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웅담임목사주일설교원고

십자가의 도(2) – 고난의 역설(고전 1: 28-25)주일 낮 예배 설교문

차주희 2018. 5. 25. 11:21




담임목사 김종웅



십자가의 도(2) – 고난의 역설

고린도전서 1: 18-25

2018 5 20일 주일 낮 예배

                                                                                                                                                  No. 367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당한 예수였다. 미련한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임을 경험하게 된다. 주님이 왜 고초 당했나?

우리 오늘 고린도전서 1 18절부터 31절은 17절에 있는 내용에 대한 해설입니다. 17절이 뭐냐 하면은 바울이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랬습니다. 여기에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가 헛되지 아니하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매어 달린 2천년 전의 사건이 의미하는 그 의미가 비어 버리지 아니하도록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헬라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으려고 잘 되려고 지혜와 지식의 자기 주장이 있었는데 그러한 지혜의 일종으로 복음을 전하지 아니했다. 이런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은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많은 인간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1. 구원의 기쁨이 그 신앙 속에 있고, 그런 구원의 기쁨과 자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평안을 맛보는 그런 교회가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계시 해주신 그 하나님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은 화가 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많은 종교와 사상 중에 하나가 아니다. 라고 말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절대로 자기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내용이 비어 버리지 아니하도록 항상 조심한다. 이런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이지요, 우리 교회는 보면은 뒤에 십자가도 없고, 제 차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달지도 안 합니다. 왜 안 하는가, 십자가가 부적이 되는 순간, 십자가에서 말하는 복음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는 무엇인가, 여러분들에게 제가 말씀을 드렸지요,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 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새롭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 것을 새롭게 해서 이제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해 주심을 믿으며 살아가려고 해야 됩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 우리를 얽어 매는 많은 것에서 자유 함이 일어나고요, 구원의 기쁨이 그 신앙 속에 있고, 그런 구원의 기쁨과 자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평안을 맛보는 그런 교회가 되여 집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만을 보더라도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도 또 있고, 또 교회에도 정말 진정한 평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에도 있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우리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전부다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해주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 생활 하는 것인 줄 아는데, 제가 볼 때에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한 생각이 항상 잊어버리는 것 같아. 나에게 아버지 노릇 해 주시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 동안 여러분들은 유대교적 종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니까 잊어버려요.

 

그래서 그 뒤에 보면은 23절에 뭐라는 가 하면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계시 해주신 그 하나님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은 화가 난다는 거에요. 유대인의 관점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화가 난다는 거에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고,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해 주시는 것을 믿으며 살려고 하면은 내가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되느냐 화가 나야 되는 거에요. 또 실제로 우리 교회는 그런 항의도 있고, 또 그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 유대인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은 최소 한도로 하나님이라면은 자기의 백성 정도, 자기의 자녀들은 지켜 줄 수 있는 힘이 있는 하나님을 생각해요.

 

2. 유대인 랍비들은 하나님 봐라 애굽의 노예였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홍해를 갈랐든 하나님 아니냐,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기이한 능력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 정도의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신이지, 하나님이지, 초라한 자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 여러분들이 신앙의 출발이 되는 출애굽기에도 보면은 유대인들은 랍비들은 뭐라고 설교를 하는가 하면은 하나님 봐라 우리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든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홍해를 갈랐든 하나님 아니냐, 그 기이한 능력으로 너희를 인도해 나가시고, 너희를 지켜 주실 거야, 이렇게 생각 한다고요. 만나와 메추라기로 너희를 40년 동안 먹이신 그 기이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인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안 돌봐 주겠어, 네 정성이 부족한 거야, 네 신앙이 부족한 거야, 그런 그들에게 오늘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런 기이한 능력의 하나님이 아니었거든요.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는 어떤 인간이 가치가 있는가 하면은 헬라인 들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미련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는데, 헬라인 들에게는 최소 한도로 지식이 많아서 그 지식이 자신을 구원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가 가치 있는 자라고 생각을 했든 거에요. 그래서 그들은 지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기 때문에 최고의 가치 있는 사람은 철학자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철학자 그런 지식의 일종을 말하지 안 했거든요. 로마인들에게는 최소 한도로 자기 몸 하나는 지키고, 자기 가족 정도는 지켜 줄 수 있는 사람, 힘이 있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인데, 예수님은 자기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당한 예수였다고요.         

