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권리와 의무
고린도전서 7: 1-6
2019년 1월 13일 주일 낮 예배
No. 401
1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4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아멘
○성경은 문자 주의가 문제다. 인간 관계에서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령은 상대방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한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말은 서로 상대방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 내가 말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다. 자기 의무를 생각하고, 타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
우리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진리가 성경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진리가 되고, 설교가 진리가 되려면은 첫째는 보편성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만 아멘이 되면 진리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아멘이 되어져야 됩니다. 또한 진리는 하나님의 나라 우리의 삶을 구원으로 이끄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성경 말씀에 설교 말씀에 순종을 하면은 내가 구원을 얻고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만이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열심히 산다는 사람이나 설교 말씀에 순종을 하는 사람들 보면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종교적인 열심으로 인하여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며 삶이 파괴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1. 성경 말씀은 진리인데 설교를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 고린도 교회는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바울파가 있다. 주로 게바파는 금욕주의 자들이다. 고린도교회의 금욕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히 진리를 따르면은 가정이 잘 세워져야 되는데 오히려 믿는 문제 때문에 가정이 파괴가 온다면은 그것은 진리를 잘못 이해한 겁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인데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설교를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요. 믿는 것을 문자적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정말 조심해야 되는 것이 문자주의 입니다. 왜곡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에는 그 말하는 의도라든지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도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만 받으면은 그 사람의 말에 왜곡이 일어나잖아요. 그것하고 똑 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사람이다 이러잖아요.
하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를 해서 오늘 본문도 이렇게 말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안 하는 것이 좋다. 원문을 직역 하면은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서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마다 아내를 두고, 또 아내는 남자를 둬라, 그리고 남자는 아내에 대해서 자기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의무를 다하라, 라고 말을 한다고, 그리고 남자는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않고, 아내가 하는 거다.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한다고요. 그러면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는 분방을 하는데 다시 합하라 이런 것인 줄 알아요.
여러분들이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아니하면은 그런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까, 그래서 남녀 칠세 부 동석 이라고 그러고, 또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의무를 다하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까, 이 말씀이 기도하기 위해서는 분방을 해도 된다는 그런 말씀인가, 바로 문자주의 입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선포될 때에는 이 말씀을 선포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 상황이 뭐냐 하면은 고린도 교회의 제가 말씀을 드린 대로 고린도 교회는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바울파가 있습니다. 주로 게바파는 금욕주의 자들입니다. 오늘 여기에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 라는 말은 게바파들이 평소에 하는 일들입니다 말들입니다.
이런 금욕주의 자들의 말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일단은 그 말을 받아 줍니다. 너희가 말하는 대로 남자는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것은 뭐냐 하면은 금욕주의 자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도 초창기에 이런 적극적 경건주의 자들이 참 많았어요, 사실은 소극적 경건주의인데, 예수를 믿으면은 부부 관계를 해서도 안 되고, 또 남학생 여학생들이 몰려다니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그래서 철저히 분리하는 이런 일들, 그리고 또 이런 말씀을 가지고 아내들이 또 종교적인 열심이 강한 사람은 날마다 기도원에 올라가면서 남편이 가정을 좀 돌봐 기도도 좋지만은 이러면은 성경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분방해도 좋다고 하지 안 했느냐고 하면서 싸움과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은 이 말씀이 고린도교회의 금욕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금욕적, 절제의 삶, 에피큐리안, 열광주의적 삶, 쾌락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규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를 잘 하려면은 사람의 인간 관계에는 항상 권리와 의무가 있다.
오늘 이런 내용에 대해서 먼저 뭐라는가 하면은 그 금욕주의 자들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 드리는 것은 그 말이 옳다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들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려고 하는 것은 내가 이해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의 유익된 측면도 있다, 라고 말을 해요. 그러면서도 그 뒤에 이제 결혼의 원칙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거든요. 이 결혼의 원칙을 이야기할 때에도 단순히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뭐냐 하면은 우리 인간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들이 철저히 금욕적이고 절제의 삶을 사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고요.
