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상대적 진리
고린도전서 7: 29-31(12-16, 25-40절)
2019년 1월 3일 주일 낮 예배
No. 404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아멘
○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어지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있고, 그 경외의 마음이 있을 때 진짜 예배 자가 되는 것이다. 자유와 평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저주의 그 죽음이 나에게는 구원의 사건이었고,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제가 참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난 뒤에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이랄까요, 이 고린도전서 7장 이 말씀이 사실 저에게 굉장히 와 닿는 말씀이고, 또 이 말씀을 저는 참 진리이구나 하는 것을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마다 성경 구절을 좋아하는 것이 있지만은 저는 제 삶에서 언제나 이 말씀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 기억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잘 전달 되어져서 어떤 환경에서도 또 어떤 일에도 어떤 인간관계 때에도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 않는 물론 힘들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만은 그것 때문에 우리의 삶이 결정적으로 불행하지 않는 그런 구원의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1.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 그냥 피상적으로 읽으면은 결혼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쩌면은 교회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 마음 속에 일어나는 많은 생각들은 내가 주 안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실은 지금 12절부터 7장에 40절까지 오늘 대충하려고 했는데, 또 명절이고 또 굉장히 여러분들이 보면은 간단한 문제 같지만 중요한 문제들이 거기에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 그냥 피상적으로 읽으면은 결혼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 믿고. 고린도 교회에는 상당히 많은 세상적 가치가 또 잘못된 유대교적 가치가 사람들의 생각을 많이 오염 시켰거든요. 구체적으로 다음주부터 말씀을 드리겠지만은 그래서 결혼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런 문제들, 또 그리고 불신 결혼을 해야 되느냐,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불신 결혼을 했는데 한쪽만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이런 부부 관계를 유지해야 되느냐 이런 것들이 각자의 생각으로 많이 시끄럽고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서 바울이 그냥 그런 상황에 대한 규례와 규정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해서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Touch 하고 있다고요. 여러분들이 사실은 어떤 상황 속에서 행복하다, 불행하다, 또 인간 관계에서 힘이 든다 어렵다 이런 것들은, 왜 그런가 하면은요,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환경이나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여러분들이 그런 남 탓, 환경 탓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절대적인 진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구나,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되요.
그 깨달음을 어떻게 가지는가, 오늘 말씀을 들으면 되어져요. 이 말씀이 여러분들 속에 기억나면 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은 교회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나 여러분들 마음 속에 일어나는 많은 생각들은 내가 주 안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주간 그래 살다가,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 우리가 신앙의 본질적으로 들어와서, 또 새 힘을 얻어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설 명절인데 여러분들 이 설에 가족끼리 만날 때에도 상황이 다 다르잖아요. 어릴 때에는 뭐 그냥 부대끼며 살다가 각자의 삶이 있는데, 만나 보면은 참 그리움 어릴 때 생각으로 그리움에 만났지만, 만나고 나면은 그 내가 고생해서 왔든 그 발걸음이 오히려 더 후회가 되는 만남들이 참 많거든요.
왜냐하면은 이제 수십 년 동안 각자 다른 삶을 살았다고요. 옛날 어릴 때의 그 형, 어릴 때의 그 누나가 아니거든요. 여러분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설이 되어지면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데, 그 효도가 용돈 드리고 이러는 것인 줄 알아요. 효도는 부모님을 제대로 알 때 일어나는 마음이라고 저는 봐요.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어지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있고, 그 경외의 마음이 있을 때 진짜 예배 자가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어지면은 우리를 얽어 매고 있는 많은 환경 상황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되어져요.
2. 하나님의 그 본질, 또 부모님의 진짜로 나를 낳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부모님과 형제나 모든 만남이 행복한 만남이 된다, 하나님 만나고 나면은. 일시적인 가치, 상대적인 가치에 상대화가 일어난다, 그게 구원의 시작이다,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그곳에 있다.
그러면 그 상황에 매이지 않는 행복이 내 속에 있거든요. 여러분들은 왜 예수를 믿는지 몰라도 저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고, 신앙 생활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들, 뭐 아무리 찬양을 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만남이 없는 사람은 진짜 경외 안 해요. 늘 입술에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어요. 가정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아는 것 그것은 인식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거지요. 진짜로 내 부모를 알게 되어지면은 공경의 마음이 생겨요.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불평이 나오고, 목사님에 대한 뭐 원망이나 불평은 목사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래요.