 

그래서 그들이 볼 때에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거에요. 가끔 우리 교회에도 저에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내가 믿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내가 기도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것은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의 생각 속에 너무나 유대교적인 종교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에요.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백성 자기 말을 잘 듣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구원해 주고 복 주는 하나님을 말하는데, 그 하나님이 아니에요. 여러분 24절에 보면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불러 주시면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야, 하나님이 불러 주셔야 예수 믿어, 하나님이 불러 주셔야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 불러 주지 아니한 자들은 지옥 가, 선민 의식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3. 십자가를 종교적인 관점,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화가 난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온전하신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입고 오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것을 친히 체휼[體恤]하시고,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는 것이 우리를 위함이다.

 

여러분들이 이것도 문맥 국어 문맥을 잘 보면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 수동인데 무슨 말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같이 못난 자들, 나중에 26절부터 고린도 교회의 예정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요, 볼품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 삼아 주신 것을 인정하는 자들, 이제는 십자가를 종교적인 관점이나,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화가 나게 하는 것이고, 미련한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임을 경험하게 된다는 거에요.

 

이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지난주일 뭐라고 말씀했는가 하면은 최철원씨 가지고 이야기한 거에요. SK에 창업자의 아들 최태원의 사촌동생 최철원 물류회사 했지요, 몇 년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어요, 자기 회사의 물류 회사를 합병하는데 탱크로리 기사가 고용을 승계해 달라고 하니까, 1일 시위하니까 따라오라 해 가지고, 너 엎드려뻗쳐 한대에 백만 원이야, 스무대를 때리고 백만 원짜리 수표 스무 장을 던져 주며 이것 가져가 xxx 하고 내 쫓은 사건이 있었지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다 최철원이와 같이 갑 질하고 어디에 가나 자기 가족을 보살필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을 바란다면 유대교의 하나님이요.

 

자기보다 열 몇 살 어린 그 자에게 엉덩이를 데고, 야구 방망이로 맞으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 그 초라한 그 아버지가 왜 매를 맞는가, 힘이 없어서, 돈이 없는 거지 힘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 자식 때문에 자식 공부 시키려고, 자식 옷 사 주려고, 마누라 기죽지 아니하고 어디 가서 돈 쓰도록, 그 일을 하는 것, 그것을 받아 드리는 순간, 그 사람의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책임지지도 못할 자식을 왜 낳았어, 유대교의 관점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지지리도 못나서 아들 하나 지켜 주고 아들 하나 원하는 것 해주지 못하는 그런 아버지, 부끄러워하는 것, 종교와 세상의 관점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은혜의 관점에서 보면은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매 맞는 것은 낳은 내 자식을 위해서, 우리 하나님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된 자들을 홍해를 갈라서 가나안 땅에 넣는 것은 자기의 백성을 지켜 주는 힘있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되게 하도록, 그것을 알지 못하고, 갑 질 하는 유대교에게 네가 믿는 하나님은 틀렸어, 이말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요, 최소 한도로 자기의 백성 자기의 자녀들은 기이한 방법으로 능력으로 지켜 주는 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내용이 알맹이가 빈 십자가가 아니었느냐 말입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온전하신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입고 오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 하시고, 가장 낮은 노예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의 그 처형을 당하는 것이 우리를 위함인 것을 받아 드리는 순간 우리 그 하나님은 어떤 위대한 하나님보다도 위대하게 보여져요.

 

4. 가치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은혜로 부르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아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왜 하늘 보좌 권세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로마의 의해서 사형 집행을 당하셨나? 나를 위해서이다.

 

자기보다 열 몇 살 어린 자에게 엉덩이를 내 놔 놓고 빳다를 맞으면서 내가 이 매 값이 우리 얘에게 스마트폰이 되고, 나이키 신발이 되게 하기 위해서 수모를 겪은 그 아버지의 마음과 그 은혜를 받아 드려서 그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그 초라한 아버지는요 어떠한 위대한 아버지보다도 존귀하게 보여져요. 이게 말로 설명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했다고 그랬어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했다고 그랬어요. 그 관점에서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 아이에게는 스마트폰 사줄까, 아빠 필요 없어, 네 친구들 다 가지고 있는데 최신형으로 사야 안돼, 아빠 괜찮아, 나는 아버지가 있잖아, 이런 삶이 나와요. 나이키 사줄까, 괜찮아, 시장의 상품이면 뭐 어때,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없는데, 옛날의 기독교가 그랬어요. 암 낫게 해줄까, 괜찮아, 하나님 부활의 영광이 아버지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그 중한 고난을 겪으셨는데, 이 암쯤이야, 이런 것이 기독교의 힘이었어요.

