그때 회당장 그리스도보와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는 우리 유대교의 분파가 아니고 이단이라 고소를 한 것을 갈리오가 기각해서 바울은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51년 7월에 부임을 했는데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 했기 때문에 뒤로 유추해서 50년도에 바울이 왔을 것이다, 유추를 합니다. 그곳에 가서 회당장들에게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 내용도 수요일이면 자세히 설명을 드리면 참 재미 있는데 주일 설교이기 때문에 좀 넘어 갑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바울의 복음을 거부를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 집에서 복음을 전했어요. 우리 한국의 교인들은 문자로 이해 해서 성경을 참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 하니까 유대인들 중에 진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구나 이러는데, 이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 이방인 중에 회당 예배에 참석 하다가, 하나님을 알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방 디도 유스도 집에서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그때 회당장 그리스도보와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더라, 라고 말을 해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바울을 갈리오에게 고소를 합니다. 이 내용도 참 기독교의 역사에 중요한데, 왜 그렇게 고소를 했는가, 로마는 그 넓은 지역을 다스릴 때에 식민지의 종교들 중에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으면은 그 모든 것을 인정받고 그대로 실행할 수 있어요.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걸 맞는 대우를 받는 종교였어요. 그래서 유대교는 황제 숭배에도 제외 되었었고, 또 군대도 안 가도 되었고, 세금도 어느 부분에서 면제를 받았어요.
뒤에 이제 황제 숭배에 핍박은 1세기 말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에도 아주 자유롭게 다녔어요. 그런데 고린도에 와서 이 사람들이 기독교는 우리 유대교의 분파가 아니고 이단이고 잘못된 종교다, 이렇게 고소를 한 거에요. 그렇게 되면은 이제 그때부터는 바울이 선교 여행을 다니지 못하고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요. 그런데 갈리오가 그것을 기각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 후에도 바울은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이런 부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요 이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 라는 지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에 대한 복음이 굉장히 많은 왜곡을 일으켜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교회지만은 엄청난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요. 앞으로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함께 묵상해 가면은 뭐 교회가 이래, 이런 생각이 들만큼,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함께 묵상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우리 한국 교회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가 고래로부터 가져온 샤마니즘적 신앙, 천지신명을 믿었든 그 신앙에 의해서 엄청난 왜곡이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얻은 구원에 대한 기쁨도 없고, 또 교회가 교회다워 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전서를 함께 묵상하는 것은 복음을 회복 하는데 너무나 중요해요. 그 동안에 제가 우리 교회에서 창세기 민수기 그 다음에 열왕기 상하, 그 다음에 소선지서, 요한복음, 빌립보서, 야고보서, 요한계시록, 뭐 이런 것 쭉 해 왔는데, 아마 여러분들 속에 많은 의문도 생기고 충돌도 있을 거에요.
2. 예루살렘 사도행전 2장의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원사적으로 잠깐 이루어졌다. 고린도 지역에는 포세이돈신 바다의 신, 그 신을 숭상을 해서 경연제로 운동 경기가 있었다. 사랑과 생식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그런 도시였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목사님 설교 들으니까 이제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하면은 여러분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복음 안에 있지 못하고, 교회가 우리 한국의 교회도 우리 조상적부터 믿어 왔든 천지신명 샤머니즘적 신앙이 있잖아요. 그것에 많은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복음의 진수를 알고 깨닫게 될 거에요. 고린도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차이를 알아야 되요. 어떤 분들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면서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되어야 된다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행전 2장의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원사적으로 잠깐 이루어진 거에요. 우리가 죽어서 육신을 벗어 버리면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네 것 내 것이 구분이 없고, 모든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며,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드리며 이 모임이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거에요. 그 예루살렘 교회조차도 이제 우리 인간은 육을 가지고 있잖아요,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있잖아요. 그래서 왜곡이 일어나는 겁니다. 또 그 제한 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이 예루살렘 교회 이후에 교회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빌립보 교회,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 이런 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 지상의 교회의 모습 속에 복음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은 이 고린도 교회는 어떤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 하면은 고린도 지역에 있는 정신적 사상 헬라적 구원론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헬라의 사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굉장히 많이 왜곡을 했든 거에요. 이 고린도 지역은 또 지역적으로 구역공과에도 해 놓았지만 이 고린도 지역에는 포세이돈신 바다의 신이지요, 그 신을 숭상을 해서 경연제로 운동 경기가 있었어요. 그때 모든 그리스 국가들이 그곳에 모여서 운동 경기를 했고, 사랑과 생식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그런 도시였어요. 그래서 성윤리가 굉장히 문란했든 거에요. 그 문란함이 어떻게 교회에서 교리적으로 타협을 했는가, 이런 것들도 아셔야 되요.