또 에피큐리안과 같이 자기 마음 대로하는 열광주의적 삶, 쾌락주의에 있는 것도 아니고요, 또 종교 생활이라는 것은 하라 하지 말라 하는 이런 금욕적인 것이나 종교적인 규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요. 지금 금욕주의나 이런 것들은 고린도 교회가 인간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잖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 너희 안이라는 것은 인간 관계 속에 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이유, 교회에 다녀야 하는 이유는 좋은 인간 관계를 통해서 천국을 경험하도록.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선교하고 전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 것을 알게 해서 분쟁하고 다툼하며 공멸해 가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전도하는 거에요. 말씀은 그런 것을 말씀을 전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좋은 인간 관계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보면은 부자가 천국인 줄 알고 모두다 부자 되려고 예수를 믿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또 좋은 인간 관계라는 것은 깡패들과 같이 의리가 있는 관계가 아니에요. 그건 깡패에요. 그리고 동호회와 같이 재미있는 인간 관계도 아니에요. 그리고 동창회와 같이 네 내 도리 하는 그런 인간 관계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은 오늘 이 말씀의 본래의 뜻을 알아야 되요.
교회 생활 하면서도 사람들이 참 오해를 많이 해요. 교회 생활하면은 그저 깡패와 같이 의리 지키는 것인 줄 알아, 동창회와 같이 네 내 돌이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인 줄 알아, 동호회와 같이 만나면 재이 있는 것일 줄 알아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것 가지고 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해요. 우리나라를 고치지 못해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좋은 인간 관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은 지금 무얼 말하는가 하면은 가장 인간 관계의 기초가 되는 것이 부부지간인데 이 부부지간을 통해서 인간 관계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말하는 거라고요. 그 인간 관계를 잘 하려면은 사람의 인간 관계에는 항상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3. 인간관계에 있어서 항상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의무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해서는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이 회개고 신앙의 출발이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권리와 의무가 있어요. 회사의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에도 권리와 의무가 있어요. 가정의 부모와 자식간에도 권리와 의무가 있어요. 부부지간에도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목사와 교인 사이에 권리와 의무가 있어요. 교인과 교인 사이에 권리와 의무가 있어요. 전부 관계의 파탄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은 이 권리와 의무를 잘 모르는 데에서부터, 잘 실행이 되지 않는 데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지금 노사의 문제라든지 많은 정치적인 갈등이라든지 교회의 갈등은 인간 사이에 서로간의 권리와 의무를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은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의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말은 빚을 다하라 이 말입니다. 내가 결혼을 하는 것은 남자는 아내에 대해서 빚지는 거에요.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빚을 지는 거에요. 그 빚이 의무라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의무를 다하라 이 말씀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또 남편은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아니하고 아내가 주장한다, 빚 갚는다 이런 말이거든요. 이런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항상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의무를 생각하라는 거에요. 상대방에 대해서는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를 보장하라는 거에요.
우리 사회가 지금 이게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을 잘 조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엉망진창이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살려면은 구원을 얻으려면은 여러분들이 누구를 만나든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의무를 생각할 때입니다.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해 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왜 교회에 왔어요, 교회 안 오면 하나님에게 혼난다고 아니에요. 이 말씀을 들으려고, 한번 여러분들 스스로 생각 해보세요, 나는 이 국가에서 언제나 권리를 주장하는 자인가, 의무를 주장하는 자인가, 내가 친구에 대해서 의무를 감당하려고 하는가, 친구에 대해서 내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는 자인가?
직장에서도 나는 권리를 주장하는 자인가, 의무를 주장하는 자인가, 우리 대부분은 권리를 주장해요 가만 있으면은,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은 아 내가 이제는 의무를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이게 회개고 이게 신앙의 출발이에요. 교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여러분들이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험이 드는 거에요. 나는 이 교회에서 어떤 의무를 감당하고 있는가, 그 권리를 보장 해 주려고 해야 되요. 여러분 케릭트 하고 진리의 본질하고는 달라요, 저를 여러분들이 보시면서 이것 아셔야 되요. 제가 목사로서 교인들하고 목회를 할 때에 이번에 우리 집 헌금이나, 겨자씨 헌금이나 연말부터 쭉 설교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목사로서의 의무와 교인들의 권리 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고민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요.