 

가난 별문제가 되지 안 했어요. 그 사랑의 하나님이 십자가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데, 여러분 오늘 말씀이 그런 말씀이에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 하나님이 불러 주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의 소유된 백성 되게 해서 우리는 세상 사는 사람하고 달라, 선민의식 입니다. 별로 가치 없는 가진 것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은혜로 부르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게 하는 자, 아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은 19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여기에 지혜와 총명은 세상사는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거에요.

 

그 지혜가 멸한다, 무력화 된다,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싶은 최신형의 스마트폰이 별로 가치 없고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 된다, 이런 말이에요. 모든 사람이 장수하고, -질 하는 생애를 살기를 원하는데, 그 마음이 없어진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여기에 지혜 있는 자는 철학자를 말해요. 헬라인들이 가장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려면은 가장 가치 있는 철학자가 되야 된다는데 이 세상을 구할 철학자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는, 헬라시대에게 지금 말하는 겁니다. 선비가 어디 있느냐, 서기관이 어디 있느냐, 유대 사회에 서기관들과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생각이라 하는데 이 세상에 세상을 구원 할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너희에게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다 줄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너희의 삶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사상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진리를 논하는 자리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냐, 모든 사람이 갑 질 하기 위해서 사는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무너트린 것이 아니냐, 여러분들이 이 변화가 세례 받는 지은이에게나 우리 속에 있어야 되요, 예전에는 그랬어요. 왜 그분이 그 하늘 보좌 권세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인간 로마의 의해서 사형 집행을 당하는 노예와 같은 처절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가, 나를 위해서, 그때에 내 인생의 출세가 의미가 없어져요.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 해져요. 그 어떤 신하고 비교할 수 없게 되어져요. 암과 병이 나를 지배하지 못해요. 나에게 준 이 영생을 빼앗을 자가 없게 되어져요.

 

5.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신 그 사건을 받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이 없는 놀라운 구원의 기쁨이 있다. 십자가에 나 같은 자를 위해서 매어 달린 것을 믿음의 눈으로 은혜의 눈으로 받아 드릴 때에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는 것들에서 자유 함이 일어난다.

 

저는 여러분들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와 같이 연약하게 되어져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보호해 줄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인간이 되시고, 힘있는 로마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당하는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신 그 사건을 받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이 없는 놀라운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렇게 부자 되기를 원하지만은 살아 보세요, 부자라고 행복하게 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완성을 통해서 자기 양심을 자유를 얻으려고 남들보다 바르게 살려고 하지만 자기 내면에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얻으며 삽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생활을 통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신앙 생활 잘하면은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줄 알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은 마음의 평안이 있을 줄 알고, 평안을 찾아 다니지만은 어떠한 종교적인 수행과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어요.

 

십자가에 달린 그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위해서 매어 달린 것을 믿음의 눈으로 은혜의 눈으로 받아 드릴 때에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는 것들에서 자유 함이 일어나요. 남들이 볼 때에는 자기 자식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자기 마누라에게 명품 가방 하나 사주지 못하고, 열 몇 살이나 어린 것에서 엉덩이 들어 대 놓고 두들겨 받고 피 멍든 그것이 나를 낳은 자이기에 나를 위해서 아는 순간 어떤 능력 있는 아버지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위대하게 보여요. 그 아버지를 그 은혜가 임할 때, 가지고 싶은 게 없어져요. 우리 이것 회복해야 되요.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새옹지마 아니에요 내가 이 고난 당한 것, 예수님의 그 고난 당한 것의 눈으로 나의 고난을 바라볼 때에 내 그 고난이 나를 인간되게 했구나, 이런 말이에요.

 

6. 고난 당한 이후에 주의 율례와 규례를 배웠노라, 그래서 나는 고난 당함이 유익이다. 비록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성경적으로 흠이 많을지라도 주님이 왜 그 고초 당했나, 주님의 고난의 눈으로 자신의 고난을 바라볼 수 있는 이런 신앙이 우리들 속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이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하나님의 고난을 알지 못하고, 내 고난을 알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때에는 사람같이 안 살았다는 거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는 거에요. 고난 당한 이후에 주의 율례와 규례를 배웠노라, 내가 고난 당하고 보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눈에 보이기를 시작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고난 당함이 유익이다. 어느 종교에서 어느 철학에서 어느 사상에서 여러분 이런 고백이 나오게 하느냐 말입니다. 어디에 간다고 해서 내 병 낫는다, 여러분들 가난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 여러분들의 자녀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수많은 사상들과 지혜와 얼마나 많은 종교가 존재해요. 성경은 그렇게 말해요. 네 문제를 해결 해 줄 수 있는 그분이 너의 연약함을 체험 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가셨고, 이 부르심을 받은 은혜의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바라보는 순간 내가 고난 당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다.