그저 김종웅 목사를 인식의 분별만 하는 것으로 아는 거라 생각해요. 속마음을 알게 되면은 틀려요 여러분. 오늘도 이 명절을 맞이하면서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그 본질 또 부모님의 그 진짜로 나를 낳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부모님과 만남이 있어야만이 형제나 모든 만남이 행복한 만남이 된다, 저는 그런 행복이 있기를 바래요. 고린도전서에서 이 사람들이 결혼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결혼 안 한 사함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혼해야 되느냐, 이혼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지금 여기 보면은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 없는 자같이 하며, 이럴 때에 이제 뭐 예수님 곧 재림하는데 언제까지 아내하고 가정 생활해 이런 말이 아니에요.
내 아내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고, 불행하다, 하는 그런 것에서 넘어 선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고, 예수님 재림하면 천국 올 것인데 뭐 그런 것 가지고 슬퍼해 이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 만나면은 희로애락에서 넘어 서게 되어져요. 그리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하며,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보실 때, 뭔가 좀 좋을 때에는 막 이랬다가, 좀 또 그러면은 그냥 떨어지는 사람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그것을 볼 때에 어떻게 감정의 기복이 저래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자기 중심적인 거요, 내 마음에 좀 들면은 뭐 세상 다 가진 것 같이 기뻐했다가, 조금 이러면은 또 뭐 그냥 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봐야 되요.
내가 진짜 하나님 만났는가? 그 다음에 거기에 보면은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예수님 재림하게 되면 그런 것 쓸모 없다는 게 아니에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나에게 그렇게 크게 있는 거나 없는 거나 내 마음에 요동이 잘 안 일어나는 거에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라, 금욕주의적인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만나고 나면은요, 일시적인 가치, 상대적인 가치에 상대화가 일어나요. 그게 구원의 시작이에요.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그곳에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 교회에 이래 다니는 사람 보면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세상의 가치를 절대화하거든요.
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인데 그 경외라는 것은 범접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인다, 십자가는 그 하나님을 보여 준 것이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범접할 수 없는 부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 공경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세상사는 사람들보다 그저 뭐 우리가 뭐 만났을 때에 사람들에게요, 저 사람은 좀 나하고 다르네, 이런 게 있어야 되요. 차원이 다르네. 죄송한 이야기지만은요, 제 친구 목사들이 저에게 세상의 바쁘거나 세상의 급한 게 없는 것 같데요, 그 사람들 말이에요. 또 너는 어쩌면은 큰 교회 목사 앞에서나, 작은 교회 목사 앞에서나 어떻게 그렇게 똑 같이 대할 수 있느냐, 수준이 달라야지요. 목사가 되어 가지고 여기에 뭐 우리 교회 대통령 왔니, 뭐 전부 하나님 못 만났기 때문이라고요. 뭐 우리 교회 장로님은 뭐 이렇게 해서 복을, 하나님 만나면은 그런 게 별 것 아니게 느껴져요.
그 자유와 평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주안에서 주안에서 라고 말을 해요. 왜 이런 것을 20년 30년 믿어도 모르는가, 설교를 안 듣고, 성경을 안 보고, 자기 생각으로 믿어서 그래요.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재단하고 성경을 재단하기 때문이에요. 오늘부터 다 내 생각 내려놓고, 여러분 성경이나 설교를 한번 들어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인데 그 경외라는 것은요, 뭐 사전 찾아서 아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범접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서 생기는 감정이에요.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부모를 앞에서 느끼는 감정만이 공경이지요.