그래서 예전에 당대에는 고린도 사랑 같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이 고린도 지역에는 수사학이 굉장히 발달을 했고, 유명한 학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수사학에 속담 중에 하나가 고린도 사람같이 말한다 하는 말은 그 사람이 굉장히 수사학적으로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왜곡했든 것은 헬라적인 구원관 때문이었어요. 그 헬라의 구원 관은 이분법인데 우리 한국 교회도 그런 것이 참 많아요, 뭐 간단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 더 자세히 알려면은 서울대학 철학과를 나온 우리 전재정 집사에게 물어 보고, 헬라적 이분법이라는 것은 영혼과 육을 나누는 거에요.
3. 영혼이 육체라는 소마 무덤 안에 묻혀 있기 때문에 육체에서 영혼이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했다, 그노시스 (gnosis) 지식 깨달음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적 사역,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은 하나님의 나라의 보증금 계약금 받은 거하고 같다.
그래서 영혼은 선하고, 육은 더럽다는 거에요. 왜 우리가 이 세상에 고난이 있고 더러운가 하면은 우리 영혼이 육체라는 소마 무덤 안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육체에서 영혼이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해요. 어떻게 벗어나는가 그노시스 (gnosis)지식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난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런 것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들인데 이런 것이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어떻게 왜곡했는가, 고린도 교회의 우리 전서 15장에 가보면은 고린도인들은 부활을 부정하잖아요, 왜 부정을 했는가 하면은 헬라적 이분법으로 보면은 육체는 구원받을 게 아니라, 없어져야 하는 거에요 더러우니까, 그래서 헬라적 이분법으로 예수님의 구원 속에 육체가 구원한다는 것은 그들이 받아 드릴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은 우리의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러분들도 제가 설교를 할 때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선입견을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니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부활을 부정하는 거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제대로 받아 드리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그 놀라운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 다와 지지도 못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지식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고, 그 지식을 받은 증거로 그 사람들은 성령이라 생각했든 거에요. 우리 한국 교회도 성령에 대한 왜곡이 참 많은데, 고린도 교회 보면은 은사에 대한 문제도 많이 나오잖아요.
그 성령으로 인하여 방언이나 그 다음에 예언이나 이런 지식의 은사 말의 은사를 고린도 교회는 굉장히 중요시 여겼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수사학을 중요시 여기고 그 수사학이 지식을 얻는 수단과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은사를 은사는 교회를 섬기라고 준 것인데, 그들은 그것이 구원받은 증거라고 여겼든 거에요. 그래서 지식을 자랑하기도 했고, 교회 안에 많은 분파와 분쟁이 일어났든 거에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한국의 성령론은 사실은 굉장히 헬라적인 요소가 많이 있고, 샤머니즘 적인 요소가 많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구원 사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행하신 사역으로 성령님을 이해하는 분들은 어떤 이야기냐 하면은 성령님이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교회를 만드셨어요. 오순절의 교회가 구원 사적으로 이루어 졌어요.
그러면 이 교회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 아바아버지가 되게 하신 것에 구원의 첫 열매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성령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누리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구원의 첫 열매고 성령을 보증의 영이라고 그래요, 보증금이라는 거에요. 교회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그리스도적 사역, 복음의 관점에서 비추어 보면은 하나님의 나라의 보증금 계약금 받은 거하고 같아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도 보면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이 실상은 계약금을 말하는 거거든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건을 받아 드리면은 하나님의 나라의 그 집에 계약금을 가지게 되는 것 소유권의 출발이 되는 거에요.
4.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반듯이 고난이 있다. 그 고난을 이길 힘이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 헬라인들은 그 왜곡이 헬라적 이분법 사상으로서 육체는 더러운 것이고, 영혼은 깨끗하다 하니까, 금욕주의와 에피큐리안 열광주의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을 하게하는가 하면은 우리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반듯이 고난이 있어요. 그 고난을 이길 힘이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그 삶의 그 놀라운 힘은 어디서 얻는가 하면은 교회를 통해서 얻어야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이 복음을 알면은요 이 지상에 있는 여러 가지 뉴스를 복음적으로 다 해석을 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에요. 우리나라의 지금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대한항공 조현민의 갑 질 모든 사람에게 공분을 샀어요. 이럴 수가 있나, 그런 것도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서 대안을 주는 것이 교회여야 되는데 거기에 보면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게 뉴스에 나오니까 아 정말 뭐 얼마나 정신병자와 같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우리 뉴스에서 났잖아요. 그래 대한항공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 뉴스를 듣고는 제일 걱정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이런 회사에 다니고 있구나 하는 것을 가족이 알까 봐 두렵다고 그랬어요. 우리 남편이 저런 수모를 당하고 직장을 다니는구나 그것을 아내가 알까 봐 두렵고, 자녀가 알까 봐 두렵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 속에 참 중요한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의 갑 질을 당하면서 살잖아요. 저도 그래서 혹시 부교역자들이 부담을 가지지 않을까 해서 참 말 한마디도 조심해요.