여러분들이 헌금은 의무잖아요, 교인들에게 목사로서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헌금해 이런다고, 그래야 복 받아, 장로가 되가, 집사가 되가, 헌금 안 해, 이것은 목사가 교인들에게 목사로서의 권리의 주장만하지, 교인들에게 의무를 강요하는 거에요. 목사의 의무는 뭔가, 교인들이 헌금한 것을 가지고 교인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까, 교인들의 권리를 보장 해줄까, 이 고민이에요. 제가 목사가 되어서 오늘날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제 모든 목회 철학의 기초는 그곳에 있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여러분들이 십일조 헌금 다하면은 그 의무잖아요. 우리 집 헌금 하면은 그 십일조를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풍요로운 문화적인 삶을 살도록.
4. 전부 상대방에 대해서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경영자가 경영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동자는 의무를 생각해야 되고, 경영자는 노동자의 권익과 권리를 보장 해 주려고 그 고민을 해야 된다. 성령은 우리에게 의무를 감당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9인승 뭐 스타렉스나 카니발도 해 놔 놓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면은 수련회 같은 데에도 안락하고 좋은데 가서 지내도록, 이런 것은 여러분들의 권리를 어떻게 하면은 보장 해줄까, 그것도 가난한 사람 모든 사람의 권리를, 누군가의 권리가 아니고요. 그러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우리 교회 다니면서 제가 십일조 헌금 안 하는 사람 뭐라 하지도 안 하고, 누가 십일조 하는가 안 하는가, 보지도 안 하고, 왜 의무를 강요하는 목사가 되기 싫거든요. 여러분들이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지만 이런 목사 대한민국에 몇 명 없어요. 여러분들 부부지간에도 보세요, 전부 상대방에 대해서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싸우는 거에요.
노사의 관계의 대립이 뭐에요, 회사의 경영은 경영 자에요. 그 경영자가 경영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동자는 의무를 생각해야 되고, 경영자는 노동자의 권익과 권리를 보장 해 주려고 그 고민을 하고, 이래야 된다고, 내가 이 회사의 일 했기 때문에 이만큼 받아야 되고, 권리 주장 하는 것, 경영자는 네가 한 게 뭐 있어, 내 돈 가지고 한 것인데, 이익 더 남겨야 되고, 이 충돌이에요. 정치적인 충돌도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은 이런 판단과 분별력이 생겨요. 내가 이 권력을 가지고, 우리가 집권해서 어떻게 하면은 야당 시절의 주장했든 그 의무를 잘 감당해서 모든 국민을 행복 하게할까, 이것 보지 못하면은 이 성경 헛것 본 거에요. 얼마나 많은 문자주의가 왜곡을 일으켜요. 그저 신앙 생활 열심히 하라는 것 해 가지고 기도원에 보따리 싸 덜고 가서 당신 사업 잘 되는 것 누구 때문인 줄 알아, 내가 맨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기 때문에 당신 사업 잘 되고, 당신 직장 승진하는 거요. 그것은 사기꾼인 부흥사들이 여러분들을 문자주의로 왜곡한 거에요. 그래서 남편이 인정 못하니까 또 믿음 있으면, 인정은 되지만은 성경이 말했잖아, 기도하기 위해서 분방을 하라고 했잖아.
장로가 되어서, 집사가 되어서, 그것도 이해 못해, 이런 말이 아니에요. 의무를 감당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사단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면은, 네 권리 주장하라는 거에요. 성령은 우리에게 의무를 감당하라는 거에요. 사단은 우리에게 상대방에게 의무를 요구하게 해요. 성령은 상대방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한다고, 얼마나 예민한 문제에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목사님에게 목사님의 의무를 강요하기 보다는 저는 여러분들에게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여러분들은 목사님의 권리를 보장하려고 자기 의무를 감당해야 되요. 무슨 일이 생기면은 아이구 우리 목사님 내가 얼마나 잘 못 모셔서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해야 되요.
5.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관계되는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권리와 의무가 적정하게 사용 되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공동체의 번영이 일어나도록. 고린도 교회가 그래도 교회로 유지될 수 있었든 것은 신학적 문제는 바울에게 편지 써서 물었다, 그래서 이것 가르쳐 준 것이다.
