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김종웅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IV
마태복음 6: 25-30
2019년 12월 15일 주일 낮 예배
No. 447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아멘
● 삶의 비전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과 같은 삶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주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된 것을 인식하게 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 들풀에 깃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지고 가는 삶,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은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다. 새가 창고에 곡식을 모아 드리지도 아니해도 먹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새보다 귀한 너희를 그러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염려하느냐, 그 다음에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입은 옷이 이 꽃 하나만 못한데 오늘 피었다가 져 버리고 내일 아궁이에 던져 질 저 들풀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름답게 귀하게 입히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런 하나님을 믿고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씀입니다.
1. 인문학이라는 것은 일어난 현상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정확하다. 그런데 그 분석에 대한 대안은 없다. 인문학은 불균등이 표면적인 원인만 알았지, 근본적인 원인은 성경, 진리인 성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렇게만 생각하면은 하나님이 참 무책임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책임질 거야, 라고 그렇게 사는 Que Sera Sera 의 삶이 아니에요. 왜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면은 주기도문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요. 우리의 모든 삶의 비전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과 같은 삶을 살아야 되요. 그러면 이 주기도문이 왜 우리에게 필요하고 이런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왜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가 이런 것은 그저 우리가 성경만 보면은 종교적인 원리주의자 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돼 하면서 우리가 먹고 사는 일보다 교회일 신앙 생활 잘해야 돼, 그러면 하나님이 복 주셔 이런다고요.
주기도문의 그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은 이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서 우리의 삶이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그런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문제가 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도 나오지만은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나 좋은 인문학 서적에도 많이 나와요. 그래서 좀 목사님들이 성경도 읽고 인문학 서적도 좀 읽어서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종교만이 아니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교회 교인들에게 제시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 제가 좀 쉬려고 몇 분의 목사님과 필립핀 갔고 또 우리 송병민 장로를 만나야 될 일이 있어 가면서 제가 책을 하나 들고 갔는데 재레드다이야몬드의 총,균,쇠 라는 책입니다.
1998년도 퓰리처상을 받은 그런 서적인데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은 각 대륙별로 왜 이런 불균등이 생겼느냐 하는 겁니다. 아프리카는 왜 가난하고, 백인에게 지배를 받고, 억압을 당하고, 왜 유럽은 이렇게 오늘날 세상에 복지국가로서 이렇게 되고, 아메리카는 왜 이렇게 되었으며,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이 왜 그런 침략자들에 의해서 침탈을 당하는 이런 불균등이 생겨났는가 하는 겁니다. 그럴 때에도 여러분들이 한가지 아셔야 되는 것은 인문학이라는 것은 일어난 현상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정확합니다. 그런데 그 분석에 대한 대안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이 인문학을 통해서 세상의 분석을 이해하고 성경을 통해서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됩니다.
그런 인문학은 그런 불균등이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원인만 알았지요 근본적인 원인을 잘 제시하지 못합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성경, 진리인 성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목사님들은 그저 성경 몇 번 읽고 기도 해 가지고 신학 가는 게 아니고요 예전에는,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그 위에 인문과학, 그 위에 철학, 그리고 신학이 최고의 학문에 있었다고요. 그 모든 것이 왜냐하면은 이 현상을 제대로 알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대한 비전이 우리 속에 있어야 되는 것은 이 세상이 너무나 불균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불균등한 세상을 공평하게 하자고 이야기 해 버리면은 공산당이 되는 겁니다. 사회주의가 되는 겁니다.
2. 수렵채취라는 것은 한날 먹을 것을 그저 나가서 따먹는데 인간이 농경 생활을 시작한다. 정착민이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가축을 기르고 야생 동물을 식용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양식이 풍족 해지는 문명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닙니다.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 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잘 이해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는 제가 당신 청원 세 가지를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우리 청원 세 가지인데 그 부분이 뭐냐 하면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것이 첫 번째 우리 청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이야기를 잘못하면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하니까 오늘 하루 분의 양식만을 구하며 살라는 줄 알아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분의 양식이 아니고, 우리 모든 인류가 한날의 필요한 것들을 주시라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러한 삶을 우리가 추구하라는 겁니다.