또 여러분들이 무슨 소리해도 욕을 해도 저는 참아요. 얼마나 여러분 힘이 들면은 퇴근하면서 포장마차에서 술 먹을 때에 안주 거리가 직장 상사 욕하는 것이겠어요 ㅎ ㅎ, 그런데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 직장 생활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그 고난을 이기게 하는 것이 가족이잖아요.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이 세상에 살면은 참 힘든 일들이 참 많아요. 그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 성령이고, 성령이 이곳에서 교회가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었다고요. 옛날에 한국 교회 보세요, 복음 안에 있을 때에는 힘들고 어렵지만은 교회 때문에 참는다, 교회 때문에 뭘 한다 이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교회 때문에 참고 뭘 하는 게 없어요. 왜 여러분들 구원이 한국적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인하여 왜곡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그 왜곡이 뭔가, 우리 한국에는 헬라인들은 그 왜곡이 헬라적 이분법 사상으로서 육체는 더러운 것이고, 영혼은 깨끗하다 하니까, 금욕주의와 에피큐리안 열광주의적인 요소가 많았어요. 그래서 헬라인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것도 육체는 이 망할 것이니까 없어져야 할 것이니까, 구원받은 자의 자유인 것같이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고요. 또 한편에서는 육체는 없어져야 하니까, 스스로 금욕 절재의 삶을 산다고요, 이런 것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든 모습이에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영육을 나누지 안 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했잖아요, 물은 h2o 인데 힘을 가해서 나누어 버리면은 그것은 물이 아니에요 수소고 산소가 되는 거에요.
5. 성령으로 우리 모두를 영원한 가족이 되게 하면, 첫째 우리 인간들이 많은 억압을 당하는 것에서 자유 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해 주실 것을 믿으면 속박에서 자유가 일어난다. 왜 못하는가 샤머니즘적 신앙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구원을 왜곡되게 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게 나뉘어 지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은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영육을 나눌 때는 이것은 인격적인 요소가 교회에서 소멸되게 하는 굉장히 나쁜 요소가 일어나는 거에요. 그 요소가 금욕주의적인 것과 아니면은 열광주의적 에피큐리안 이런 것들이 다 그런 것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있는 구원이 뭔가, 우리 한국에는 왜 예수 믿는가 하면은 예전에는 그러지 안 했어요. 내가 이루지 못할 것을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려고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해요. 그래서 기도가 뭐냐 하면은 자기가 이루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이루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은 천지신명을 믿었든 샤머니즘적 신앙이에요.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이 무엇인 줄 아세요, 여러분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 아바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모두를 영원한 가족이 되게 하면은요, 첫째 우리 인간들이 많은 것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거든요, 그런 것에서 자유 하게 되어져요. 특히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호르몬의 작용에 의해서 자기의 감정의 조절을 받지 못하고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은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말 한마디 행동했든 것을 나중에 참 후회를 많이 하게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얘들 생각하면 염려가 일어나고 걱정이 일어나잖아요.
그것은 왜냐하면은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감정적 작용이거든요. 그런데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 드리면은 그런 염려와 걱정에서 자유 하게 되어져요. 놀라운 구원의 기쁨이 시작이 되는 거에요. 이런 것 처음 들어요? 여러분들이 이런 신앙 생활을 해보라고요. 여러분들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고 이러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수고를 누리지도 못하고, 남과 나누지도 못하고, 평생 통장에 액수만 보면서 위로 받다가 죽잖아요. 그런 게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의 미래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속박을 당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해 주실 것을 믿으면은요 그런 속박에서 자유가 일어나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한마디 들은 것, 제가 이야기 하잖아요, 인간은 전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 한다고, 하나님은 전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이해하신다고, 교회 안에도 보면은 자기가 볼 때는 분명히 이 사람이 그런 것이 거든요, 그런데 상대방은 이쪽 면만 보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누구에게 한 소리 들으면은 감정에 속이 상하고, 억울하고, 이런다고요. 그런 호르몬의 작용이 나타나면은 그 다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열 마디 들은 것, 백 마디로 그 사람 말한다고요. 교회에 얼마나 그런 일이 많아요. 그런 억울한 감정에서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은 자유 하게 되어져요. 이런 자유를 왜 못하는가 샤머니즘적 신앙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구원을 왜곡되게 한 거에요.