그런 공경은 우리 엄마는 나를 이래 해 주어서 좋아, 이런 것은 공경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셔서 감사 그런 게 경외 아니에요. 내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 대상 앞에서는 거에요. 십자가는 그 하나님을 보여 준 거에요. 그래서 작년 한 해에 제가 한 이야기기 그 이야기 했어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이는 거에요.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패한 독립 운동가의 죽음이고, 유대교로는 저주의 죽음인데, 인간이 실패한 독립운동 인간적인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저주의 그 죽음이 나에게는 구원의 사건이었거든요. 하나님의 능력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정말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든 그 하나님을 보면서 그 시각으로 성경을 보면은요, 성경이 완전히 달라져요 완전히. 여러분들 속에 좀 그런 것이 있기를 바래요. 가정에도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나, 나는 왜 이런 부모 만나서 이러느냐, 전부 자기를 존재하게 한 부모를 만나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 수준에서 부모를 생각해서 그래요. 여러분들이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거든 내 수준에서 하나님과 부모를 생각하고 있구나, 이러면 되요. 그러다가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자기가 부모가 되어 보면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 알면서 행복해 지잖아요. 인정하는 게 좋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불평은 목사를 몰라서 그래요. 자기 수준에서 목사를 생각해서 그래요 내가 제일 힘든 게 그거에요. 무슨 소리하면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는 거에요 나를. 그래서 속으로 그래요, 너도 목사 되어 봐 그때 알게 돼. 그것은 부모나 하나님이나 목사님을 위해서나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해서에요. 이 명절 맞이하면서 여러분들이 고향에 가서 물리적으로 부모의 얼굴을 보는 것 보다도 나를 존재 하게한 내가 도저히 이해 되지 못하는 그 부모의 여러 행위들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 때, 그것을 받아 드릴 때, 비로서 행복의 시작이 되어져요.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행복 하려면은 여러분들 수준에 이해되지 않는 목사님을 받아 드릴 때 우리 교회의 신앙 생활은 행복의 시작이 비로서 되어져요.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3부 예배 때는 장전도사가 옛날 박상훈이 나오는 장애인 할 때 그 영상 찾아서 해 줘. 우리 송명희 시인 있잖아요. 중증 장애인이에요.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해요. 그런데 그는 참 행복해 하거든요, 그 나 라는 찬양 보세요, 나 가진 재물 없어도 나 남이 가지고 있는 건강 있지 못해도, 그러면서 어떤 하나님이라 하는 줄 아세요? 공평하신 하나님이래요. 여러분 송명희 이 마음을 이해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진 재물도 없고, 남들이 있는 건강도 없는데 공평하신 하나님이래. 이게 어떻게 내 생각으로 이해가 되어져요. 범접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인정해야만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공평하신 하나님, 그러니까 원망하고 불평해야 할 그 삶 속에서도 찬양이 나오는 거에요.
저는 우리 교회에 영적인 수준이 그래 올라가기를 바래요. 신앙 생활에 원망이 나오거든 내 수준으로 하나님 생각한다 생각 하시고요, 가정에서 원망이 나오거든 내 수준에서 부모님 생각한다 생각 하시고요, 교회에서 원망하고 불평하거든 여러분들 그런 사람 어찌 말려요. 옆에 있는 사람이 속으로 그래야 되요. 자기 수준에서 목사님 생각하는 것이구나, ㅎ ㅎ 왜 이래야 되는가,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나를 얽어 매는 많은 것들에서 자유 함이 있어요. 이 말씀을 받아 드려서 여러분들이 내일 모래 부모님 만나는 그런 명절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바울이 유대교가 만들어 낸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을 창조한 여호와를 만나고 나니까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며, 우리를 불행하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고, 화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우리의 삶의 환경에 매이지 않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쇠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더 뚜렷해 지는 그러한 은혜의 삶을 사는 자같이 오늘도 주님 없으면은 조그마한 일에 울고, 조그마한 일에 천하를 얻은 것같이 날뛰고 조그마한 일에 분노하고, 조그마한 일에 슬퍼하며 살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그 모든 것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계시해 주셨고, 지식 있는 자에게 만나 주지 아니하고, 택정한 자에게 만나 주심을 감사해서 오늘도 주님 전에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안 했습니다. 드리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을 받아 주시고, 설 명절을 맞이해서 부모와 형제를 만날 때 얼굴의 인식만 하는 그런 만남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공경의 마음이 생겨서 세상 어디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안식을 부모 품에서 살아 있는 부모나 돌아가신 부모나 그 어떤 부모들이든지 그 품에서 누리는 복된 명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먼 거리 오고 갈 때 피곤치 않게 하시고, 상대방의 실수로 큰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고, 급한 소식이 없이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머리털까지 세심바 되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이 명절에도 병원에서나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도 그 하나님 때문에 그 모든 것에서 자유 하게 되는 복된 명절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 지명하여 불러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유대교가 만든 하나님을 믿으면서 서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불평하는 유대인에게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너희를 창조한 여호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그 하나님만이 참된 여호와이심을 목도하도록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창조자이기에 장애인이나 건강한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에게 공평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서 인간의 시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 교통 위로하심이 오늘도 자기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자기 수준에서 부모님을 이해하지 아니하고, 범접할 수 없는 그분 앞에 경외와 공경의 마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평강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세상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하는 천국을 맛보도록 선물로 주신 교회 위에, 성도들의 각 가정 위에, 이들의 생애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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