그러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성경은 존재하는 거에요.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40년의 광야의 삶을 살게 했든 거에요. 왜 40년의 광야의 삶을 살았는가 하면은 그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 말씀과 같이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그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그래야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불균등한 이스라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 알지 못하고 성경을 무조건 믿어 버리면은 믿는 자에게만 복 주는 하나님만 이야기 해 버리면은 기독교는 우상숭배 종교가 되어 버립니다. 40년의 광야 생활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했는가 하면은 매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 만나를 거두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거두어서 먹었습니다.
한날의 양식보다 더 많은 만나를 거두었을 때 그 다음에는 벌레가 나서 먹지 못하는 만나가 된 겁니다. 왜 이런 경험을 했는가, 나그네 인생 40년 지나고 난 뒤에 정착민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러분 그 총,균,쇠에도 보면은 원래 인류는 수렵채취의 인종이 농경 사회로 어떻게 발전 해 가는가도 나타났는데, 오늘날까지 수렵채취의 민족이 종족이 이 지상에 존재합니다. 여러분 수렵채취라는 것은 한날 먹을 것을 그저 나가서 따먹는데 인간이 농경 생활을 시작합니다. 정착민이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가축을 기르고 야생동물을 식용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양식이 풍족 해지는 문명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문명 속에서 불균등이 생겨나는 거지요. 그래서 신명기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그런 말씀해요. 너희가 40년의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 너희가 길쌈을 하지 안 했지만 입히시는 하나님이고, 한 톨의 양식을 심은 적이 없지만 40년 동안 배가 주리지 아니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믿어라. 왜 그래야 되는가, 그래야만이 있다고 힘주고, 없다고 기죽는 그런 이스라엘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누구에게나 평균케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삶이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지 이런 삶을 추구하게 되는가,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데 오늘 있다가 아궁이에 던져 질 저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을 탐욕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3. 왜 우리 한국 교회가 이런 불균등이 심화 [深化] 되어졌느냐, 불균등한 사회 속에 빛이 되지 못하는가, 자기의 수고의 정당한 대가를 먹고 살도록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왜 우리 한국 교회가 이런 불균등이 심화 [深化] 되어졌느냐, 어떤 교회는 재정이 남아돌고 어떤 교회는 가난하고, 교회가 또 왜 이 불균등한 사회 속에 빛이 되지 못하는가, 탐욕의 하나님을 목사님들이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만 빌면은 종교 생활만 잘하면은 네가 원하는 것 다 주는 하나님, 이것은 목사님이 만들어 낸 신이에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한날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말씀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가, 우리는 범죄한 세상 속에 살아갈 때에 결핍의 세상 속에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문화적 사명 중에 하나가 뭐라는 가 하면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리라.
여러분 일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에요. 불로소득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신 거에요.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가 투자 한만큼 거둬 드리지 아니하고 내가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때 내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것을 인식해야 되요. 이 하나님을 잘못 알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 생활만 열심히 하고, 빨리 예수님이 재림해 가지고 일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되기를 바라며 재림 신앙이 만연한 그들에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마라 이랬어요. 여러분 말로만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무의 도식 자로 만들기 위한 것도 마음대로 살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수고의 정당한 대가를 먹고 살도록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거에요.