6. 예수님의 그리스도적 구원을 받아 드려서 자유 하게 되면은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나타난다. 예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적 그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가 될 때 비로서 여러분들의 삶에는 평안이 넘친다, 성령을 보내어서 만드신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딴 근심이 없다.
오늘을 위한 찬양 우리 불렀잖아요, 모두 나를 떠나도 외로워 하지 않고, 이 말이 뭔지도 모르고 기독교 생활하는 사람 보면은 참 불상해요 저는, 억울한 일 당해도 원통하지 않고, 인생사 억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억울한 일 당해도 억울하지 않는다면은 그 사람을 누가 불행하게 하겠어요.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이 그런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도 자기하고 성향이 같은 사람은 언제나 좋게 보이고, 성향이 다르면 나쁘게 보이고, 전부 자기 감정에 매여서 사는 죄인들의 삶의 실존이에요. 정말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여러분들이 잘 받아 드려서 살면은 교회 안에 좋은 사람 안 좋은 사람이 점점 없어져요. 자유 하게 되어져요.
한국의 초창기 교회는 그랬다고요. 80년대 들어오면서 희한한 복음이 한국 교회를 왜곡시킨 거에요.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의 그 구원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하여 영원한 가족의 공동체를 만드신 것을 여러분들이 받아 드리는 순간 잃어버린 것들을 애달파 하지 안 해요. 젊음을 잃어버려 가지고 얼굴을 이래 당기는 일도 안 한다고요. 살아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도 안 해요. 살아가면서 탐욕 하지도 안 해요. 그저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봐 가지고 기준이 자기가 되어 가지고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되는 나의 나 됨도 버리게 되어져요. 가난해도 비굴하지 안 해요. 부요 해도 오만하지 안 해요.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절망하지 안 해요. 이런 자유가 있어요. 내가 왜 우리 교회에서 12년 동안 여러분들이 때로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그 복음을 했는가, 이런 자유를 누리라고요.
그런데 대부분 이런 것을 못 받아 드리는 것이 뭐냐 하면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든 내 피 속에 흐르는 5천 년의 한국민 속에 있는 샤머니즘 천지신명의 신관이 다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이제 고린도 교회를 전서를 보면서 여러분들이 참 이런 자유 함을 누리는 신앙 생활이 되어야 되요.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그랬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요 자식이 서울 대학을 가든, 용인 대학을 가든, 그 감정의 기복이 그래 크지를 안 해야 되요. 천국에 가면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거에요. 그런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감정의 기복이 있지만은 그 기복이 굉장히 잔잔해 지는 설교를 이런 설교를 좀 들어야 되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어지면은 왜 우리가 그래 살아야 되는가, 내가 그렇게 혼자 자유 함을 한다면은 불교의 해탈이 되어 버려요. 기독교는 해탈하고 달라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그리스도적 구원을 받아 드려서 여러분들이 자유 하게 되면은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나타나는 거에요. 이 공동체가 예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적 그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가 될 때 비로서 여러분들의 삶에는 평안이 넘치는 거에요.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내가 주님 안에 있으니까, 있다는 생각이 나를 나의 근심을 내쫓는다 이러면 관념적 종교가 되어 버려요. 주안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을 보내어서 만드신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딴 근심이 없어지는 거에요. 제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려고 하는가 하면은 주안에 있는 교회가 되려고 해요.