목사님은 뭐 하셨느냐고, 권리 주장이에요.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고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 경험해 가면서 살아야 되잖아요. 교회가 곳곳에 서서 이제 여,야가 서로 권리 주장하고 서로 상대방에게 의무를 강요해서 부딪치는 이 현상을 우리가 하나되게 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들 여기에 기업하시는 분이 있으면은 종업원들 교회에 모시고 오세요, 왜 복 받으려고 아니에요. 그래야 기독교 기업이라는 게 이런 거에요. 교회 와서 이 설교 들으면서 종업원들은 내가 이 회사에서 의무가 뭔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사장은 뭐 해야 되겠어요. 내가 이 종업원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보장 해줄까, 그것으로 뭉쳐야 도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데리고 와야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기에 직원이라면은 회사의 직원이라면은 사장님 모시고 오세요. 왜 모시고 와야 되는가, 그래야 그 사장님이 직원들에게 의무를 강요하지 않고,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하고, 자신의 의무를 감당하려고 해야 되요. 교인들은 안 그래요, 어디에 가면 이익이 되는가, 내 체면 세우는가, 왜 예수 믿어요, 좋은 내가 가는 곳마다 인간 관계에 아름다움이 일어나려면은 깡패의 의리도 아니고요, 동창회의 여러분 친밀도 아니고, 동호회 재미도 아니에요. 여기 교회 와서 여러분들이 관계되는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그 권리와 의무가 적정하게 사용 되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공동체의 번영이 일어나도록.
그런데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한가지 아셔야 되는 것이 거기에 보면은 1절에 보면 이렇게 말해요. 내가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은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다섯 번의 편지가 오갔어요. 고린도전서는 두 번째 편지에요. 첫 번째 편지에 고린도 교회가 금욕주의와 이 쾌락주의와 열광 주의 이런 여러 가지 신앙적 색깔의 차이로 파벌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런 관계에 있어서 오해가 많이 일어난 거에요. 금욕주의 자들은 여자를 만져서도 안 된다고 그러고, 쾌락주의 자들은 계모를 범하고도 구원받은 증거라고 하고, 전부 신학적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그럴 때에 바울에게 물어 보자 이랬든 거에요.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신학의 문제 신앙의 문제는 목사님에게 물어야 되요. 장로님이나 권사님에게 묻는 게 아니에요. 신학의 문제는 그래야 문제의 해결이 되어져요. 이 문제 많았든 고린도 교회가 그래도 교회로 유지될 수 있었든 것은 신학적 문제는 바울에게 편지 써서 물었거든요. 그래서 이것 가르쳐 준 거에요. 또 이런 것도 알지도 못하고, 교회의 모든 문제를 목사님에게 물어 봐요, 모든 문제가 아니에요, 신학의 무제, 설교의 문제는 저한테 물어 봐야 되요. 목사님 마리아 선교회하고 한나 선교회를 몇 세로 나눌까요, 그건 여러분들이 의론하면 돼, 그건 진리가 아니에요, 신학의 문제가 아니에요.
6. 허락이라는 말은 양보라는 말이다, 내가 양보한다 원칙에서. 예수님은 뭐라는 가 하면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라고 말을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 예외 규정이 있다, 이것 없으면은 종교 원리주의 자가 된다.
그런 것을 가지고 내가 60년 생 했다가 이제 55년생부터 하라고 이러면은 고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목사님이 내보고 또 저래 갈랐구나, 오해 생긴다고, 이해 되세요, 제가 대학 교회에 있을 때에 왜 관계가 어그러졌는데, 연세 드신 권사님들은 김치 담아 먹어야 된데, 젊은 여선교회는 우리는 집에 가정부 두고 있는데 교회 와서 김치 담을 거냐, 몇 푼 되도 안 하는데 사서 먹자, 한참 싸우더라고, 그러다가 그 문제를 내한테 가져왔어요, 그때 내가 그때도 관여 안 해야 되는데 조양규 장로님이 김치 공장 하는 사람에게 2백 만원 받을 것이 있는데 몇 년째 못 받는다 해서 아이구 잘 되었구나, 교회에서 2백 만원 거기 김치를 받고, 2백 만원 조장로님에게 주면 되겠구나 이랬더니만 연세 드신 분들이 목사님이 이제 우리 늙은 것들 눈에 안 들어오고, 젊은 것들 하고 놀려고 그래 가지고, 삐지더라고, ㅎ ㅎ ㅎ 아시겠어요.
