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십자가의 도(1)(하나님 마음. 어버이 마음)
고린도전서 1:18-25절
2018년 5월 13일 주일 낮 예배(어버이 주일)
No. 366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멘
● 십자가의 도는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셨다는 것. 우리가 억울하고, 답답한 그 일을 그분이 친히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고린도전서 오늘 1장 18절은 금년의 우리 교회의 주제 성구이고, 또 고린도 전서의 전체의 주제 성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러분 이 말씀이 정말 제대로 되어져야 여러분들의 삶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평안 평화를 누리며 신앙 생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교인들이 구원의 기쁨을 좀 누리지 못하고, 교회가 신앙 생활하는데 참 하늘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생각하는 거와 같이 십자가의 도를 모르든지, 아니면은 구원받지 못한 멸망 받은 자들이 생각하는 십자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1. 전도를 해야 되고,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을 알게 해서 이 세상이 공의로운 세상이 되려고 한다.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말씀, 걸림돌이 되었다가 믿음의 관점으로 받아 드림으로 구원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임을 확실히 알게 되는 변화가 있어야 된다.
우리 신앙이나 우리 인간의 모든 삶은 어디에서부터 출발을 하는가 하면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에요. 여러분들이 걱정하는 것이나, 이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나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람이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해야 되고,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복음을 알게 해서 이 세상이 공의로운 세상이 되어지고, 사람이 가치 있는 생애를 살아가는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거든요. 환경은 그럴지라도 내 자신이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환경에 지배 받지 않는 그런 영생의 삶을 살아가도록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는데 우리 교회들이 그런 것들을 상실하는 것 같아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성경을 보면은 23절에 보세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여기에 거리낀다는 말은 걸림돌이 된다, 화가 나게 하는 것이다 미련한 것, 정말 저래 믿어 가지고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화가 나야 되요. 걸림돌이 되야 되요, 그랬다가 여러분들이 믿음의 관점으로 그것을 받아 드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임을 확실히 알게 되는 그런 변화가 있어야 되요. 먼저 십자가의 도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도[道] 이러니까 무슨 뭐 큰 뭔 줄 아는데,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도라는 말 길도 자 말씀, 그 말씀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그 사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셨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거에요. 그래서 너희들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라는 거에요, 여러분 그런데 이 말씀이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뭐라는 가 하면은 미련하게 들린다는 거에요. 화가 나게 들린다는 거에요. 왜 그런가? 오늘날 우리는 좀 쉬운 말로 말씀 드리면은 대한 항공을 바라보면서 저 집안은 왜 저래, 저 집안의 자녀들은 왜 저래, 이러지만은 여러분 솔직히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다 그런 재벌 아버지를 두고, 갑 질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그 갑 질을 당하는 그 사람을 아버지로 두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사람들의 요구를 알기 때문에 종교인들, 나는 그런 분들은 목사라고 하고 싶지도 안 해요. 그분들이 뭐라는 가 하면은, 재벌 하나님을 자꾸 말씀 해주는 거에요. 입만 열면 여러분들의 소원을 다 성취해 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은 이렇게 해야 돼 이런다고, 그래서 평생 재벌 아버지를 두지도 못하고, 갑 질도 못하면서 그런 아버지 삼으려고 애쓰고 용쓰다가 죽는 게 오늘 한국의 신앙인들이 아니냐 말입니다. 여러분 참 그 갑 질을 당하면서 직장 생활 하면서 수모를 당하는 그런 그 아버지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할 때 여러분 내가 왜 그런 하나님 믿어야 돼, 여러분들 속에 그런 생각 안 들겠어요.