그래서 불균등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Messiah 시대를 도래하는 이사야는 그렇게 말합니다. Messiah 가 오면은 네가 건축한 집에서 타인이 살지 않게 되리라. 네가 심은 곡식을 타인이 먹지 않고 네가 먹게 되리라.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들이 삶이 참 힘든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노력한 것을 타인이 가져가기 때문이지요, 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없고, 자기가 원하는 죄인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염려하지 말라, 누가 염려한다고 네 키를 한자나 더하겠느냐, 라고 그냥 내버려둔 것이 아니라, 염려하지 않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구원사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전부 종교적으로 해석을 하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내 죄를 위하여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으면 무조건 천국 가는 티켓을 얻는 것인 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실존입니다. 이런 것 알지 못하니까 성령 받으면은 은사 받고 성령 받으면 신비한 종교적인 체험하고 능력 받는 줄 알아요. 그것은 무당 신앙 이에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고, 구체적인 우리의 삶을 말씀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심으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우리 아버지가 되게 하신 거에요. 이 사실을 받아 드리는 것이 예수 믿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게 하신 것만 하고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훌쩍 떠난 분이 아니에요,
4.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 믿는 이 신앙을 고백하게 해서, 성령은 뭐 하는 가 하면은 우리 모두가 영원한 가족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떠나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 믿는 이 신앙을 고백하게 해서 성령은 뭐 하는 가 하면은 우리 모두가 영원한 가족의 공동체를 만드는 겁니다. 혈연이 여러분들의 육신적인 인간의 관계를 만들듯이 성령은 오셔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가족이 되게 한 거에요.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이 하나님을 믿어야만이 교회가 올바른 영적인 가족의 공동체가 되고, 올바른 영적인 가족의 공동체가 될 때에 염려하지 않고, 불균등한 세상 속에서 모든 사람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사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에 기초해서 목회를 하면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 우리 당회는 저와 장로님들은 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가, 내 혼자 생각인지, 장로님 들 생각도 동일한지 몰라도 저는 그래요, 당회를 할 때 다른 것 다 용납해도 이것 하나는 양보 안 합니다.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교인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교인들의 안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교회 더 커지면 뭐해요, 교회 재정 많아 지면 뭐해요, 교회 재정 가지고 아프리카에 선교사 보내면 뭐해요, 여러분들의 삶의 안위가 없다면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성령을 왜 보내어 주셨는가, 왜 이 불균등한 세상 속에서 균등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가를 알지 못하고, 그저 자기 식으로 모든 것을 끼어 맞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좀 더 자부심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다른 교회 없는 게 우리 교회 너무나 많잖아요, 광고 때도 말씀 드렸지만, 이제 목회 이게 마지막에 우리 장로님들도 페밀리카 해서 교회에 헌신해서 모든 성도들 누구나 5인 이상 가족이나 두 가족이 어디 갈 때에 교회에서 쎄컨드리 차 페밀리 차 사용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나라 경제에도 이익이 되고, 환경에도 이익이 되고, 여러분들의 삶에도 개인적으로 윤택하잖아요. 여러분 이 이야기하면 다른 교회 목사님들 깜짝 놀래요. 어떻게 그런 생각 했느냐고, 누구나 그런 생각 할 수 있어야 되요. 오늘도 여러분 제가 우리 송장로님 만나서 그랬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같이 여기에 개척 Member 들 있지만 집에 찾아가서 나하고 같이하자, 딱 한번 손병민 장로 집에 찾아 갔습니다. 10년째 필립핀에서 고생하는 이야기 듣고 제가 10년 우리 교회 안 나오지만은 파송 장로라고 해 놨어요. 이제 교회가 세워 지고 장로님도 나이가 들어가니까 교회 여기 와서 노후를 보내세요, 그게 교회에요. 그게 염려하지 않는 거지요. 오늘도 여러분 참 저는 볼 때 한국 교회 종교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저는 목사 아들로서 목사 안 되려고 했다가 내가 신학교 가서 성경을 읽어 보고 내가 보니까 다르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르고 교회가 달랐든 거에요. 상처도 저 많습니다. 제 처가 쪽에 친척 중에는요 여러분 예전에 60년대 70년대 한국에 제일 큰 돌로 예배당 지어서 멋지게 봉헌한 교회가 대구에 있는 서현교회에요.
그 정장로님이 제 장인의 이모부인가 그래요. 자기가 거의 돈 다 내어서 교회당 지어서 했어요. 그의 동서가 김종필씨라고요, 정치인 말고요, 기업인인데 60-70년대에 교육관을요 10층 지은 것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건물 지어서 교회에 헌납했습니다, 자기 돈으로 교회 재정 가지고 말고, 그런데 부도가 나니까 그 교회 못 다녀요, 교인들이 장로님 교회 돈 빼내 가져간다는 거에요. 그래서 대전에 와서 노년을 보내다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이 교회가 뭔가 하는 거에요, 제가 보는 교회는 그런 교회에요. 하나님께서는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는 그 하나님은 아무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무책임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교인이 어려우면은 와서 기도해 주고 하나님이 책임질 거야 이런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주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된 것을 인식하게 한 거에요.