신학의 문제 설교의 문제는 목사님에게 여러분들의 삶의 이런 문제는 진리가 아니잖아요 그런 것은, 가져왔을 때 순종해야 되요. 권리와 의무, 또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 다 5절을 같이 읽어 봅니다 시작 서로 분방 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을 얼마 동안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서로 상대방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6절 다같이 우리 크게 읽습니다 시작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목사님 이게 무슨 그렇게 진리 입니까, 굉장한 진리에요. 여기에 앞에서 서로 권리를 빼앗지 말라,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는 분방을 허락한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의 원칙으로 명령이라 보면은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대로 나 은혜 받고 당신 사업 잘 되라고 기도원 가는데 집구석은 이 모양으로 놔두고 기도원만 쫓아 다니고 이런 소리 하지마 성경에 있잖아 명령으로, 이런 것은 명령으로 받는 거에요. 이것은 명령이 아니고, 허락이에요, 허락이라는 말은 양보라는 말이에요. 내가 양보한다 원칙에서, 이런 말인데 가장 쉬운 예로 여러분들이 들으면은 결혼의 문제에서 이혼의 문제를 말하는 거에요. 신명기 24장에 보면은 이렇게 말해요. 서로가 결혼을 하는데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은 이혼 증서를 주고, 이혼을 해라, 내 쫓아라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탈무드 같은 데에는 수치스러운 일을 가지고 확대 해석해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은 여자가 밥을 하다가 밥을 태워도 이혼해도 된다. 여자가 큰 소리쳐도 이혼해도 된다. 이래 가지고 예수님 당시에 수치스러운 일을 가지고 확대 해석을 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이혼의 빌미로 삼은 거에요. 그럴 때 마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은 뭐라는 가 하면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라고 말을 해요.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모세가 말하기를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은 이혼 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내어 버리라고 이야기한 것은 명령이 아니고 양보다 허락이다 이런 말이에요. 부득이한 경우에 예외 규정이 있다. 이것 없으면은 종교 원리주의 자가 되어져요.
7. 모든 것에서 종교의 진리의 잣대, 규정을 가지고 갖다 대어 버린다. 하나님의 마음은 원칙을 주지만은 항상 예외적인 양보를 가져온다. 성령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가족과 같이 생각한다 성령의 지배함을 받으려면은 인간 관계에서 권리와 주장, 동기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러분들이 아 그렇지 인간관계는 상대방에게는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되고, 나는 의무를 생각해야 돼, 이제 이 하나의 원칙과 진리를 깨달았어요. 깨달아 가지고 이제 가서 살다 보면은 이 말씀이 생각나요, 서로 부부지간에 살다가 회사에서 또 무슨 일이 있으면은 이 문제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의무 생각하고 권리 내 권리를 좀 생각해, 이것은 원칙 주의 자에요. 여러분 요 말씀 잘 이해 해야 되요. 성경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데, 음행 한 연고, 같이 살면은 더 힘들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원칙을 양보하세요.
교회에 여러분들이 회교라든지 기독교 우리 한국에도 원리주의가 너무 많아요. 어쨌든 간에 주일 성수는 해야 돼, 그래서 몸이 아파도 휠체어 타고 병원 베드 타고 오면 야 역시 우리 장로는 틀려 우리 권사는 틀려, 뭐가 없는가 하면은 하나님이 양보하신 것이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 신앙 생활 하면서 참 편한 것은 제가 원칙은 있지만은 양보가 있거든요 또, 이 양보가 없으면은 뼈와 뼈끼리 부딪쳐요, 우리 사회가 이 양보가 없는 거에요. 예외 규정이 없는 거에요. 연골이 없는 거에요. 그저 모든 것에서 종교의 진리의 잣대, 규정을 가지고 갖다 대어 버려요. 하나님의 마음은 원칙을 주지만은 항상 예외적인 양보를 가져와요.