2.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란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방법과 능력으로 우리 편을 들어 주는, 그런데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사야 53장에 앞으로 너희에게 보낼 메시아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우리가 흠모[欽慕]할만한 무엇도 없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라고 말해요, 유대인들에게는 여러분 여기에 걸림돌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기상천외[奇想天外]할 방법으로 자기의 자녀들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을 인도해 가시고 보호해 가는 그 하나님을 믿었든 거에요 그들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방법과 능력으로 우리 편을 들어 주는, 그런데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그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거든요,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달린 그런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냐 라고 생각을 해서 지금도 안 믿고 있다고요. 여러분 여기에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은 어떤 자가 세상에 구원자가 되어야 되는가 하면은 위대한 철인 철학자나 아니면은 온 세상을 지배하는 영웅호걸 [英雄豪傑]그런 메시아를 기다렸다고요. 그런 자가 구원 자라고 생각 했다고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있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내 하나님으로 삼고 싶은 것은 이방인들과 같은 거에요. 그런 그들에게 그들이 무너트려야 할 로마의 세력[勢力]에 처절히 여러분 십자가에 달린 것은 반역자가 당하는 처벌이고 노예들에게 행하는 형벌이거든요. 가장 비천하고 무능한 그 예수를 구원자라고 삼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지금도 생각을 해 보세요, 예전에도 또 그런 사건도 있었잖아요, SK에서도 최태원 회장 사촌 동생 최철원인가 뭐 그게 트럭 노조 하는 사람을 매 값이라고, 한대에 백 만원씩 해서 스무 대를 때렸든 그 자기보다 훨씬 어린 회장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이천 만원 던져 주는 그것을 받는 그분을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 삼고 싶겠느냐 말이에요.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말해요.
이사야 53장에 뭐라고 그래요, 앞으로 너희에게 보낼 메시아는 고운 모양도 없다, 풍채도 없다, 우리가 흠모[欽慕]할만한 그 무엇도 없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어요. 고운 모양이 아니었어요. 풍채가 있어서 그 앞에 가면 카리스마를 느끼는 그런 분도 아니었어요. 우리가 흠모 할만한 그 무엇도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싫어했고,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버린바 되었다, 강골은 고생을 많이 했으며 온 몸에는 질병 덩어리 질고를 가지고 있었던 자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왜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 자가 되는가, 이사야서에는 그렇게 말해요.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을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의 모든 그런 고난은 멸망 받을 우리들을 위해서 당하신 것이다. 우리가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고, 우리가 억울하고, 답답한 그 일을 그분이 친히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려면은 여러분들이 그 십자가를 믿음의 관점에서 봐야 되요. 그래서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그런 말이에요. 여러분들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이에요.
3. 예수님이 그렇게 처절하게 비천 해지고, 예수님이 그렇게 정말 천함을 받은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왜 우리같이 인간이 되어졌는가, 우리를 위해서다. 이게 믿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구원 얻는 자의 관점이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시다.
여러분들의 관점에서 재벌 아버지 무엇이든지 입만 벌리면 해주는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십자가를 보지 말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관점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은 예수님이 그렇게 처절하게 비천 해지고, 예수님이 그렇게 정말 천함을 받은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위한 겁니다, 믿음이 이 말이에요. 그 고통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 믿음의 관점이에요. 다시 말하면은 그 자기 딸 같은 대한항공의 재벌의 그 딸 앞에서도 물 뿌림을 당하고, 온갖 소리를 당해도 꾹 참은 것은 아버지가 우리 자녀들을 키우기 위한 당한 수모라는 것을 받아 드릴 때에 그 아버지 때문에 행복해 할 수 있는 자녀가 되는 거에요.
우리 아버지는 왜 저거밖에 안 돼, 자기 관점에서 보는 거에요. 그러면 구원이 일어나지 안 해요. 우리 아버지가 저런 수모를 당하고 그렇게 해서 봉급 받아 와 가지고 내 공부 시키고, 내 옷 샀구나, 우리만 없어도 아버지가 저래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이게 믿음의 관점이에요. 우리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없어도 외롭지 안 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뭘 안 해도 그 영광의 훼손이 없어요. 그런 하나님이 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가, 우리와 똑 같이 고통을 받으셨는가, 왜 친구 나사로의 울음을 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인간이 되셨는가, 왜 그분은 사마리아 길을 걸어갈 때에 피곤해서 우물가에 쉴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되었던가, 왜 그분은 40일 금식을 기도했을 때에 우리와 같이 배고픈 자가 되었는가, 우리를 위해서, 이게 그리스도의 비하에요 성육신 이에요.
하나님이 왜 우리같이 인간이 되어졌는가, 우리를 위해서요. 이게 믿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구원 얻는 자의 관점이에요. 하나님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부모가 약해서 딸-뻘 되고, 아들-뻘 되는 자에게 매맞고 엉뚱한 소리 듣는 게 아니에요, 자식을 위해서, 이걸 알 때 자식이 사람이 되는 거에요. 우리가 인간이 되는 것, 인간다운 삶이 사는 것은요 믿음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볼 때 비로서 되는 거에요. 이렇게 살아야 돼, 저렇게 살아야 돼, 그런다고 절대로 되지 안 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면서 이래 살아야 돼, 저래 살아야 돼, 설교 안 하잖아요. 그래 몰라서 안 합니까 우리가, 다 알지만은 연약함 때문에 못살잖아요, 누가 그래 살아가는 거에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인간과 같이 낮아져서 우리의 당하는 모든 고난을 그가 친히 겪으신 것을 받아 드릴 때에 우리는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요.