7. 자유 함을 입은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 진 공동체로 말미암아 평강이 일어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다. 재림과 함께 그때 되면은 해명이 필요 없다. 앞면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뒷면도 밝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서 알게 되는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여러분들이 교회에 속하게 되면은 여러분들의 삶의 근심이 없어져 가는 교회가 되어야 되요,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에요. 그런데 왜 그런 교회가 못 되는가, 개인의 자유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왜 안 일어나는가, 샤머니즘적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누가 나에게 한 소리해도 그 소리가 내 감정을 요동치게 안 하게 되면은 샬롬이 일어난다는 거에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뭐에요?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일이 비일비재 하게 되니까, 그래 가지고 교회 떠나면서 또 욕은 목사 욕하고 떠나요. 참 그런 억울한 소리를 당해도 억울해 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복음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 그래서 개인에게는 예수님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게 되면은 자유 함이 일어나고요, 그 자유 함을 입은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 진 공동체로 말미암아 평강이 일어나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에요. 그래서 이런 구원을 우리는 맛만 보는 거에요, 첫 열매에요. 그것이 장차 재림과 함께 완성된 예루살렘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그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은 이미 천국에 재림과 함께 이루어져 있어요. 그 재림에 대한 보증금으로 교회가 돼 있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그 맛본 것이 너무나 좋아서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셔서 내가 이제 아이가 서울 대학 갔든, 용인 대학 갔든 감정의 기복이 조금 있는데 이것마저도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받아 드려서 그 첫 열매를 받은 사람은 보증금으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발하게 되는 거에요. 이말 이해 되세요, 이게 이해 되셔야 되요, 이게 신앙 생활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뭡니까, 교회 다니면서 남에게 엉뚱한 소리 들었을 때에 속이 뒤틀리고 호르몬이 엔돌핀이 나오지 않고, 이상한 게 나와 가지고 밤잠을 못 자게 하고 이럴 때에도 그 고난을 이길 힘이 뭐냐 하면은 교회 때문에 그래 목사님은 내 마음 알겠지, 또 목사도 뭐 그래서 떠나는 교인은 떠나더라도 우리 장로는 그래도 내 마음 알겠지, 나하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이게 고난을 이길 힘이에요.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또 가서 해명해야 되요. 이게 고난을 이길 힘이 아니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수 믿으면은 누가 뭐라 하거든 오해가 있거든 내가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증거에요. 우리 교회에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해야 할 이유는 신앙 생활 잘 해서 내 아들 좋은 대학가고, 내 사업 잘되고, 그것은 천지신명 믿는 거에요. 그 다른데 가도 좋아요. 정말 여러분들이 와서 예수님의 구원을 제대로 받아 드려서 이제 성령을 은사를 구원받은 증거로 삼지 않고, 교회를 섬기는 섬김의 은사로 받아 드리고,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이 내 마음 아시겠지, 아버지 알겠지, 해서 우리가 제한된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그래도 좀 자유 함을 얻고, 그 자유 함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정말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져서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는 평강을 교회를 통해서 맛봄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억울한 많은 말들 인간적 요소 때문에 일어나는 그 고통을 이길 힘을 얻는 그런 성령의 역사, 앞으로 좀 우리 교회 그래 보자고요. 누군가가 억울한 소리 하고 뭘 해도 뭐 우리 목사님은 내 마음 알겠지, 우리 권사는 알겠지, 그게 믿음이거든요, 그게 보증이거든요, 그런데 재림과 함께 그때 되면은 해명이 필요 없는 거에요. 다 알게 되거든요. 앞면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뒷면도 밝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서 알게 되는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오늘 이런 신뢰의 관계가 고린도전서를 우리가 함께 묵상해 가는 동안에 더욱더 깊어져 가는 그런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제가 요즘 “체게바라” 책을 읽습니다, 남미의 개혁가 공산주의 자지요, 혁명가의 가장 표본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 저는 그렇게 행동 안 해요, 그 사람 열심당 입니다. 예수님은 열심당에 의해서 죽잖아요. 그런데 그의 말이 참 좋은 말이 있어요, 우리 모두가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기독교인들은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되요.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며 살아야 되요. 한번씩 우리 교인들에게는 내가 듣는 소리,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이상적이야, 불가능한 꿈이 있어야 되요.
그러나 리얼리스트가 되야 되요.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가슴 속에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불가능한 꿈을 가지고 사는 자만이 리얼리스트가 되어서 이 헌금을 드리면은 아이에게 메이커 옷 사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불가능한 꿈을 위해서 주님 앞에 드린 예물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세워 진 공동체가 교인들에게 평안을 맛 보아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의 보증금이 되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드린 헌금이 은사가 되어서 세워 져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석에 있는 자들에게 병의 고통을 직면하는데 어떠한 질병도 없는 재림 후에 완성될 완벽한 육체가 그 질병을 이기는 힘이 되는 병상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인생의 문제 가난의 문제가 있는 자들에게 더 이상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없었든 예루살렘 그 교회가 재림과 함께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믿으면서 내일 양식을 걱정하는 현실적 문제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보증금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심이 오늘도 구원의 첫 열매로 재림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보증인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임을 알아서 교회를 통하여 천국을 맛보다가 완성될 그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기를 원하여서 철저한 리얼리스트이지만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안고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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