우리 교회에 여러분 이런 것 보세요, 오늘 요나단 선교회가 다음주에 눈썰매 간다, 그러면은 요나단 선교회만 가야 된다 라고 말을 하면은 원칙이에요. 저는 그래서 뭐라 했는가 하면은 요나단 선교회만 가냐, 그러면 다른 선교회 어린 아이들 데리고 있는 사람은, 목사님 그래서 생년월일을 안 넣은 겁니다. 요나단 선교회의 주관인데 나이가 어린 자녀를 둔 사람은 누구나 갈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거에요.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있는 일들이에요. 우리 교회에 목회하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변화가 있는 거에요 유연성이요. 여러분들이 양보고 허락이고 명령이 아니라는 이 말을 모르고 그저 종교적인 규례의 명령만을 강조하는 교회에 가면은 칼로 무 자르듯이 잘라요 모든
요나단 나이 때만 초등 학생이 있습니까, 마흔에 장가 가면은 그 위의 나이도 초등 학생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에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었는가, 그것은 교리고 신학이지요,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제가 삶으로 이야기 하잖아요. 성령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가족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가 여러분 이 세상에 많은 법이 존재하지만 남에게는 법의 잣대를 잘 갔다 대지만은 자식에게는 언제나 예외 규정을 두잖아요. 자기 자식이 나쁜 일을 앞장서도 부모는 친구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우리 얘가 그랬을 때는 무슨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행동을 가지고 판단을 하지만은 가족에게는 동기를 보거든요. 성령의 지배함을 받으려면은 인간 관계에서 권리와 주장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에 언제나 그 사람의 능력 그 동기를 보는 것이 중요한 거에요. 그것 하라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거에요.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 다니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정말 일에 동참하라고 내가 내 이야기 하는 거에요, 내 잘났다고 하는 게 아니고, 저도 굉장히 독선적이고 이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제가 유연 해지고, 이런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를 믿는 것을 입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든지 세례를 받았든지 교회 간 것으로 보지 않고 저는 뭔가 하면은 성령을 영접하는 것을 타인을 가족으로 여긴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8. 자기 의무를 생각하고, 타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해야 되고요.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손가락질하고 여당 야당 손가락질하는 것은 볼 때 아직 우리가 어리구나, 명령이 아니고 양보라고 보면은 뭔가 하면은 좀 기다려 보자, 어떻게 기다려야 되요, 말씀 보면서.
설교나 목회나 신앙 생활 30년 하니까 목회를 하면서도 교인의 권리를 먼저 생각해요. 목사로서의 의무를 먼저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까, 여러분 개인이 아니고 전체의 권리를. 이번에도 겨울 방학이 떡 되니까 저는 사실은 부교역자 시절에 담임으로부터 배려를 받은 것이 거의 없어요. 맨날 여기 입술은 터져 있었고요, 그런데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은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의 얘들이 어린데 겨울에는 공식적인 휴가가 없잖아요. 그래서 재정은 약하니까 휴가라도 주어야 되겠다, 부 교역자들이 왜 심방 안 해, 이것 안 해, 저 그런 소리 한마디도 안 해요. 그것은 자기 의무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할 것이고. 나는 담임으로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 해주는 것에 머리가 있지요.
그러니까 부 교역자 모아 놓고 뭐 안 해 뭐 안 해 안 하고, 방학이 되었는데 휴가를 보내 주어야 되겠다, 그래서 휴가를 다 내가 그랬어요 처음에, 교회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서 넉넉하지 못하면 여러분들 전부 다 편하게 해 주려고, 여러분들이 조금 희생을 하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휴가다, 일주일씩 다 휴가를 짜서 가져오너라 가져왔더라고, 그래 지난 주부터 가는데 또 내 마음에 그래도 차비라도 좀 보내어 주어야지 해서 또 봉투 넣어서 하나씩 준 거에요. 나도 치지는 마세요 박수칠 일이에요. 내가 이러듯이 여러분들도 장로는 장로로서 권사는 권사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자기 의무를 생각하고, 타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해야 되고요.
예수 믿는 정치가의 예수 믿든 기업인 예수 믿는 노조가 뭐 하는 건데요. 노조가 왜 필요한가, 우리 노조가 어떻게 하면은 이 회사의 의한 의무를 감당할까 이 고민으로 가득 차 있어야지 어떻게 하면은 내가 이 회사에서 권리를 보장할까, 전부 사탄적인 노조만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기업 망하고 나라 망하는 거에요. 이 문제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 교회 데리고 와야지 뭐 ㅎ ㅎ ㅎ 아니면 팟방이라도 듣게 해야지요, 데리고 오라는 것도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니까, 오늘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요 좋은 인간 관계 속에 있는 거에요. 그 좋은 인간 관계라는 것은 깡패와 같이 의리 지키는 것도 아니고요, 동창회와 같이 네 내 돌이 하고 친밀한 것도 아니고요, 동호회와 같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 관계에서 권리와 의무를 잘 사용하는 거에요.