우리 한국에 지금 기독교의 문제가 뭔가, 저는 그래 생각해요. 위대하신 하나님만이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비천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거에요. 옛날에 기독교인들은요 목사님들의 설교는 위대하신 하나님 찬양 안 했어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얼마나 비천해 졌는가 이였다고, 그래서 찬송가도 보면은,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나 같은 자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요즘 이런 찬송 없잖아요. 먹보다도 더 검은 전부 뭔가 하면은 뭐 위대하고 강하신 주 이런 것만 한다고, 영웅 호걸인 하나님만 이야기 한다고요, 그래 사람이 사람다워 지지를 않는 것 같아요. 부모가 자녀를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에요.
4. 그 완전한 패배 그 무력함 그 비천함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셨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나 때문에 비천 해지셨고, 무력 해지셨고, 완전한 패배를 당하셨구나, 그것을 받아 드린 자가 올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산다, 비천하게 보였든 그 분이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늘 재벌과 같은 그런 능력 있는 부모를 바라는 자에게 절대로 효도 없습니다. 사람다워 지지 못해요. 여러분 우리가 부모들도 마찬가지라고, 오늘 우리 부모들도 회개해야 되요, 전부 능력 있는 자녀들에게만 기대를 해요. 여러분 그러다 보니까 세상이 엉망진창 되는 거에요. 저는 말 중에 그런 말 있잖아요, 못난 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못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잘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 안 해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볼 때에 비천하고 무가치하고, 흠모 할만한 것 없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거에요.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한 무한한 기대도 버려야 되요.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좋은 세상이 됩니다. 조금 눈을 뜨고 한번 보세요. 자녀 잘 키운 사람들 보세요, 전부 자녀 잘 되었다는 것 자랑만 있는 거지, 자녀 때문에 행복은 없어요. 그 못난 것 그게 그래도 효도하고 부모 모시고 살아요. 인간의 착각은 뭐냐 하면은요 기독교의 위대한 착각이 그런 거에요. 전부 하나님을 헬라인들이 바랐든 위대한 철학자나, 로마인들이 생각했든 위대한 영웅과 같은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우리의 하나님은 십자가의 노예들과 실패한 반역자들의 상징, 무력함의 상징, 완전한 패배의 상징인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거에요.
그 완전한 패배 그 무력함 그 비천함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거에요. 오늘 어버이 주일에 여러분 누가 효도합니까, 자식에게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어서 어디에 가도 늘 을 질이나 하는 그 부모가 내 때문에 그랬구나, 이것 아는 자가 효도하는 거에요. 누가 우리를 하나님을 공경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까, 그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나 때문에 비천 해지셨고, 무력 해지셨고, 완전한 패배를 당하셨구나, 그것을 받아 드린 자가 올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요. 우리 사회에 오늘 우리 주일 학생들하고 예배 드려서 이런 깊은 이야기는 못하지만 우리 사회가요 제대로 되려면은 입만 벌리면은 다 해주는 그 신을 믿지 말고요, 우리를 창조하신 신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그 무력하고 비천한 그 분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오늘 나의 나 됨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자, 내가 재벌 아버지를 둔 것은 내가 잘나서 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매맞는 돈으로 자식 공부시키는 그 직원을 섬기라고 나를 그 자리에 있게 했다는 것을 믿음의 관점으로 받아 드릴 때에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저는 우리 한국 기독교 정말 생명 없어요. 그래서 행복이 없어요, 많은 것을 가지고도, 공평이 일어나지 안 해요. 아멘
◈축도◈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흠모 할만한 그 무엇도 없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낮아지심을 받아 드린 자만이 참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것 알도록 주께서 십자가의 달려 돌아가신 그 하나님의 사랑하심, 오늘도 우리를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그 은혜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그 사랑을 받아 드림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공평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재벌과 같이 입만 벌리면 다 해주는 그 하나님을 바라지 아니하고 비천하고 무력하고 패배의 상징인 그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낮아지심을 받아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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