왜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종교 기관으로 전락된 유대교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해 놔 놓고 이것은 여러분들의 믿음과 상관없는 역사 적인 사실인데 아버지 노릇 해 주신다 라고 한 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면서 성령을 보내어 준다고 하고 그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만드신 거에요. 그 교회를 만드셔서 그 교회 성령은 바울이 나중에 깨닫잖아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하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게 한 것은 깨닫게 하는 것은 교회의 역할이니라. 여러분들이 가족의 좋은 것이 뭡니까, 총,균,쇠에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문명이라는 것은요 인간이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문명이에요. 그래서 이런 문명은 거기 그래 놨더라고, 의료 혜택으로 인한 것과 살해 위험을 감소해 가지고 인간의 수명이 장수 한데요. 우리나라도 문명이 발달하면서 의료 혜택과 살해의 위험이 적으면서 1960년대 우리 교회에도 한번 오셨지요, 통계청장을 지내고, UNICEF 사무총장을 지낸 오종남 박사가 우리나라 연금 제도는 우리나라 수명이 40세 때 채택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지금은 80세잖아요. 여러분 이런 우리가 이런 불균등 이 문명의 혜택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 뭐라는가 하면은 다이아몬드 박사는 또 다른 그림자가 있다고 그래요.
야고보서에 이미 말하잖아요. 이 세상에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있다.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좋은 것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거에요. 이 밝은 면 뒷면에는 어두운 거에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그래요 문명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 이 문명의 이면에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이분이 분석을 그래 놨더라고, 가족 관계로 인한 안위와 평강은 없어진다. 저는 그 글을 읽을 때에 머리에 번개가 치더라고, 예수님이 이미 2천년 전에 만들어 놨는데, 목사들이 이것 알지 못하고, 그저 기독교 세력에 확장이나 종교적인 과업 성취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아닌가, 왜 인문학은 안 읽고 성경만 읽어서 그래요, 그래서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는 거에요.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선포하는 이 복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어서 우리가 가족이 되게 한 것은 그 문명의 아름다운 것, 의료 혜택과 살해의 위험 사회적인 제도의 질서의 확립으로 인하여 우리의 수명이 길어 지는데 그 길어 지는 이면에 있는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 단절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가족을 문명이 발달할수록 소득이 늘어날수록 가족은 해체 되잖아요. 그 해체되는 어두움을 주님은 2천년 전에 이미 만들어 놨는데, 그것을 받아 드리는 것이 복음이고 예수 믿는 것에 출발이고 구원의 출발인데, 그것 안 하거든요. 제가 여러분 교회의 존재는 교인의 행복이라는 것은 내 말이 아니에요 성령 받으면 그렇게 되어져요.
5. 국가가 왜 존재하는가, 국민의 행복과 안위이다.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이곳에 있다. 교회가 교회 다와 지는 것은 교인의 안위와 행복이다. 네가 짖지 아니한 집에 거하고, 네가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먹게 될 때 내 손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두려워하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이 모든 사람들은 국가가 왜 존재하는가, 국민의 행복과 안위에요.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이곳에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다와 지는 것은 교인의 안위와 행복입니다. 그러면 오늘날까지 13년 동안 저는 그렇게 목회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목회3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이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가 하면 이 하나님을 믿어야만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11조 떼먹습니까, 하나님 못 믿으니까, 얘들 용돈 주는 것보다 더 적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왜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을 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못 믿는가, 교회를 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후 불신이 오늘 이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 있어요. 그래서 신명기는 이런 말씀해요. 네가 짖지 아니한 집에 거하고, 네가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먹게 될 때 내 손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두려워하라.
오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삶의 여건은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이 신앙의 고백 때문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재물 얻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인 것을 알아서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나누며 살게 되는 거에요. 이게 복음 안에 있는 삶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교인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아서 최소한의 의무, 목회를 하면서도 제가 11조를 강조 못하는 것이요 구약시대에는 국가가 곧 교회였어요. 오늘날은 국가에 여러분들이 세금 내고 교회에 헌금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해는 하면서도 이제 좀더 성숙해서 13년 동안 이런 교회의 모습을 발버둥 치는 목사의 모습을 봤으니까 한번 해 보자는 거지요.