그럴 때에도 여러분들에게 제가 말씀을 드리지만은 여기에 허락이요 명령이 아니라는 말은 이런 말이에요. 모두에게 이 원칙 갖다 부치면 안 되요. 어떤 사람은 이 설교 들어도 자기 의무보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럴 때에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그렇다 이러면은 명령으로 받은 사람이에요. 양보로 받으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은 신앙이 어리구나, 그가 목사라도 그가 장로라도 그가 권사라도, 의무보다는 권리를 주장하거든 신앙이 어리구나 하고 받아 드리세요. 가정에도 보세요, 어린 자녀일수록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생각 안 해요. 여러분들 중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자기 의무 가정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 의무보다 뭐에요, 권리만 노는 권리, 부모는 나에게 낳았기 때문에 메이커 옷 사주는 의무, 그러다가 커지면 뭐 하는가 하면은 내가 이 가정에 내 의무가 뭔가, 그때 가정이 든든히 서 가잖아요.
제가 얘들 키워 보니까 그러더라고, 어릴 때에는 자기 권리 주장만 해요. 그러니까 참 힘들어요 제가. 이제 다 커서 막내까지 직장 생활 다 하니까, 이제 자기 의무를 생각하더라고, 내가 걱정 해주면 아빠 이제 우리가 아빠 걱정 해야지 아빠가 우리를 걱정할 것 없어. 이번에도 어디 가는데 500불 가져왔더라고, 이해 되세요 여러분.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노사 관계나 모든 정치가 시끄러운 것은 민도 가 낮기 때문이에요 어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안 돼, 조샌징 이것은 일본 식민지가 우리 속에 잡어 넣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나라가 아직 어리구나, 참고 기다리세요, 서로 탓하기보다, 이 마음이 필요한 거지요.
9. 어디에서 누구하고 관계를 맺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하려고 관계를 가지고,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해 주려고 하는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는 것.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손가락질하고 여당 야당 손가락질하는 것은 볼 때 아직 우리가 어리구나, 명령이 아니고 양보라고 보면은 뭔가 하면은 좀 기다려 보자, 어떻게 기다려야 되요, 말씀 보면서, 우리 교회가 이젠 참 많이 성숙된 것 같아요. 참 여러분들 가운데 의무를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저는요 희망을 가지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저를 보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그 관점에서 한번 들어 보면 큰 은혜가 되어져요. 모르는 것 같아서 제가 내 이야기를 낯 부끄럽게 하는 거에요. 제가 교인들 모두를 행복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교회에 출석의 의무 헌금의 의무를 감당했기 때문에 그 권리를 내가 어떻게 보장해 줄까, 이게 목사의 의무에요.
그런데 목사가 되어 가지고, 목사의 권리 가르치는 권리가 있잖아요, 그 가르침의 권리를 가지고 의무를 요구해요. 집사가 되어 가지고 주일 성수해야지요, 집사가 되어 가지고 십일조도 안 해, 그게 무슨 집사야, 목사의 권리만 주장하는 겁니다. 제가 그 소리 12년 동안 입 밖에 한번도 낸 적이 없어요. 왜,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거든요, 못하는 그 사람도 내 가족으로 보거든요. 자식으로 보거든요, 언젠가는 하겠지, 오늘도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누구하고 관계를 맺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하려고 관계를 가지시고,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해 주려고 하는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시고, 그래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함께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복된 신앙 생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헌금 기도◈
우리 한민족은 국가에 대해서 의무만을 생각하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백성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은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헌금을 드리는 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이 나라의 정치가들과 경제인들 이 나라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백성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하고, 교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고 하고, 백성과 교인은 자신의 의무를 감당하려고 해서 나라의 번영과 교회의 번영을 통하여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안연히 거하였든 솔로몬 시대가 도래되는 진리만이 운행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교회가 세상 속에 한 집단이 아니라,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이 되는 한국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진리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드린 이 의무감으로 드린 이 예물을 교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에 잘 사용 될 수 있도록 주님 우리에게 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며, 분쟁과 다툼과 공멸의 세상 속에 의무를 생각하는 관계가 되도록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과 교회를 만드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창조한 자이기에 인간에게 자신의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고,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의무만을 생각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함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권리보다는 의무를 생각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아직 신앙이 어려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자에게나 성숙해서 의무감을 가지고 감으로 말미암아 그 짐이 무거워서 힘겨워 하는 자에게나, 함께 천국을 누려야 할 선물로 준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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