 

여기에 생명이 있는 것이고요, 여기에 여러분들의 인생의 자유 함이 있는 것이고, 이런 자유 함을 얻은 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하늘의 평안을 얻어요. 여러분들이 앞으로 신앙 생활할 때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신앙 생활하지 말고요, 문제가 문제 되지 않게 하시는 그 수치와 멸시와 조롱과 비천함 인간들의 모든 단어 가운데 가장 악하고 약하고 추한 단어의 상징인 그 십자가가 나를 창조한 죄로, 하나님이 겪으신 것을 그 눈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 죽음의 문제 그 문턱을 넘어서는 그런 자유 함이 우리 있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되시고요, 이 믿음이 없이 말로만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 지옥에서 확인 될 거에요.

 

비록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성경적으로 흠이 많을지라도 주님이 왜 그 고초 당했나, 주님의 고난의 눈으로 자신의 고난을 바라볼 수 있는 이런 신앙이 여러분들 속에 있기를 바래요. 우리 교회 신앙 생활 하는 분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님이 왜 당뇨 걸리고 혈압 걸리고, 왜 그런가, 우리를 위해서 할 때에 어떤 목사님보다 위대한 목사로 보입니다. 그 속에 여러분들이 행복이 있어요. 손만 갖다 대면은 병 낫는 능력 있는 목사 속에 여러분들의 행복이 있는 게 아니고,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줄이 꾀는 지식을 가지고 여러분들 속에 지식을 잡아넣는 목회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의 아픔에 해결할 수 없는 능력 때문에 아파하는 그것이 나를 위함인가도,

 

주님의 수치와 멸시와 조롱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아버지의 그 비천함이 자식을 위한 것임을 나를 위한 것임을 받아 드릴 때에 그 매 맞는 아버지가 어떠한 위대한 아버지보다도 위대하게 보이고, 그 아버지 때문에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없어지고, 행복한 삶, 그 삶 산 자가 영광의 주를 뵈옵는 최후 승리가 있는 그런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머리로는 알지만은 아프면 죽을까 봐 겁납니다. 가난하면은 굶어 죽을까 봐 겁납니다. 머리로는 알지만은 자녀가 공부를 못하면은 사람 구실 못할까 봐 겁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 한도로 홍해를 갈라서 자기의 백성을 구원해 주는 능력 있는 하나님을 쫓아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어디에 가면은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이런 사상 저런 사상 좇아 다니며 자녀를 위해서 매맞는 아버지가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워서 왜 나에게는 입만 벌리면은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는 그런 아버지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늘 보좌 권세 버리고 가장 비천하고 무력하고 누구도 믿고 싶지 않는 로마에 의해서 처절하게 십자가의 형틀에서 노예들이 받는 그 수치와 고난을 받으신 그 주님은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종교성을 고귀한 윤리적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도덕적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런 자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모든 사람이 별로 사람 취급 하지 않는 나에게 나타나셔서 그 주님이 어떤 신보다 위대한 신임을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은 주님만 있으면은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들이 이제는 내 속에 다 사라지게 되는 이런 자유의 삶, 그런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하늘의 평화를 맛보도록 주님 그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까, 오늘도 수료 식 하는 자들에게 강의의 지식이 남지 아니하고, 전도의 미련한 것이 남아서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 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오늘 이 헌금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몸 버려 세우신 교회를 세워져서 이제는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보증이 되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게하여 주시고, 오늘도 병석에 있는 자들에게 병 나으려고 이리저리 쫓아 다지니 아니하고, 예수님 때문에 그 병마에서 자유케 해주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더 부자가 되려고 이리저리 쫓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과 부함이 나에게 의미가 없는 지혜를 멸하는 십자가의 도가 되게하여 주셔서, 오늘 주어진 내 시간, 오늘 주어진 내 물질, 지금 이 시간에 내 생애가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에 사랑하는 신앙의 길동무들이 되고, 신앙의 동지가 되도록 어리석은 말씀이 받아 지도록 성령께서 은혜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 하심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이후에 주의 율례와 규례를 배웠노라. 고난 당함이 나에게 유익이라,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귀하다고 신앙의 고백을 하며 그 부끄러운 십자가에 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신보다 위대하고, 그 부끄러운 하나님의 낮아짐이 우리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들을 멸하게 하는 이 십자가의 도의 역설을 은혜로 받아 드린 믿음의 권속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