6.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있기 때문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 나눌 수 있는 빚진 마음 은혜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게 주기도문이다. 그게 신앙의 출발이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 이런 것은요 소유권 드리라는 것 아니에요. 그래 버리면은 재림 신앙이 이루어지는 신앙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이단 신앙이 되는 거에요. 소유는 여러분들이 하세요, 관리권만 내 놓으라는 거에요, 돈 있는 사람은 집 한 채 더 자기 이름으로 사세요. 그 대신에 사용은 교회에서 하게하세요.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대명콘도 무슨 콘도 사세요 관리권은 교회에 주세요, 이것이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에요. 누가 이런 삶을 살수 있는가, 내 능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재물 얻는 능력을 주셨다는 거에요. 여기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재레드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 보면은 왜 대륙 변에 균등이 일어났는가, 그 불균등이 일어난 것 중에 무기 총, 균 병균, 쇠 철기 문화, 이것이 불균등을 만들어 냈다는 거에요. 유럽이 아프리카를 지배할 수 있었든 것은 아프리카가 훨씬 더 발전된 문명 사회였는데, 유럽은 중세까지 유럽은 암흑의 땅이었다고요, 아시아가 훨씬 더 잘 살았어요. 그러다가 왜 이것이 역전 되었는가 이런 것들이 거기에 있어요. 유럽의 문제는 분열의 문제이고, 중국의 문제는 중국이 왜 뒤에 했는가 하면은 황제의 문제라는 거에요. 중앙집권통치의 문제 분열의 문제 그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이 성경이에요. 교회는 목사님이 일인 독재가 되어서도 안 되고, 교회는 모든 교인들에게 평등하게 가서도 안 되요. 하나님 안에서 중요한 균형이 필요해요.
그 불균등에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성경을 제가 어릴 때만해도 얼마나 왜곡된 백인 우월주의 성경을 배웠는지 몰라요. 백인 우월주의[優越主意] 성경 해석이 이런 거에요. 노아의 아들은 샘과 함과 야벳이 있다. 함은 노예 흑인의 후손이고,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고, 샘은 황인종의 조상이다. 함이 노아 아버지를 수치를 드러내다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그는 영원히 야벳의 노예가 되어야 됐다. 그래서 흑인이 노예가 되는 것은, 성경에 이미 예정된 당연한 것이다. 얼마나 성경을 왜곡했는지 몰라요. 현실은요 인도는 얼굴 색갈이 검어도 야벳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굴이 희도 샘족 입니다.
불균등한 사회 속에 다이아몬드가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거에요. 흑인이나 백인이나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환경이다. 왜 유럽이 아프리카 유럽이 지배할 수 있었는가 유럽 사람은 아프리카의 풍토병에 강하다는 거에요. 흑인들은 유럽에 풍토병에 약해서 흑인이 유럽에 오면 몰살당한다는 거에요. 그런 환경이 오늘날 이런 불균등을 만들어 냈다는 거에요. 여러분 오늘날 왜 우리가 이 불균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 하면은 사람의 능력이 다르다고 각자 생각하는 거에요 천만에요.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만 하면은 인문학이 되겠지요.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있기 때문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 나눌 수 있는 빚진 마음 은혜의 마음을 가지라는 거에요. 그게 주기도문이에요. 그게 신앙의 출발이고.
7.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라,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빚진 자가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넣은 예를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십자가와 성령을 보내어 주셨다.
두 번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말씀도 많은 오해가 있어요. 내가 용서 해 주었는데 하나님도 나를 용서해 달라고, 그런 말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 한글이 가지고 있는 한계인데요, 아람어에는 한글에 없는 동시성 완료형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용서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여러분들이 고백 해야 하는 부분이 이런 부분이에요. 저는 제일 싫어하는 말이 우리 사랑합시다, 우리 용서합시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해요,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용서해요, 그래서 설교로서 사람에게 죄책감을 불어넣어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그 속에 있어요.
예수 믿으면은 사랑 해져요, 설교는 여러분들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에요. 왜 그러면 이 동시성을 이야기했는가, 왜 주님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준 것같이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가, 유대인들은 일곱 번씩 용서해라 그랬어요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잘못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라, 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은 자가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넣은 예를 이야기 해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에요.
일만달란트가 얼마냐 하면은 시골 노동자가 이 백사 십 만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돈이에요. 경에 가까운 숫자에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그런 빚이에요. 우리는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에요. 우리는 도저히 우리 힘과 능력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없는 존재에요.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십자가와 성령을 보내어 주신 거에요. 그 은혜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백데나리온 빚진 자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탈무드 이야기에 백데나리온 빚진 자, 백데나리온이 얼마냐 한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의 품삯 입니다. 우리나라로 한 십 만원 되니까 우리나라로 한 오백 만원 되겠지요. 조장로님이 이탈리아 갔다 오더니만 이탈리아의 일용 근로자의 하루 임금이 사 십 팔 만원 이래요.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국민 소득이 비슷한 나라 입니다.
8. 사람을 고소해 버리는 순간 네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것이 무효 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그 무한한 은혜를 알게 될 때, 고소하고 싶은 잘못을 잊어 준다.
여러분 백데나리온 우리나라로 치면 오백 만원 여러분들이 빚지면은 고소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고소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 인간 관계에 왔을 때, 그 사람을 고소해 버리는 순간 네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것이 무효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용서하지 못한 그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넣을 때 저놈도 넣어라 하면서 예수님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의 그 무한한 은혜가 없이 자기 의로 무엇을 할 때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거에요. 용서하려 하지 마세요.
저는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목사로서 부끄러웠어요. 영화감독도 이 정도의 정신 세계가 있는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주인공이 또 사모이름 하고 같더라고, 신애, 전도연이, 남편 잃어 버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낙향합니다. 혼자 아이 하나 대리고 같기 때문에 동래 사람들에게 무시 안 당하려고 돈 많은 척 합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자기 아이 학원 원장이 유괴를 해서 아이를 죽여 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저 남편의 고향 그곳에서 아이를 잃고는 거의 반 미처 갈 때 밀양의 교회가 전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그는 알고 난 뒤에 마음의 분노가 사라지면서 자신도 자기의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그 원수를 용서 해 주도록 중보 기도도 합니다.
그 중보의 기도의 열매대로 이 신애는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고, 교도소에 찾아갑니다. 교도소 이면에 있는 그 살인범이 뭐라는 가 하면은 나는 이곳에 와서 하나님 만났습니다.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할 때에 이 신애가 뭐라는 가 하면은 내가 용서 안 했는데 어떻게 네가 하나님의 용서를 하고, 그런 신은 믿지 않는다고 분노하면서 사라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는 그런 용서가 아니에요. 가해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피해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는 거에요. 왜 피해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드려야 되는가, 가해자의 잘못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안 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 등뒤로 던지지 않느냐!
맨날 하나님의 은혜만 하고 할렐루야만 하면서도 옛날의 목사님은 옛날의 집사님은 카운트다운 얼마나 많이 해요. 전부 자기 의이지요. 내가 그때도 참아 주고 용서 했는데 교회 엉망진창 만드는 거지요. 탕감 받을 길 없는 우리들, 천국에 갈 수 없는 우리들, 우리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아버지 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가족을 만드시는 이것 받아 드리게 될 때,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그 무한한 은혜를 알게 될 때, 고소하고 싶은 정도의 나에게 잘못한 잘못을 잊어 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랬으면 싶어요.
당회는 교인들의 안위와 행복에 대해서 교회의 존재의 이유를 찾고, 여러분들은 내 능력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 해서 여러분들만의 소유가 아니라, 소유는 여러분들이 하시고 관리는 함께 나누면서 없는 사람에게도 좋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그런 교회. 이기적인 인간이 살다 보면은 상처를 주고 받을 때 가족의 눈으로 봄으로 말미암아 잊어 주는 것, 저는요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요 잊어 주는 거에요. 용서하는 게 아니더라고. 남과 가족의 차이는 남은 용서해 주어 놔 놓고 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쓸데 없는 이야기해요. 가족은 잊어 주었기 때문에 그게 허물이 되지 안 해요. 그래서 우리 교회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자기 약점이 허물이 되지 않는 교회가 되자.
9. 주기도문에서 사탄에게서 우리를 구해 달라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성령이 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족이 된 것을 부정하게 하는 종교 적인 과업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죄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해요.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여기 악은 중성 명사일 때는 악이고요, 남성 명사가 되면 사탄이에요. 사탄에게서 우리를 구해 달라는 거에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거에요. 사탄의 유혹이 뭔가, 주일날 골프 치러 가자고 유혹하는 친구, 그것은 사탄의 유혹이 아니라 친구의 유혹이에요. 사탄의 유혹은요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몰라서 채우며 살려고 하는 유혹 그래서 교회에 헌신을 하지 아니하고, 교회는 교인의 안위를 위해서 존재하지 아니하고, 종교적인 과업을 성취하려고 하는 유혹이 사탄의 유혹이에요.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도 얼마나 사탄의 유혹이 날마다 우리 속에 있어요. 저금해라, 너 그래 살다가 못산다, 하나님의 은혜의 분복에 만족하세요. 사탄의 유혹의 두 번째로 뭔가, 공동체를 믿지 못해서 헌신하지 못하게 해요.
세 번째로 용서하라는 거에요. 가족으로서 잊어 주는 것을 못하게 해요. 저는 하나님에게 너무 감사한 게 있어요. 저도 성질이 너무나 더러운데 하나님이 그 더러운 성질에 참 좋은 것 하나는 뭐냐 하면은 자고 나면 다 잊어버려, 어제 일이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원수가 안 돼. 오늘도 여러분 이런 은사를 받으세요. 성령의 소멸 제가 뭔데요, 성령이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아버지 되게 한 이 사실을 부정케 하는 거에요. 그 아버지를 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족이 된 것을 부정하게 하는 종교 적인 과업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죄에요. 우리 교회는 내년이면 목회 3기가 원년이 되는데 저는 그래요 다음 목사도 어떤 목사 능력 있는 목사 필요 없어요, 교회 교인을 자기 가족만큼 사랑하는 목사, 교인의 행복과 교인의 안위가 목적인 목회가 되는 목사.
10. 우리 모두가 나의 탐욕을 채워 주는 신이 아니고, 들풀에 깃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지고 가는 삶, 불균등한 세상 속에 균등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빛이 되기를 바라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중한 고난을 겪으신 것이다.
다음 번 어떤 장로 세워야 되는가,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그 하나님을 믿어서 채우려고 하는 장로 말고요, 내 능력으로 얻었다 해서 자기와 자기 가족만 잘 살려고 하는 것 말고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최소한 11조는 할 수 있는 사람, 우리 집 헌금을 할 수 있는 사람, 교회 당회에 무엇을 할 때 교회 형편을 헤아려서 어느 것이 교인의 최대의 행복에 최대 공약수인가를 살필 줄 아는 분,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 불균등한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인문학은요 현상에 대한 분석은 정확하지만 대안이 없어요. 현상에 대한 분석은 정확하고 표면적인 원인은 찾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대안을 못 찾아요. 성경은 근본적인 원인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였든 것, 그 죄가 오늘의 불균등한 세상을 만들었고, 그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나타내 주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우리 모두를 가족 되게 하셔서 우리 모두가 나의 탐욕을 채워 주는 신이 아니고, 들풀에 깃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지고 가는 삶, 그래서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을 땅에서도 맛볼 수 있도록 교회는 불균등한 세상 속에 균등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빛이 되기를 바라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중한 고난을 겪으신 겁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곳에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종교적인 과업의 성취나 기독교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들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까투리 날개 짓 하듯이 서툴게 날개 짓도 했고, 독수리 비상하듯 비상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교회의 숫자의 자랑이나 재정 규모의 자랑이나 교회가 사회에 대한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을 자랑과 기쁨으로 여기며 왔습니다. 이제 목회 3기를 목전에 둔 우리 사랑하는 교회 교인들 내 능력으로 재물을 얻었다 하지 않고, 내 능력으로 재물을 얻었다 해서 쌓아 두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최소한의 의무 온전한 11조, 우리 집 헌금, 잘 감당 헤서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는 분명히 부자와 가난한 자가 존재하지만 가난한 자도 부한 자에게 기죽지 않고, 부한 자도 가난한 자에게 비난 받지 않고,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의 문화와 삶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바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어서 가족이 되게 하신 그 구원이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 되는 목회 3기가 되도록 성도들의 마음에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그 하나님을 믿게 하여 주시고, 쌓아 두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교회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탄의 유혹을 이겨서 이제는 강단에서만 외쳐 지는 복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실존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이 예물을 사용하여 주시고, 성도들의 생업을 부유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내 능력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 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임을 알아서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은혜의 빚진 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교인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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